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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9일 일요일

미국이 적폐다

[유라시아 견문] 2017 : 재조산하, 개조천하
2017.10.29 17:41:59





1. 신극서(New Far West)

적폐가 돌아왔다. 선거 결과를 뒤집었다. 유별난 새 인물도 기득권 양당제를 돌파하지 못했다. 구적폐에 신적폐가 덧쌓인 꼴이다. 미국 이야기이다. 올 5월 사라예보 영화제에 초빙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시국 인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보도를 '가짜 뉴스'라고 꼬집는다. 정작 적폐의 정수는 미국의 정치체제(Deep State) 그 자체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네오콘-네오리버럴 합작의 미국식 세계화를 멈추지 못한다. 스톤은 본인이 직접 인터뷰한 신작 다큐 <푸틴>을 상기시켰다. 2000년 이래 푸틴은 클린턴과 부시, 오바마에 이어 트럼프를 차례로 상대했다. 대상이 매번 바뀌지만 미국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얼굴 마담을 바꾸어 가면서 금융자본과 군산복합체가 지배하는 체제를 지속할 뿐이다. 올해는 유독 주류언론들도 합세했다. '러시아 스캔들'이라고 하는 희대의 사기극을 연출하고 공연했다. 마치 트럼프의 당선이 푸틴의 선거 개입 때문인 양 왜곡시킨 것이다. '기레기'들이 1년째 선전선동으로 내부 적폐를 외부 탓으로 돌린 것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과점지배에 넌덜머리를 냈던 미국 (백인) 민중의 '민주적 목소리'를 철저하게 기망시켜 버린 것이다. 조지오웰의 미래소설 <1984>에 딱 어울리는 국가가 오늘의 미국이라는 것이 올리버 스톤의 결론이다. 나는 결코 과장된 진술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포스트-트루스(Post-Truth), 벌거벗은 임금님, '대안적 진실'에 더 가깝다.
러시아와의 신냉전 국면을 타개하려던 트럼프의 세계 구상은 적폐의 총공세로 초장에 무산되었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해결책은 없음을 거듭 피력하던 최측근 책사 스티브 배넌도 축출되었다. 세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최소화하겠다는 고립주의 노선이 조기에 좌초된 것이다. 사실상의 선거 불복 기획이 성공한 셈이다. 재차 적폐들이 미국의 운전대를 잡았다. 난폭한 대리 운전기사를 막후에서 몰아가며 더 많은 군사 개입을 획책하고 실행한다. 따라서 스캔들의 이름 또한 바로 불러주어야 하겠다. '러시아 스캔들'이 아니다. '미국 스캔들'이다. 냉전기 소련 공포증과 혐오감을 총동원한 '워싱턴 스캔들'이다. 과연 미국의 민주주의, 선거는 요식 행위일 뿐이다. 워싱턴에 똬리를 틀고 있는 10% 지배계급연합이 대중을 기만하며 영구히 지배한다. 20세기 한때 '현실 사회주의'라는 말이 있었다. 21세기 이제는 '현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궁리할 때가 되었다. 말과 실이 부합하지 않는다. 껍데기만 남았다.

"미국이 빠지면, 이제 중국이 이끈다."  

독일 총리 메르켈의 발언이다. 시칠리아에서 열린 G7회담과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G20 회담, 두 번의 국제회의에서 거듭 밝힌 견해이다. 미국은 이미 파리기후협정에서 이탈했다. 환태평양(TPP)에서도 빠져나갔고, 환대서양에도 시큰둥하다. 유네스코서도 탈퇴했다. 대서양은 갈수록 멀어져간다. 유럽과 미국의 틈이 점점 더 벌어진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난민/이민 문제가 시급한 화두였다. NATO의 개입이 자충수가 된 것이다. 미국을 따라 아랍을 '민주화' 시킨답시고 군사 개입을 하고나면 아랍에서 유럽으로 이민/난민이 몰려드는 형세가 십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 '구미'(The West)를 고수함으로써 유리비아가 온통 혼란인 것이다. 끝끝내 1945년 이후 확립된 대미종속적 유럽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이다. 미국 고립주의를 따라서 유럽 고립주의로 퇴행한다는 말이 아니다. 출로를 바꾸어 활로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대서양에서 유라시아로 방향을 선회한다. 유럽의 땅 아래로 에너지의 3할이 러시아에서 흘러들고 있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봉쇄가 유럽에도 폐를 끼치고 해를 입히고 있다. 선봉에 선 나라가 유럽의 심장 독일이다. 독일과 러시아가 합작하는 '다른 유럽' 만들기가 가동된다. 대서양부터 태평양까지,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구대륙 연합이 도모된다. 땅 위로는 중국 자본이 건설한 철도와 도로와 항공로와 인터넷 연결망이 깔린다. 유럽연합과 유라시아경제연합과 일대일로의 합작을 통하여 유럽 최대의 제조업 강국 독일의 제품이 유라시아 전역으로 수출된다. 베를린-모스크바-베이징의 아귀가 딱-딱-딱 들어맞는다. 윈-윈-윈 전략이다. 

