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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8일 화요일

피 토하며 죽어간 남자... 그는 '삭힌 홍어'였다

18.05.09 08:12l최종 업데이트 18.05.09 08:12l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편집자말]
 임성국과 홍어회
▲  임성국과 홍어회
ⓒ 고정미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 2시간을 달려 도착한 흑산도 바다는 섬 이름처럼 검고 깊었다. 그 검은 빛깔 때문인지 섬 전체가 스산해 보였다. 선착장에 내리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홍도를 가기 위해 온 관광객들이었다. 흑산도는 큰 섬임에도 홍도를 경유하기 위한 섬으로서의 역할이 큰 듯 보였다. 흑산도에 거주하는 몇 사람만 내렸다. 우리는 곧장 흑산도 여객터미널로 향했다. 

"대둔도 들어가는 배는 언제 옵니까?"
"아, 수리요? 30분 정도 기다리시면 옵니다. 근데 나오는 배가 오후 3시에 있으니 오늘 나오시려면 그 전까지 오셔야 해요."

지금 시간이 오전 10시니 11시에 대둔도에 도착한다고 하면 4시간밖에 없었다.

"섬에 민박집이 있나요?"
"그 섬은 작아서 민박 같은 건 없고요. 주무시려면 여기 예리(대흑산도)로 나오셔야 합니다."

수리라고 불리는 섬을 오가는 객선은 작았다. 배에 오르자 먼저 타고 있던 5~6명의 사람들은 우리를 경계했다. 섬에 낯선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은 반갑지 않다는 눈치였다. 

"모두들 내가 임성국을 죽였다고..."

30여 분 정도 배를 탔다. 바다는 온통 김, 미역, 전복 양식장으로 꽉 차 있었다. 양식장 사이로 난 뱃길을 따라 들어가려니 원래의 시간보다 더 걸렸다. 수리라고 불리는 대둔도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는 동안에도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았다. 배가 육지에서 멀어지는 동안에도 그들은 우리를 계속해서 경계했다. 

"왜 저렇게 경계하지? 무슨 공포영화에 나오는 마을 사람들처럼."

배 조사관이 혼자 중얼거렸다. 곧장 흑산면 출장소를 찾았다. 섬마다 설치된 출장소는 섬에서 처리할 수 있는 간단한 민원을 처리하는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소통공간이기도 했다.

섬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출장소에 들어가자, 마치 집에서 자다가 나온 듯이 편한 복장을 한 남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서울에서 오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예, 수고많으시네요."

그는 급하게 책상을 정리했다. 

"혼자 근무하시나 봐요?"
"그럼요, 코딱지 만한 섬에 민원도 별로 없어서 그다지 바쁜 것도 없네요. 그나저나 장소가 누추해서 어쩌죠?"

먼지가 쌓인 책상은 어림잡아도 수개월은 사용한 적이 없는 듯 보였다.

"저희가 오늘 만날 사람은 김○○인데 어디 계신가요?"
"아 그 김씨가 오늘 양식장에서 올라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 왔는가 보네요. 잠시만요."

출장소장이 마당에 나가 바다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아직 양식장에 있나 보네요."

그는 휴대전화를 집어들어 전화를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는지 이내 끊었다.

"아, 이 양반, 전화를 안 받네."

나는 소장에서 우리가 직접 움직이겠다고 했다.

"그럼, 작은 모터보트가 있는데 그거 타고 나가실라요? 저 앞이라 금방이긴 한데..."

다시 섬을 빠져나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간은 늘 우리의 편이 아니다. 우리는 곧장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정박되어 있는 작은 보트에 몸을 실었다. 로프가 풀리고 곧장 모터에 시동이 걸렸다. 그렇게 출발한 배가 5분여 정도 달려 전복 양식장 앞에서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 순간 양식장에서 한 사내가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그곳에 정박해 있던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저 양반이 왜 도망을 가?"
"저희가 만나려 했던 사람이 저 사람입니까? 그럼 쫓아가야죠."

우리 역시 그 보트를 쫓았다. 뜻밖에 추격전이 되었다. 양식장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그 배를 따라가던 중 갑자기 '텅' 소리와 함께 배가 허공에 뜨더니 전복되었다. 양식장 사이를 연결하고 있던 로프가 스크루에 감겼던 것이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이웃 주민의 도움으로 구조가 되었고, 도망간 그도 곧 해경에 의해 잡혀 마을로 들어왔다.

