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한국 사회는 불평등과 차별에 항의하는 사회적 실천으로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서울 대학로에서 불법촬영과 편파 수사에 항의하는 규탄 집회가 열리고, 여기에 1만 명이 넘는 여성이 모였다. 누구의 예상도 넘은 사건이다.
"동일 범죄, 동일 수사, 동일 처벌"이 핵심 요구라니, 이런 상식을 주장하려 1만 명이나 모여야 하다니, 여기가 민주공화국인지 문명사회이긴 한지 기가 막힌다. 언론은 규탄과 항의가 벌어지고 참가자들이 '뿔났다'고 표현했지만, 이 사태를 제대로 표현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것이 그냥 시위였을까? 여성들은 일상이 된 젠더 폭력과 이에 대한 국가권력의 (무)감각에 몸으로 반응한 것이다. 차라리 '민란'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 당국과 대부분 언론은 처음부터 사태의 핵심을 잘못 짚은 듯 보인다. 동일 범죄, 동일 수사, 동일 처벌을 글자 그래도 해석하는 데 급급할 뿐, 여성들이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지금 여성들은 홍대 몰카 사건을 빨리 해결한 이유가 무엇이니, 피해자가 누구든 사건이 되고 해결하는데 차이가 없느니, 피의자와 구속률의 남녀 차이가 어떻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당국이 내고 언론이 받아쓰는 알량한 통계와 실적은 선전과 홍보 목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일방적이다.
사실부터 의심스러우니 당연히 관심사를 벗어나고 설득력도 없다. 우리도 손 놓고 있지는 않다고 하고 싶겠지만,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 피해자가 스스로 신고하고 따라서 경찰이 통계에 포함한 사건이 전체 몰카의 몇 퍼센트나 될까?
몰카 사건의 피의자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구속률이 3배나(!) 된다지만, 심각성이나 죄질의 형평성까지 따진 통계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건에서 한국의 사법체계는 흔히 남성에게 관대하고 여성에게 (선정적으로) 가혹하다. 홍대 몰카 사건의 여성 피의자를 유례없이 포토라인에 세운 것만 보더라도(판사 피의자도 서지 않는 바로 그 포토라인에), 이를 터무니없는 의심이라 할 수 없다.
"동일 범죄, 동일 수사, 동일 처벌"이 주장하는 진짜 변화는 무엇일까? 앞으로 비슷한 사건이 나면 누구라도 차이가 없게 수사하고 처벌하라는, 그 흔한 '형평성' 요구가 아니다. 사건 해결이 얼마나 빠른지, 처벌이 얼마나 강한지, 다 무슨 소용인가? 엄청나게 많이 모인 여성들이 함께 내는 목소리에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안심을 보장하라는 절박함을 듣는다.
내 문제, 일상의 불안, 그리고 고통은 사건과 수사, 처벌 이상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몰카 사회가 아닌가? 시간, 장소, 상황, 그 무엇도 가리지 않고 범죄가 일어난다. 어떤 여성이라도 오늘 집을 나서면 몰카를 찍힐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려야 한다.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 찍힌 영상이 이미 인터넷 공간을 떠다니는지도 모른다. 사건이 되든 아니든 불안과 공포는 일상이다.
일상이 되었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체제'의 문제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여성이 당면한 삶의 시스템. 이 같은 사태에 이르게 된 원인은 나중에 따지자. 문제를 해결하고 범죄에 대응하는 과정, 그중에서 신고와 수사, 처벌이라도 정상으로 작동하면, 공용 화장실을 이용할 때 '몰카 금지 응급 키트'를 준비해야 하는 이런 한심한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관련 기사 :
'화장실 몰카' 기승에 '몰카 금지 응급 키트' 등장).