미국이 중국에 무역전쟁을 발동한다는 말도 뒷북이다. 태평양을 바라보며 개혁/개방하던 20세기 후반이 아니다. 이미 중국의 수출과 투자는 2016년을 기점으로 미국에서 유럽으로, 신대륙에서 구대륙으로 바뀌었다. 내륙형, 대륙형 개혁개방으로 전회하였다. 미국은 더 이상 '자유의 나라'가 아니다. 온/오프라인 장벽을 높게 쌓는다. 외국인 투자하기에도 유럽이 미국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자유무역의 거점이 대서양/태평양에서 유라시아로 이동하는 것이다. 중국 기업들이 확보하고 있는 현금다발이 무게로 따지면 수천 톤에 이른다. 유럽기업과 중국기업 간 동/서 합병이 갈수록 늘어난다. 
서유럽만도 아니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에도 새 길을 내고 있다. 알바니아 공항을 중국 자본이 만든다. 마케도니아와 몬테네그로 간 국경 고속도로도 건설한다. 베오그라드의 다뉴브 강에 새로 새워진 교각의 이름도 중국-세르비아 우정의 다리이다. 그리스의 아테네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잇는 고속철도 만들고 있다. 탈냉전 이래 유고연방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1989년 체제의 모순이 응축된 바로 그 장소에 '발칸로드'가 겹겹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올해 세르비아 대선을 베오그라드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유럽과 러시아 사이, 서로마와 북로마 사이 균형을 되찾는다. 걸프만국가의 투자를 유치하여 유럽과 아랍 사이 중용을 취한다. 세르비아는 중국과 동유럽 국가들 사이 '16+1' 연례 회의도 출범시켰다. SU(Soviet Union)에도 EU(European Union)에도 족하지 못했던 발칸이 주도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라고도 하겠다.  
하여 '歐美'(구미)라는 용어 또한 슬슬 녹이 슨다. 아련한 추억의 옛 단어가 되어간다. 유럽과 아메리카, 유메리카는 200년 앙시앙레짐, 적폐의 온상이다. '구아'(歐亞), 유라시아가 미래형 신조어이다. 오래된 미래가 구대륙에서 새롭게 펼쳐진다. 신상태가 무르익어 신시대가 되었다. 고로 '중동'이라는 말도 재고할 필요가 크다. 근동(Near East)과 극동(Far East)사이에 중동(Middle East)이 자리했다. 유라시아와 유라비아의 극서에 자리한 영국식 지정학이 투영된 용법이다. 그 영국이 유럽에서마저 이탈한 브렉시트는 21세기의 대반전을 상징한다. 아시아로 축이 이동하면서 지리감각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유럽이 극서(Far West)가 되고, 아랍은 중서(Middle West)가 된다.  

2. 신중서(New Middle West) 

2017년 트럼프의 첫 UN 연설은 '천민 민주주의'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천박하다. 얕고 옅다. 좁고 낮다. 그 대척점에서 가장 격조 높고 기품 서린 연설을 선보인 인물이 이란의 로하니 대통령이었다. 이슬람의 정통 학자 울라마 출신다웠다. 교양이 넘치고 사려가 깊으며 우아하고 단정한 문장으로 트럼프의 졸렬한 연설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해갔다. 미천한 상놈과 위엄을 갖춘 지도자 간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이슬람 공화국' 이란의 국격을 한껏 과시한 것이다. 대통령의 글쓰기와 말하기, 전범을 제시했다. 

소귀에 경 읽기, 기어이 미국은 이란과의 핵합의를 파기할 태세다. 반신반의,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였다. 신뢰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무뢰배, 불량국가이다. 양국 간 합의도 아니었다. 다자협의였다. 러시아와 중국은 당장 재협상은 불가하다는 의사를 밝혔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도 기존 합의가 유효하다는 뜻을 표했다. 5+1 합의가 5:1의 대결 구도로 굳어진 것이다. 형세를 보자. 신대륙 국가 하나만 빠진 꼴이다. 미국만 고립된 것이다. 포스트-아메리카(Post-America)라는 신상태, 리-유라시아(Re-Eurasia)라는 신시대를 상징한다. UN에서 로하니가 이란 핵합의를 다른 지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국제관계의 새 모델로 추켜올리자, 맞장구를 쳐주며 추임새를 넣은 인물 또한 메르켈이다. 메르세데스 벤츠를 비롯하여 독일의 여러 기업들이 이미 이란과 합작 사업을 체결했다. 유럽기업과 이란기업 사이에 여러 경제협력이 논의되고 있다. 중국과 인도 또한 이란의 천연자원 수입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래 항상적인 미국의 경제 제재를 경험해왔다. 미국과의 무역이나 투자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가 아니다. 내성이 생겼다. 내구력이 상당하다. 고로 미국 혼자서는 아무런 타격을 가하지 못한다. 미국을 따라 동참하는 똘마니 국가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졸개들이 더는 없을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 유라시아와 협력하여 이란 경제를 너끈하게 재건할 수 있다. 과연 올해 5월 테헤란에서는 이란에서 열리는 첫 번째 일대일로 포럼이 개최되었다. 이란을 종단하고 횡단하는 고속철도 두 개 노선을 신설키로 했다. 우루무치에서 테헤란을 지나 이스탄불에 가닿는 이슬람세계의 동/서 네트워크도 2020년까지 완공 짓기로 했다. 나아가 이란-유럽 간에는 유로화로, 이란-중국 간에는 위안화로 결제한다고도 한다. '오일-달러'라고 하는 지난 백년의 지하자원-기축통화 공식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희비의 쌍곡선이 극명하게 갈리는 곳은 시리아이다. 미국은 아사드 정권의 교체, '민주화'에 전력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맞은편에서 정권 사수를 지지한 나라가 이란이었다. 시리아 정부군에 현금을 조달해주며 군인 월급을 지불한 국가가 이란이었다. 시리아의 석유를 수입하여 재정을 보전해주고 의료부대와 보급부대를 투입해준 것도 이란이었다. 이란의 최정예군대, 혁명수비대가 직접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혁명수비대는 일반적인 국군이 아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이슬람혁명을 수호하는 성군(聖軍)이다. 새 천년이 되어서도 이슬람 문명 고유의 정치체제를 부정하고 '민주화'를 이식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더 이상 시리아는 이라크나 리비아처럼 미국의 기획대로 전복되지 않을 것이다. 4+1, 러시아와 이란, 터키와 이라크가 연합하여 시리아의 새 판을 만들어간다.
내전 이후 재건 지원에 총대를 멘 나라는 중국이다. 항산의 제공으로 항심을 지원한다. 한동안 중지되었던 다마스쿠스 박람회가 올해 다시 문을 열었다. 참가국들의 면모가 획기적이다. 오스만제국을 분할하여 '시리아'와 '이라크'라는 인공국가를 주조하며 서아시아 대분열체제를 만들어낸 영국과 프랑스는 없었다. 그들을 계승하여 중동을 세계의 화약고로 만들었던 미국도 없었다. 반면으로 브릭스의 모든 국가들이 참여했다. 특히 현금이 가장 풍부한 중국이 시리아의 교통망과 통신망 재건을 주도한다. 달리 말해 시리아 연결망이 일대일로와 직결된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도 다마스쿠스에 조응하는 '시리아의 날' 행사가 열렸다. 시리아 재건을 표방하는 첫 번째 국제행사였다. 다시금 장소가 의미심장하다. 동부의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아니었다. 서부, 왕년의 서역이었다. 닝샤(宁夏)의 회족 자치구, 인춴(银川)에서 개최되었다. 아랍-중국 연맹(Arab-China Exchange Association)이 공동으로 주최하고, AIIB가 주빈으로 초대되었다. 즉 시리아만 참여한 것이 아니다. 아랍국가와 비아랍국가 30여 개국이 참여했다. 중화세계와 이슬람세계의 공진화, 유라시아 합작이다.
'지속의 제국' 중국은 늘 역사적으로 사고한다. 중원의 사람들과 서역 사람들의 가교가 시리아 상인들이었다. 그들이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오가며 아라비아반도의 세계화에 공헌했다. 사막을 지나고 고원을 오르고 바다를 헤치며 활약했던 유라시아-시리아 상인의 거점이 바로 알레포였다. 하여 알레포 탈환의 상징성도 다대했던 것이다. 내전 중에도 알레포 상인들은 고향을 떠나 딴 곳에서 새 살림을 차리고 더욱 촘촘한 시장을 형성해왔던 것이다. 서중국에서 남유럽까지 국경도시와 국경시장을 잇는 뉴 실크로드, 샛길과 새 길을 만들어내었다. '거대한 뿌리'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 것이다.  
'난세의 제국' 미국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아랍의 약한 고리 카타르를 쳤다. 트럼프가 사우디를 방문하고 떠나자마자 GCC 국가들이 카타르와의 단교를 선언했다. GCC(Gulf Cooperation Council)란 무엇인가. 미국의 꼬붕 사우디와 그 아랍의 졸개들을 끌어 모은 왕정국가연합체이다. 1981년 출범 당시부터 이란을 겨냥한 조직이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이슬람 공화국'이라고 하는 현대적/진보적 이슬람국가가 등장하자 보수적 왕정국가들이 혁명 봉쇄를 위해 연합한 것이다. 그런데 유독 카타르가 이란과 부쩍 가까워졌다. '계몽 군주' 아래 '이슬람 계몽주의' 소프트파워를 축적해갔다. 대표적인 상품이 바로 도하에 거점을 두고 있는 <알자지라>이다. 구미가 주도하는 정보/지식 독점 상황을 타개하는 한편으로 '이슬람의 근대화'를 견인하는 언론으로 독보적이었다. 이란은 시아파 국가이고, 카타르는 수니파 국가이다. 그러나 종파로 갈라지지 않는다. 종파가 다를지언정 '이슬람의 근대화'라는 대의에 협동한다. 아랍의 보수적 수니파 왕정국가들로서는 카타르의 행보가 눈에 가시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 이란을 제재하겠다는 몹쓸 꼴을 따르기라도 하는 양, 카타르를 징벌하겠다며 못난 짓을 벌인 것이다.  
▲ 이슬람 예술 박물관(카타르 도하).ⓒ이병한