우리는 마을 이장의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그를 마주했다. 조금 전 사고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나로서는 그를 향해 치미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모든 일정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 노트북 등 기자재는 방수가방 덕택에 무사했다. 마을 이장 댁 거실에 마주하고 앉았다. 일명 '몸빼'라고 부르는 옷을 입고 있는 내가 부끄럽기 보다는 이런 상황을 만든 그를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 도망갔느냐는 말에 그는 무서웠다고 했다.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물었다. 지난 일로 인해 자신이 해를 입을까봐 무서웠다고 했다. 무서운 지난 일이 무엇인지 또 물었다. 모두들 임성국을 자신이 죽였다고 하는 것이 무섭다고 했다.

"내가 임성국이를 죽였다고 모두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았어요."
"왜 그렇게 손가락질 한다고 생각하셨나요?"
"그게..."

삭히지 않은 홍어

1985년 당시 그는 대둔도 수리마을의 이장을 맡고 있었다. 젊은 이장은 섬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생선을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마을에 필요한 일이라면 언제라도 달려갔다. 그러나 섬 생활 중 마음에 걸리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마을에서 가장 부자로 소문난 최씨 때문이었다. 최씨네 형제 중 한 명이 한국전쟁 때 월북하였고, 그 집안을 감시하거나 조사하기 위해 안기부와 보안대 수사관들이 섬에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섬사람들은 마을에 피바람이 불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러다 결국 사건이 터졌다. 85년 광주 보안대에서 최씨네 사람들을 잡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던 임씨네 큰 아들 임성국도 잡혀 갔다.

"평소 성국이는 마을에서 성실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어요.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혼자 힘을 돌보며 살아도 늘 예의 바르고 성실했거든요. 그 녀석이 물고기를 잡아오면 꼭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어요."

그렇게 성실했던 임성국은 광주 보안대에서 이틀간 조사를 받고 섬에 돌아왔다. 그러나 섬에 돌아온 임성국은 이전의 임성국이 아니었다. 힘이 좋고 날랬던 임성국은 바위에 멍하니 걸터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다. 가끔 피를 토할 만큼 깊은 기침을 하기도 했다. 혼자 힘으로 화장실까지 걷는 것도 힘들었다. 힘들게 소변을 보면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보안대에서 죽도록 맞았답니다. 결국 성국이는 보안대 다녀오고 나서 보름인가 있다가 죽었어요. 장례를 치르며 죽은 성국이의 몸을 보니 온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더라구요."

마을 이장이었던 그는 보안대 수사관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의 동향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입장에서 보안대 수사관의 지시를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부할 수 없는 지시였다. 그리고 거부하지 못한 지시로 인해 임성국이 죽었다는 죄책감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보안대에서 가혹행위를 당해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증언해 줄 다른 사람은 없을까요?"
"증인이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 한 명 있어요. 보건소장."
"보건소장요?"
"그때 이 섬마을에 처음 보건소가 생겨서 고등학교 갓 졸업한 간호사가 초대보건소장으로 왔었죠. 내가 그 보건소장 이름을 보건소 건물 입구에 직접 새겨줬다니까. 그 보건소장이라면 분명 치료도 해주고 했을 테니까."

곧바로 함께 간 배 조사관이 보건복지부를 통해 초대 보건소장의 재직여부 등을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건소장이 전라북도 남원의 작은 마을에서 보건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미 흑산도로 나가는 배는 끊긴 시간이었다. 이장이 눈치를 보다 어렵게 말을 뗐다.

"괜찮으시면 제 배로 모셔다 드릴게요. 그 전에 식사부터 하세요. 지금껏 아무것도 못 드신 것 같으니..."

곧이어 푸짐한 한상 차림이 나왔다. 갖은 반찬과 함께 회, 탕이 올라 있었다. 회를 먹어보니 쫄깃하고 단맛이 강했다. 아니 씹을수록 차진 것이 찹쌀떡을 씹는 것 같다는 편이 맞을 것 같다. 탕도 함께 맛을 보았다. 시원하고 칼칼한 맛이었다.

"회가 아주 쫄깃하고 차지네요. 무슨 회인가요?"
"그것이 홍어회예요. 탕도 그렇고. 삭히지 않은 홍어는 그렇게 차지고 단맛이 나요."
"아니 홍어는 삭혀서 먹는 음식 아닌가요?"
"삭힌 홍어는 큰 배가 먼 바다에 나가서 잡아오는 문화에서 시작된 거지요. 예전에 흑산도에서는 목선을 타고 가까운 앞바다에서 잡아서 왔으니 싱싱한 홍어만 먹었어요. 그래서 탕도 회도 삭히지 않은 것을 먹었지요. 성국이가 그 홍어를 겁나게 잘 잡았다니까."

그랬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삭힌 홍어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육지에서의 홍어는 모두 삭힌 홍어였던 것이다. 