아무런 죄의식 없이 몰카를 찍고 공유하며 소비하는 이 '체제'가 성립된 기반은 당연히 극심한 성 불평등이다. 이 문제와 범죄에 대응하는 과정은 성 불평등 체제 위에서 또 그 안에서 작동한다. 성 불평등 체제 한 가지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토대로 작동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현상은 우연인가 규칙인가?
"범죄발생 건수에 비해 기소율이 낮은 이유는 수사단계에서 피해자와의 합의가 이뤄지고 가해자가 초범인 경우 기소유예되거나 불기소처분. (…) 수사당국이 그냥 사진 한장 찍은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많고,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과 실제 피해에 비해 처벌도 미진하다."(☞관련 기사 :
한국 여성의 일상적 불안 '몰카'…"더는 못 참겠다")
"그동안 '몰카'를 찍은 현직 판사나 국가대표 운동선수, 의사 등이 집행유예를 받거나 약식기소에 그쳤잖아요.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여성들은 무력감과 분노, 우울감에 시달립니다."(☞관련 기사 :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집, 직장, 학교…"여성은 어디서나 공포에 떤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보다 일정한 방향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 문제다. 조사, 수사, 처벌. 판결, 그리고 언론 보도와 정부 정책은 진공 상태에서 만들어지고 집행되지 않는다. 이 모든 과정과 실천은 권력관계 그것도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반드시 젠더 불평등을 반영하고 따라서 치우친다.
여성을 배반하는 몰카 사건 처리 또한 이런 종류의 권력 불평등 속에서 싹튼다. 가장 직접적인 한 가지 권력관계를 예로 들면, 사법부, 검찰, 경찰 등의 사법체계가 내장한 것, 이는 차마 균형을 입에 올릴 형편이 아니다.
"성폭력 사건을 전담하는 재판부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남성이다. 서울고법 성폭력 전담 5개 재판부 15명의 재판관 가운데 여성은 단 3명에 불과하다. (…) 서울중앙합의부와 단독재판부 전체 22명의 재판관 가운데 여성 재판관은 10명으로 절반에 못미친다. 여성 합의부 재판장은 한 명밖에 없다."(☞관련 기사 :
사법부의 '성인지' 아직 갈 길 멀다)
"법무부 본부조직을 포함해 검찰청, 교도소·구치소, 출입국·외국인청 등 전국 법무부 소속기관에서 일하는 여성 구성원이 임용 이후 성희롱·성범죄 피해 경험이 있었는지를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7천407명) 중 61.6%가 피해 경험이 있었다고 답했다."(☞관련 기사 :
권인숙 "서지현 사건은 빙산 일각…법무·검찰 내 대다수 피해")
"경찰 내 여성고위직 비율은 경무관 이상이 될수록 급격히 줄어든다. 현재 경찰 내 치안감(본청 국장, 지방경찰청장) 이상은 33명 중 여경은 한명도 없고 경무관은 2명(2.9%)에 그쳤다. 간부급도 총경 14명(2.5%), 경정 116명(4.5%), 경감 565명(5.6%) 수준이다."(☞관련 기사 :
경찰 경감 이상 여성간부 비중 5%→7% 늘린다)
1만 명의 항의 집회는 조사와 처벌의 형평을 넘어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 사법체계의 젠더 불평등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이 아니라면, 이제는 다른 균형과 그 결과를 상상해 보자. 여성에 대한 몰카 사건을 조사하고 처벌하는 것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예방과 대책 만들기가 지금처럼 소극적이고 지지부진할까? 모든 여성이 불안에 떨어야 하는 '몰카 체제'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사법체계 또한 혼자서 저절로 편향된 것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건강 체제에 내재한 젠더 권력의 불평등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 모든 것이 얽혀서 불평등한 '젠더 레짐'을 만든다. 오늘날 여성이 겪는 삶의 고통과 어려움, 차별과 불평등이 여기에서 연유한다고 할 때, 지금 여성들이 외치는 것은 야만적으로 기울어진 모든 권력 관계를 바로잡자는, 정의에 대한 요구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