그러나 카타르 또한 의연하다. 수니파 이슬람 개혁의 선봉국가로서 자부심이 투철하다. 나도 여러 차례 도하 공항을 오고갔다. 지중해 사이 유럽과 아랍, 유라비아 연결망의 허브 도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우디는 좀체 거쳐 간 적이 없다. 사우디가 석유로 번 돈을 미국산 무기 구매로 재지불한다면, 카타르는 언론과 미디어를 키우고 스포츠와 문화 산업에 투자했다. 아라비아반도에서 가장 훌륭한 현대미술관이 자리한 도시가 바로 도하이다. 2022년 월드컵 주최국이 되었을 만큼 국제 축구계에서도 위상이 높다. 카타르 항공을 이용할 때마다 FC 바르셀로나의 슈퍼스타들이 영어와 아랍어로 안내하는 기내안전방송을 시청했다.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네이마르였다. 하필이면 카타르 단교 사태가 한창이던 무렵에 파리 상제르망으로의 이적 소식이 발표되었다. 카타르 정부가 이 역대 최대 규모의 이적에 관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바르셀로나는 카타르 국영항공사의 후원구단이며, 상제르망은 카타르가 소유하고 있는 구단이다. 경제 봉쇄도 아랑곳없이 세계 최대의 스포츠 시장에서 여전한 영향력을 과시했다는 것이다. 즉 카타르 단교로 카타르 또한 고립된 것이 아니다. 세계 최대의 LNG 수출국 카타르의 연결망이 반증한다. 최대 교역국은 이미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2010년 이래 중국이 아랍의 지하자원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로 등극했다. 오히려 흔들리고 있는 쪽은 아랍의 적폐, GCC이다. 카타르시트(카타르+엑시트)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이란은 승자로 등극했다. 이슬람세계의 주도권이 확연하게 사우디(왕정)에서 이란(공화정)으로 넘어간다.
사우디, 이란과 더불어 이슬람세계 3강을 겨루는 터키 또한 이란과 부쩍 돈독하다. 시리아 내전 종식에 양국이 의기투합했으며, 이라크를 더욱 잘게 분할하려는 쿠르드 독립의 움직임도 양국이 협력하여 대처한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몸소 테헤란을 방문하기도 했다. 터키 대통령의 이란 방문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각기 오스만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의 후예, 경쟁의식이 남달랐다. (세속의 수장) 로하니 대통령은 물론 (영성의 수장) 최고지도자 하메이니와도 회담했다. 지난해 이스탄불 현장에서 목격한 군사 쿠데타의 좌초 이후 터키의 방향 선회는 가속일로이다. 유럽의 일부가 되고자 했던 지난 백년과 급진적으로 결별한다. 더 이상 EU 가입에 안달하지 않는다. NATO에서도 명목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코소보를 '독립'시키겠다며 공습을 마다치 않았던 EU/NATO가 카탈루냐 사태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위선적 모양새를 냉소하며 비아냥거린다. 행동 또한 잽싸다. 이미 러시아산 S-400을 구매했다. 미국과 NATO의 공개적인 반대 의사에도 보란 듯이 감행한 것이다. 더 이상 20세기의 미국이 아니다. NATO 또한 냉전기의 유산일 뿐이다. 터키판 적폐 청산이다. 돌궐의 후예, 터키의 축 또한 명백하게 유라시아로 이동한다. 조만간 SCO 가입도 가시화될 전망이다. NATO에서 SCO로의 이동, 세기적인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다.  