본래의 맛을 잃어버린 홍어처럼

다음날 우리는 배를 타고 섬을 빠져 나와 남원으로 향했다. 보건소는 남원의 작은 시골 마을 입구에 눈에 띄는 흰색 건물이었다. 미리 협조를 받아 놓기는 했으나, 우리를 맞이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저녁 무렵이라 보건소에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는 평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로 찾아오세요. 물리치료기에 누워서 치료도 받고 수다도 떨고 하시지요. 여기가 경로당이에요."

차를 내주며 그녀가 말했다. 

"오늘 저희가 찾아온 이유는 미리 말씀드렸지만..."

그녀가 말을 받았다.

"네, 저도 잊고 있던 기억이었는데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어요. 제가 그 섬에 들어갔을 때 나이가 21살인가, 22살 때였어요. 학교를 막 졸업하고 처음 간 곳이 외딴 섬이었으니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그리고 그 사건이 났던 그때는 보건소 건물조차 없었어요. 보건소는 그 사건 나고 다음 해에 지어졌거든요."
"섬은 굉장히 아름다운 섬이더라구요. 이장님이 특별히 회도 주시고.."
"혹시 홍어회 드셨어요?"
"네, 굉장히 신선하던데요?"

그녀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맞아요. 그곳 생선들이 모두 신선해요. 보건소가 지어지기 전에 이장님 댁에서 지냈는데 그곳에서 밥을 자주 얻어먹었거든요. 그때마다 신선한 해산물이 자주 올라왔어요. 삭히지 않은 홍어도 그때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었죠." 

이 사건으로 죽은 임이라는 청년도 자주 홍어나 생선을 잡았다고 했다. 임성국의 홍어는 그녀의 기억 속에 그 옛날과 연결된 끈이었던 것이다. 

"정말 건강했어요. 다른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지만 죽은 그 사람도 보건소에 올 일이 거의 없었어요. 생선이나 가져다 줄 때 빼고는요. 그런데 그 사람이 보안대에 잡혀갔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그리고 며칠 뒤에 보건소에 찾아 와서는 진통제가 있으면 달라는 거예요."

마을 이장으로부터 보안대에서 고문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던 그녀는 진통제를 구하러 온 그가 무서웠다. 찾아온 그의 눈빛은 공포로 가득했고, 빠릿빠릿하지 않았다. 이미 혼이 빠진 것 같은 상태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의 죽음을 정상적인 자연사로 볼 수 없어요. 죽음에 이를 정도의 큰 질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보안대에서 가혹 행위를 당하고 와서 죽었다는 정황도 있잖아요. 결국 보안대에서의 가혹 행위가 그의 죽음에 영향을 주었을 거예요."

학교를 갓 졸업해 홀로 섬에서 지내는 동안 상처와 죽음을 대면한 그녀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공포와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살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때의 기억을 잊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잊히지 않았다. 

본래의 날 것으로의 홍어가 아닌 삭혀져 본래의 맛과 색을 잃어버린 홍어처럼, 그 섬에서 죽어간 그도 보안대에서 두들겨져 보름간 삭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보안대에서 알몸으로 벌벌 떨던 그는, 그를 요리하던 수사관들에게 그저 하나의 던져진 요리 재료였다. 삭혀져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본래의 자기를 잃어버려야 하는...
임성국은
임성국은 전남 신안군 대둔도에 살았다. 가족은 어머니와 임성국, 임성산, 임성자 남매가 살고 있었다. 대둔도는 섬이 좁아 농사를 지을 곳이 많지 않다. 섬 사람들 대부분은 바다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임성국의 집도 바다에 의지해 살고 있다. 가난한 임성국의 집안은 마을에서 가장 형편이 좋은 최응두라는 집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오빠 임성국이 광주 보안대에 끌려갔다 온 뒤 고문후유증으로 피를 토하며 괴로워할 때 여동생 임성자는 중학생이었다. 피를 토하며 점점 죽어가는 오빠를 보며 어쩌지 못했던 자신이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

오빠가 죽은 뒤 가족들은 끔찍한 섬을 빠져 나와 군산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가난은 끝이 없었다. 군산 외곽에서 작은 컨테이너를 빌려 살아야 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임성산은 변변한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모친에게 의지해 살았다. 이제 여동생도 결혼해 돌봐줄 사람 없는 임성산은 홀로 세상을 살아가야 했다.

2009년, 형 임성국의 죽음이 광주보안대의 고문후유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수억 원의 국가배상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친척이 모두 빼돌려 그의 가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가난한 집에서 살고 있다.

임성국은 대둔도에 묻혀 있다. 임성산, 임성자는 전라북도 군산시에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인권을 먹다] 연재를 24회로 마칩니다. 많은 성원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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