▲ 이란의 로하니 대통령과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 ⓒwikipedia

통계 지표가 객관적 토대를 말해준다. 터키와 미국 간 교역은 갈수록 줄고 있다. 미국의 원조로 성장하던 20세기의 터키가 아니다. G20 참석차 함부르크를 방문한 에르도안의 <차이트>(Die Zeit) 인터뷰가 몹시 흥미롭다. 미국과 러시아 사이 터키는 어느 쪽인가? 노골적인 질문에 우회적으로 답변했다. '워싱턴까지는 10시간이 걸린다. 모스크바는 2시간 반이 걸린다. 우리는 러시아와 흑해를 끼고 해양 국경을 맞대고 있다. 터키 여행객 가운데 첫손이 독일이고, 다음번이 러시아이다. 추체 상 2020년대에는 러시아 관광객이 첫 번째가 될 것이다.' 이미 양국 간에는 흑해를 가로지르는 송유관이 건설되고 있다. 터키의 핵발전소 또한 러시아가 짓고 있다. 2023년까지 송유관과 발전소 건설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항산과 항심은 공진화한다. 제2로마(이스탄불)와 제3로마(모스크바)가 합작하여 운명공동체가 되어간다.
올해 에르도안의 세르비아 방문 또한 몹시 인상적이었다. 터키가 표방하는 '신오스만주의' 행보와 포개진다. 오스만제국에서 떨어져나가면서 발칸 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로 전락했다. 분열에서 통합으로, 발칸의 소국들과 터키 사이에 FTA 체결이 논의되고 있다. 왕년의 연결망을 복구시키겠다는 뜻이다. 발칸의 남부 이슬람 소국들에서는 터키의 소프트파워에도 다시 솔깃하다. 오스만제국의 절정을 이끌었던 슐레이만 술탄 시대를 회고하는 <찬란한 세기>(Muhteşem Yüzyıl) 가 발칸의 무슬림 시청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에르도안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사이에 있는 무슬림 국경 도시 노비파자르(Novi Pazar)도 방문했다. 거리는 온통 에르도안 사진으로 가득했다. 터키어로 환영(Hosgeldiniz)을 새긴 플래카드도 나부꼈다. 이런 뉴스는 영미권 매체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나도 아랍문자 공론장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현지 언론들을 통하여 접하는 에르도안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다. 남유럽부터 동아프리카,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까지 움마 세계를 아우르는 '이슬람 지도자'로서 매력공세를 펼친다. 신상태와 신시대, 로마문자 공론장만 읽어서는 진실의 절반도 접근할 수가 없다. 키릴문자와 한문, 아랍문자 공론장을 보태어 '관점의 균형'을 취해야 한다. 그래야 '세력의 균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힘의 정치'와 '뜻의 정치'를 겸장해야 한다. 

▲푸틴-살만 정상회담.ⓒyandex.com

(구)중동이 (신)중서로 바뀌어가는 대반전의 마침표를 찍은 것은 역설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살만 국왕이 친히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례적이다. 획기적이다. 역사적이다. 나에게 선택권을 준다면 2017년 최대의 외교 이벤트였다고 꼽겠다. 예견한 사람이 있었다. 작년 말 도하에서 인터뷰했던 <알자지라> 전 편집국장이 2017년을 '러시아의 해'가 되리라고 전망했던 것이다. 실로 (구)중동의 미국 동맹국들이 줄줄이 러시아로 전향하고 있다. 이란부터 시리아와 이라크를 지나 터키와 파키스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영향력이 부쩍 확장되고 있다. 러시아군의 개입으로 시리아 내전의 전황이 바뀌면서 존재감을 한껏 높인 것이다. 사우디 국왕이 모스크바에서 푸틴 대통령을 알현한 것 또한 중동의 판세가 이란-터키-러시아-중국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인공국가들을 대신하여 오래된 제국의 후예들이 판 갈이를 주도하는 것이다. 더 이상 미국에만 의탁해서는 장래를 장담하기 힘들어진다. 실은 미국으로 말미암아 사우디 역시 곤경에 처해 있다. 러시아를 굴복시킨다며 저유가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동맹국 사우디의 재정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러시아는 '북방의 사우디'라는 별칭까지 가지고 있는 자원대국이다. 유라시아의 남과 북에서 공히 최대의 자원 수출국으로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특기할 사항은 에너지합작에서 나아가 군사합작에도 첫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이다. 사우디 역시도 S-400 구매를 결정했다. 소총부터 미사일까지 온통 미국산이었던 사우디의 국방이 다변화되고 있다. 나는 이번 방문이 일시적인 변화라고 보지 않는다. 왕정 국가이다. 차세대로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 원만한 정권 계승을 위해서도 러시아의 보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난해 살만 국왕은 무려 한 달에 걸쳐 중국을 필두로 한 아시아 순방에 나섰다. 올해는 사상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아시아와 러시아 순회, 장기적 국가 비전 "사우디 2030" 또한 유라시아의 대통합에 조응해 갈 것이다. 아라비아와 유라비아와 유라시아의 공진화, 2030년이면 '중동'(中東)이 아니라 '중서'(中西)가 보편적인 용어가 될지도 모르겠다. 

▲푸틴-살만 정상회담.ⓒyandex.com

3. 신근서(New Near West) 

이라크와 리비아, 시리아에 앞서 아프가니스탄이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앞세운 적폐들이 재차 미군을 투입할 것이라고 한다. 새 천년 미국의 '침공' 아래 16년째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는 땅이다. 아프간 경제는 초토화되었다. '민주주의'를 전도하는 미국의 '해방군'이 세워둔 정부는 부정부패로 찌들어간다. 수도 카불만 근근이 지켜내고 있을 뿐이다. 지방은 군벌 치하이다. 중앙정부는 작동하지 않고, 지방은 무장 세력이 장악했다. 그 사이에서 아프간 민중들을 보호하고 있는 유일한 집단이 바로 탈레반이다. 

러시아가 아프간에서도 실력을 발휘키로 했다. 시리아 모델을 아프간에도 적용시키고자 한다. 탈레반을 적대하지 않는다. 아프간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그들과 협상해야 한다. 탈레반과 다른 세력 간 협상을 이끌어서 연합정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현재의 불안정은 미국의 괴뢰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 홀로 아프간의 안정을 도모할 수는 없다. 푸틴의 빼어난 정치력에 든든한 경제력으로 지원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벌써 인프라를 깔고 있다. 도로를 만들고 다리를 놓고 철도를 깐다. 아프간의 북쪽이 러시아이고, 서쪽이 이란이며, 동쪽에 파키스탄이 자리한다.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이 아프간까지 연결된다. 러시아-이란-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으로 종단하는 남북 교통회랑도 만들고 있다. 자금은 응당 AIIB에서 출자 받는다. 러시아-중국-이란과의 합작 속에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은 유라시아의 지퍼(Zipper) 국가로 전변한다. 서유라시아와 동유라시아를 잇는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튼튼하게 엮고 남유라시아와 북유라시아를 단단하게 조이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두 이슬람 국가를 통하여 유라시아경제연합과 일대일로와 남아시아지역협력(SAARC) 또한 포개지게 될 것이다. 유라시아의 세기, 인도양의 세기에 조응하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이다. 20세기 대영제국이 남기고 떠난 적폐, 남아시아 대분할체제를 극복해가는 과업이기도 하다. 남아시아 또한 장차 극서와 중서보다 더 가까운 서쪽, 근서(近西)라고 불러도 좋겠다. 

딴 판이 열리고 새 판을 짜는 사업이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다. 히말라야에서 이행기의 충돌이 불거졌다. 중국군과 인도군이 장기간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시금 한글 공론장의 보도는 로마자 공론장에 치우쳤다. 한문 공론장은 말할 것도 없고 키릴문자와 아랍문자 공론장에서도 인도를 지지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부탄의 영토에서 일어난 일이다. 중국과 부탄 사이 갈등에 돌연 인도군이 등장했던 것이다. 왜 인도가 부탄을 대신하여 영토 분쟁에 참견하고 개입하는가, 인도는 부탄의 독립과 주권을 침해하지 말라며 중국은 일침을 가했다. 사실상 인도의 속국을 오래 지속했던 부탄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노출시킨 꼴이다. 중국이 의도한 바였던가, 지금으로서는 확언할 수 없다. 외교문서가 공개되는 30년 후에나 밝혀질 것이다. 나는 그런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보는 편이다. 냉전기 중국과 주변국 사이 영토분쟁을 추적해본 적이 있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자락에 깔려 있었다. 1962년 중/인 국경 분쟁은 제3세계를 둘러싼 양국 간 경쟁의 소산이었다. 1969년 중/소 국경 분쟁은 사회주의 노선을 둘러싼 양대국의 경쟁이었다. 1979년 중국-베트남 국경 분쟁 또한 베트남의 인도차이나 지배, 즉 캄보디아를 베트남이 점령한 것에 대한 개입이었다. 2017년의 히말라야 분쟁 또한 유라시아의 새판 짜기 주도권을 두고 미래의 G2간 위상을 미리 보여준 것에 더 가까웠다.
사태를 한층 입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남아시아의 현저한 비대칭적 국제관계를 참조해야 한다. 히말라야 넘어서는 인도가 압도적인 대국이다. 부탄과 네팔, 스리랑카, 몰디브를 훨씬 능가한다. 그 중에서도 부탄이 유독 취약했다. 인도군이 부탄군을 훈련시킨다. 전시작전권이 없다. 부탄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되 외교는 인도가 대신해주었다. 사실상의 보호국이었던 것이다. 명실상부 '독립'한 것은 2007년에 이르러서이다. 비로소 외교주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군사적 종속 상태를 2017년에 드러내게 된 것이다. 중국-부탄 사이 도로 건설에 인도군이 출동함으로써 그 실상이 공개된 것이다. 이로써 2018년 부탄 총선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친인도세력과 반인도세력이 경쟁하고 있다. 역시나 프레임이 중요하다. 친인도와 반인도간 정쟁이 격화될수록 부탄과 인도는 거리감이 생겨날 것이다. 부탄에서 적폐는 친인도 진영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노회한 노림수였다고 파악하는 까닭이다.
네팔과 스리랑카는 부탄의 미래다. 네팔의 좌파 정부는 중국과 적극 협력하며 인도와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세력의 균형'과 '관점의 균형'을 추구한다. 공항과 도로와 철도 건설은 물론 태양광 에너지 사업도 중국과 협력한다. 스리랑카에도 좌/우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중국과의 바닷길 만들기 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동인도양(벵골만)과 남중국해와 서인도양(아라비아해)를 잇는 허브 국가로 스리랑카는 탈바꿈하고 있다. 오래전 정화의 대원정선이 정박했고, 아랍의 신밧드가 황금보물을 발견했던 '실론'의 현대적 귀환이라고 하겠다. 중국-인도 간 대립이라는 '가짜 뉴스'가 홍수를 이루고 있을 때 뉴델리에 머무르고 있던 부탄 대사는 주인도 중국대사관을 방문했었다. 중국인민해방군 창설 90주년 행사를 참관했던 것이다. 중국과 부탄 사이 아직도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없다. 인도가 허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가 행사, 그것도 군부 행사에 처음으로 참여한 것이다. 재차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는 무관할 수가 없다. 항산의 토대가 바뀌면 항심의 방향도 바뀐다. 중국산 공산품이 부탄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부탄의 약초들이 티베트를 지나 동중국 시장까지 팔려나가고 있다. 부탄이 외교권을 획득한 2007년 중국 여행객은 17명에 불과했다. 올해는 이미 일만 명을 돌파했다. 히말라야의 행복국가 부탄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2할이 유커이다. 장차 그 비율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인구 백만이 되지 않는 이 작은 왕국의 살림살이를 지탱해주는 주요한 수입원이 된 것이다. 역시나 2017년 현재 인도와 영국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유학생들이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사이에 미얀마가 자리한다. 대영제국이 남기고 간 적폐의 모순이 뒤늦게 불거졌다. 로힝야족의 난민 행렬이 줄을 이었다. 불교문명에 바탕한 만달라국가와 이슬람문명에 바탕한 움마국가가 사라지고 근대적인 국민국가가 들어선 것이 병통의 근원이다. 불교도가 다수인 국가에 무슬림이 이주하여 살게 된 것 또한 인도와 방글라데시와 미얀마를 인위적으로 다스렸던 대영제국의 소산이다. 시점과 장소가 공교롭다. 출범 반세기를 맞이한 아세안은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을 노렸다. 하지만 로힝야족 사태로 아세안은 이슬람국가와 비이슬람국가로 나뉘고 말았다. 잔치 날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로힝야족이 많이 살고 있는 아라칸주가 일대일로의 거점이라는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중국의 투자가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중국 운남성의 쿤밍과 연결되는 송유관이 깔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라칸을 통하여 중원이 극서와 중서와 근서를 만나는 허브였던 것이다. 이곳이 불안정해지면 유라시아의 에너지 연결망과 교통 연결망에도 장애를 미치게 된다. 음모론까지 제기하지는 않겠다. 다만 흔들려고 하고 자와 세우고자 하는 자 사이에, 난세와 치세 사이에 힘과 뜻이 교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힘의 교착만 주목해서는 전체 판을 읽지 못한다. 힘의 대결과 뜻의 대결을 함께 숙고해야 진상이 드러난다. 미국에서 그토록 떠받들던 아웅산 수치에 융단폭격을 가하는 꼴이 마냥 석연치만은 않은 것이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겉으로는 인권을 명분으로 미얀마를 때리지만, 실제 목표로 두는 것은 중국의 인도양 진출, 일대일로의 차단일 공산이 높다. BCIM(방글라데시-중국-인도-미얀마) 경제회랑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히말라야는 시끄럽고 벵골만은 어지럽다.  

4. 신중원(新中原) 

올해는 홍콩의 중국 반환 20주년이기도 했다. 시진핑 주석이 처음으로 홍콩을 방문했다. 그러나 중국/홍콩의 일국양제에만 초점을 두는 것 또한 단견이다. 중국학만 해서는 더 이상 중국을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는 신시대가 되었다. 그의 동선이 더 중요했다. 시진핑이 그렸던 선을 추적해가야 한다. 홍콩만 간 것이 아니다. 홍콩을 찍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모스크바에서는 함부르크로 이동했다. 한문과 키릴문자와 로마문자의 공론장을 겹겹으로 추적해야 그 전체상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베이징은 더 이상 대륙/홍콩만으로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본을 빙글빙글 돌린다. 세계지도를 겹겹으로 펼친다. 그 위에서 전개된 수천 년의 역사를 포갠다. 역지사지하고, 지피지기해야 한다. 더 이상 국(가)학은 없다. 유라시아학, 세계학을 해야 한다. 그래야 30년 후, 일국양제에 마침표를 찍는 2047년의 홍콩 또한 전망해볼 수 있다. 

▲ 홍콩-마카오-주하이 대교.ⓒbaidu.com

곧 홍콩과 대륙 간에도 대교가 개통된다. 남중국과 홍콩을 가로지르는 55km 세계 최대의 교량이다. 지금까지는 4시간 30분이 걸렸다고 한다. 연말부터는 1시간에도 못미치는 이웃도시가 된다. 광동, 션젼, 주하이 등 광동성의 주요 도시와 홍콩과 마카오를 잇는 11개 도시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11개 도시 인구를 합하면 7000만에 이른다. 프랑스와 영국 규모의 독자적인 경제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국의 일부로 홍콩이 편입되고 있는 것만도 아니다. 중화세계와 앵글로색슨세계를 잇는 슈퍼-허브가 된다. 뉴 실크로드의 슈퍼 커넥터가 된다. 신세계화, 다른 세계화를 추동하는 지식과 정보, 금융과 행정의 중추가 된다. 상징적인 행사로 7월에 홍콩 도서전이 열렸다. 올해의 주제는 귀환 20주년이었다. 양안삼지의 주요 작가와 지식인들이 참가하여 다채로운 강연을 펼쳤다. 40여 개국, 700여 출판사가 집결했고, 백만 인파가 몰렸다. 글로벌 화교/화인의 소프트파워를 만천하게 과시한 것이다. 홍콩에 축적된 인문역량을 양껏 뽐낸 것이다. 홍콩은 더 이상 금융도시, 쇼핑의 천국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인문도시로 전변한다. 민간중화(民間中華, Civil China)의 허브로서 홍콩을 자리매김한다. 한문공론장과 로마자공론장이 홍콩에서 접속한다. 중국어가 영어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다. 영어와 중국어가 공진화한다. 일지양문(一地兩文)체제가 정립된다. 다문자세계, 다문명세계이다. 동과 서가 역전되는 것이 아니다. 동/서가 회통하고 융합한다.

홍콩이 중국어세계와 영어세계를 잇는다면 마카오는 포르투갈어세계를 연결한다. 마카오가 중국에 복귀한 것은 1999년이었다. 현재 마카오는 중국에서, 아니 아시아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도시가 되었다. 중국화와 세계화가 공진화하는 장소이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권역이 현재 2억 인구에 이른다. 브라질, 포르투갈, 기니 등 8개 국가와 중국의 경제 합작 포럼이 마카오에서 매년 열린다. 포르투갈은 인구 일천만의 국가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을 거치면 27개 EU 국가와 연결된다. 브라질도 일국으로 그치지 않는다. 5억의 라틴아메리카 시장과 이어진다. 마카오의 포르투갈 식민지 500년사를 '다른 백년'의 밑천으로서 재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유럽과 아메리카/아프리카 사이의 폭력적인 제국주의/식민주의 시절은 잊어도 좋겠다. 대륙간, 문명간 새로운 관계망을 구축해간다. 대륙과 마카오의 새로운 연결망만큼이나 마카오와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다른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다. '화해를 위해서', 탈식민주의-탈제국주의는 이렇게 실천하는 것이다.  
홍콩과 마카오에만 외주만 주는 것도 아니다. 바다 건너 자리한 도시가 샤먼이다. 올해 샤먼에서는 브릭스 정상회담이 열렸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만 회합한 것도 아니다. '브릭스+'도 닻을 올렸다. 아메리카에서는 멕시코가 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와 기니가, 동남아시아에서는 태국이, 중앙아시아에서는 타지키스탄이 초대되었다. 시리아의 재건을 약속한 장소가 아스타나였다면, 아프간의 재건을 다짐한 장소는 샤먼이었다. '샤먼 선언'을 통하여 외부자(미국과 NATO)가 아니라 아프간을 둘러싼 유라시아 국가들이 주도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되살리기로 했다. '브릭스+'가 아프간을 재건하면 SCO의 일원으로 가입할 것으로 보인다. 샤먼 선언에서 더 중요한 지점은 지하자원-위안화-금으로 맺어지는 삼두체제로 세계무역의 새판을 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달러가 사용되지 않는 별도의 국제결제시스템을 만들어간다. 달러 독점 체제를 다극화시키고 '민주화'시킨다. 이란의 천연가스를 위안화로 지불하고 홍콩이나 상하이에서 금으로 교환할 수 있게 된다. 중국은 이미 디지털 경제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 현금경제에서 벗어나는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공산혁명, 마오쩌둥의 얼굴이 새겨진 지폐를 갈수록 보기 힘들어진다. 유라시아의 동서남북에서 알리페이(Ali-Pay)가 마법의 주문처럼 널리 퍼지고 있다. 디지털 유라시아 또한 촘촘하게 형성된다.
그러함에도 지난 200년의 세계화와는 퍽이나 다르다. 자국의 발전모델을 윽박지르며 이식하지 않는다. 문명화, 근대화, 민주화시키지도 않는다. 나에게 좋다고 남에게 강권하지 않는다. 중국 내부의 개혁개방, 흑묘백묘론을 전 지구로 확대시키는 것이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념과 체제는 수단일 뿐이다. 목적은 평화와 조화이다. 무역을 통해서 서로의 살림살이를 겹치게 만드는 것이다. 상부상조 운명공동체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장사하고 돈 벌면서 먹고 살자는 것이다. '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은 20세기를 향수한다. America First, 미국산 제품이 세계를 석권했던 1955년으로 퇴행한다. 전쟁으로 서유럽과 동아시아가 초토화된 1945년 이후, 미국이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했다. 지금은 1/4도 안 된다. 근근이 20%를 유지하고 있다. 점점 더 비중이 떨어질 것이다. 중국이 실질구매력에서 미국을 앞선 것이 2014년이다. 올해는 115%에 해당한다. 2023년이면 1.5배로 격차가 벌어진다. 2030년이면 GDP도 역전된다. 2045년이면 중국이 미국의 3배가 된다. 벌써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이 1955년 미국의 대통령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자유 무역을 옹호하고 기후변화를 선도적으로 대처하며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하려 든다. 열린 마음으로 외부 세계를 껴안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국주의로 쪼그라들고 있고, 중국은 제국으로 개방되고 있다. 동반구와 서반구가 반전한다. 신대륙과 구대륙이 반전한다. 신세계와 구세계가 반전한다. 중국은 더 이상 20세기형 국민국가가 아니다. 21세기의 새 판, 유라시아의 중원이다. 동서남북으로 길을 뚫는다. 세계의 모든 길이 중원으로 통한다. 그 새 길을 따라서 오래된 합창곡, '구세계 교향곡'이 울려 퍼진다.  

5. 재조산하, 개조산하(再造山河, 改造天下) : Make Eurasia-Korea Great Again

극서와 중서와 근서와 중원을 널리 살피고 있는 극동의 젊은 지배자가 있다. 북조선의 김정은이다. 그를 우습게보아서는 곤란하다. 그가 유학했다는 스위스를 며칠 둘러보았다. 백투혈통 하나로 막중한 책무감을 상속받은 녀석이다. 어릴 적부터 극서 국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국제적인 도시에서 보고 배운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인 시야를 훈련받았다. 아랍의 운명 또한 주시해 왔을 것이다. '악의 축'으로 지목되었던 이라크 후세인의 말년을 잘 안다. 리비아 가다피의 운명도 알고 있다. 이란의 현재도 면밀하게 천착하고 있을 것이다. 시리아부터 아프가니스탄까지 형성되고 있는 새 판짜기 또한 직시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호흡이 길 수밖에 없다. 건강관리만 잘하면 10년, 20년, 반세기도 지배할 수 있는 친구이다. 널리 살피고 길게 볼 것이다. 남쪽의 5년짜리 대통령과는 확연히 시선이 다르다. 일단 저 북녘의 왕조체제에 대한 호불호는 괄호 속에 묶어두고 따지지 말기로 하자. 나의 잣대로 남을 재단하는 것도 지난 백년의 몹쓸 습관, 적폐이다. 하나의 민족이되, 두 나라 두 국민임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자. 통일(統一)의 강박을 떨쳐내고 불일불이(不一不二)를 연마해야 한다. 하나이자 둘이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북조선을 같은 피를 나누어가진 동족이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일한 '외국'(外國)으로서 있는 대로 감당해야 한다. 그 북조선의 유일권력으로서 김정은 또한 현실로써 감수해내어야 한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 관계가 자라날 까닭이 없다.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발상이야말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차라리 그를 쉰이 되고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되어 '계몽 군주'가 되도록 견인하는 편이 남한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불가능을 꿈꾸되,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진작부터 이런 관점에서 북핵 해결책을 제시한 나라 또한 러시아와 중국이었다. 지속적으로 '쌍중단'을 요구했다. 북조선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중시하고, 미국과 남한 또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금 역지사지해야 한다. 북조선만 도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한국도 도발을 그치지 않고 있다. 지구 최강의 군대와 끊임없이 연합훈련을 하고 있는 남한이 북조선의 시각에서 어찌 보일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미군이 새 천년 이래 지난 17년간 유라시아 곳곳에서 어떤 일을 벌여왔는지도 참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하다면 한미연합훈련이 방어용이라는 말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소리인가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양쪽 모두 중단해야 한다. 아무런 선행조건 없이 대화에 임해야 한다. 

이란 핵합의를 새로운 국제관계의 모델로 삼자는 로하니 대통령을 복기해보자. 시리아 내전을 해결한 아스타나 합의도 참고해보자. 아프가니스탄 재건에 나선 샤먼 선언도 참조가 된다. 북조선을 유라시아의 일원으로 연결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러시아 또한 중국 이상으로 북조선의 정권 교체에 하등의 관심이 없다. 목표는 북조선(및 한반도)의 안정화이다. 마치 시리아 정권을 안정시키고 유라시아 연결망 속에 시리아를 편입시킨 것처럼 태평양 건너 미국만 해바라기하는 북조선을 유라시아의 새 마당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북조선과 남한을 동북 3성과 연해주와 동시베리아와 북해도(홋카이도)와 소통시키는 것이다. 6자회담이 작동하던 시절에 견주면 중국은 너무나도 커져버렸다. 다시 중국이 주도하는 6자회담은 어느 쪽도 썩 내켜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를 잘 활용해야 한다. 모스크바까지 갈 것도 없다. 도쿄에서, 서울에서, 베이징에서, 평양에서 2시간 안팎이면 극동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합할 수 있다. 워싱턴도 베이징도 아닌, '블라디보스토크 합의' 같은 것을 궁리해봄직 하다.

▲ 동시베리아 고속도로.ⓒ이병한

혹은 '하노이 합의' 발상도 궁굴려 볼 만하다. 북조선/남한, 중국/대만만큼이나 남/북베트남 또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한 고리로서 작동했다. 냉전기 북조선과 형제국으로 돈독했던 국가이자, 탈냉전기 포스트-차이나의 일환으로 한국과도 친밀한 나라가 바로 베트남이다. 남한과 북조선 및 주변 4강국과 모두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가 바로 베트남이다. 냉전기 평양에서 일했던 외교관들의 아들과 딸이 직을 계승하여 탈냉전기 서울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인구 1억, 앞으로 아세안의 주도국이 될 나라이기도 하다. 동북아와 동남아를 잇는 절묘한 위치에 자리한 나라이기도 하다. 중화세계의 유산은 물론 서로마(프랑스)와 북로마(소련)의 흔적도 간취할 수 있는 도시가 하노이(河內, Hà Nội)이기도 하다. 곧 APEC 정상회담이 하노이에서 열릴 만큼 성장속도가 가장 빠른 국가이기도 하다. 마치 동방정교세계와 이슬람세계가 연결되는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에서 시리아 합의를 만들어낸 것처럼, 하노이를 발판으로 동북아 6개국과 주최국 베트남이 협력하는 '6+1' 구상을 시도해봄직하다.

앞으로 5년이다. 중국에서는 시진핑 정권이 5년 더 이어진다. 러시아에서는 푸틴 정권이 6년 더 지속될 것이다. 양국 모두 포스트-아메리카 시대, 리(셋)-유라시아 시대의 다문명세계, 다극화체제에 우호적이다. 천금 같은 5년이다. 천시에 촛불정권이 들어섰다. 향후 5년간 20세기와는 다른 21세기, '다른 백년'의 초석을 놓아야 한다. 유라시아경제연합과 일대일로와 남북합작이 상호진화해가야 한다. 그게 촛불정권의 '운명이다.' 그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라고 8할의 국민이 촛불을 밝혀주었던 것이다. 적폐 청산이 단지 지난 10년 특정 세력을 겨냥한 정치보복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안에서도 품지 못하는데, 밖을 어떻게 껴안는단 말인가. 저 멀리 동학 횃불의 좌초 이래 지난 뒤틀리고 꼬여버린 120년, 천하대란이야말로 적폐의 근원이다. 천하대란을 천하태평으로 반전시키는 천지개벽이야말로 촛불혁명의 완성일 것이다. 제발 혁명(시대교체)과 반정(反正, 정권교체)을 분별해야 한다. 

▲ 북러시아의 북극해.ⓒ이병한

하늘과 땅이 개벽하고 있다. 북방 천지에서 신대륙이 발견되고 있다. 신해양이 열린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 북해가 열리고 있다. 북유럽과 북러시아와 동시베리아, 북해도의 여러 항구 도시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북쪽의 바닷길, '아이스 실크로드'(Ice Silk road)가 개창한다. 북해의 바닷길마저 그 자태를 드러내면서 유라시아는 비로소 '사해동포'(四海同胞)에 부합하는 내륙이 되어간다. 태평양은 이제 동해이다. '대동해'(大東海)이다. 대서양은 이제 서해이다. '대서해'(大西海)이다. 인도양은 곧 남해이다. '대남해'(大南海)이다. 북극을 꼭지점으로 '대북해'(大北海)까지 등장한다. 동서남북 사해로 둘러싸인 유라시아는 만인이 동포이다. 민족애와 이웃애가 사해동포애와 공진화한다. 19세기형 구미(歐美)와 20세기형 아태(亞太)를 대신하는 21세기의 구아(歐亞), 유라시아-코리아 구상을 본격화해야 한다. 서쪽에 시리아상인이 있었다면, 동쪽에서는 개성상인이 있었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이자, 20세기 북조선과 남한의 적폐를 해소할 수 있는 개성공단이 자리했던 곳이다. 영어로 나는 고려인(Korean)이었다. 아랍어로도 고려인이었다. 러시아어로도 고려인이다. 2015년 한국인으로 출발한 견문이 2017년 고려인의 자각을 안고 마무리되어간다. 개성과 고려와 유라시아의 공진화를 꾀하게 된다. 개성으로부터 '재조산하'(고려)와 '개조천하'(유라시아)를 재개해야 할 것이다. "Make Eurasia-Korea Great Again", 부디 촛불혁명을 통하여 등장한 신시대의 새 정권이 재조산하(再造山河)와 개조산하(改造天下)를 국시로 삼는 '나라다운 나라',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7년을 미리 회고하는 21세기 고려인의 소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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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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