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고래'하면 동해나 울산, 장생포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홍어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있습니다. 흑산도와 고래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요? 왜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생긴 것일까요? 대체 흑산도에선 고래와 관련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연재는 흑산도와 고래의 연관성을 좇는 '해양문화 탐사기'입니다. - 기자 말
▲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 포경회사가 포획한 귀신고래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조선인들. | |
ⓒ 고래박물관 자료사진 |
일제, 한반도 근해에서 대형 고래 약 8천 마리 이상 학살
새로운 세기, 20세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조선(대한제국)과 한반도 근해의 고래들에겐 참혹한 세기의 시작일 뿐이었다.
1904년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충돌을 일삼던 일본과 러시아는 끝내 전쟁을 시작하고 만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9월 체결한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조선(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인한다. 이때부터 한반도 근해에서의 고래를 포획하는 '포경 독점권'은 실질적으로 일제가 행사하게 된다.
그리고 1910년, 일제가 강제로 병합한 것은 대한제국만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1911년 6월 3일 어업령(제령 제6호)과 어업령시행규칙 및 어업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67, 68호)을 공포한다. 이때부터 한반도 근해에서의 포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할 수 있는 '허가어업'이 되었다. 물론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을 수 있는 포경회사는 일본 포경회사들뿐이었다.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은 일본 포경회사들의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잡이는 포획(捕獲)을 넘어선 '학살(虐殺)'이었다. 1903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 포경회사에 의해 학살당한 대형 고래는 기록된 것으로만 약 8259마리에 이른다. 무려 1만여 마리의 대형 고래가 일제에 한반도 근해에서 무참하게 학살당한 것이다.
1908년 대한제국 농상공부 수산국이 편찬한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러일 전쟁 전후인 1903년부터 1907년까지 5년 동안 한반도 근해에서 포획당한 고래는 약 1612마리에 이른다. 모두 일본 포경회사에 의해서였다. 1900년대 초 한반도 근해에서 포경업을 했던 일본 3대 포경회사는 동양어업주식회사, 나가사키포경합자회사, 일한포경합자회사였다.
세 회사 가운데 가장 많은 포획고를 올린 회사는 동양어업주식회사로 이들은 5년 동안 1200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 1904년부터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를 포획한 나가사키포경합자회사는 4년 동안 377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 1906년에 세 회사 중 가장 늦게 한반도 근해 포경에 뛰어든 일한포경합자회사도 2년 동안 35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
일본포경협회가 1911년부터 1944년까지 자체 집계해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한반도 근해에서 포획된 고래는 무려 약 6647마리에 이른다. 특히 대형 고래에 대한 포획이 심각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 포경회사는 참고래(긴수염고래) 5166마리, 귀신고래 1313마리,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 29마리, 보리고래 5마리, 향유고래 3마리, 북방긴수염고래 1마리를 포획했다. 돌고래 역시 이 기간 동안 130마리가 일본 포경선에 의해 포획되었다. 이 돌고래는 혹등고래를 가리킨다. 당시엔 혹등고래를 돌고래로 불렀다.
물론 이 수치는 기록으로 확인된 것이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는 1908년부터 1910년 이 기간에도 일본 포경회사들은 쉬지 않고 고래를 포획했을 것이다. 또한 일본 포경회사들이 까지 남기지 않은 불법 포획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일제의 고래 학살은 더욱 극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 포획을 주도적으로 한 일본 포경회사는 동양포경주식회사였다. 러일전쟁 직후 한반도 근해에서 가장 많은 고래 포획고를 올렸던 동양어업주식회사가 1909년 5월 일제의 이른바 '전국 포경회사 합동운동'으로 동양포경주식회사로 거듭난 것이다.
오사카에 본점을 둔 동양포경주식회사는 1910년 1월 거제도에 포경지 허가를 받아 한반도 근해 포경을 시작한다. 그리고 1913년에는 울산, 거제도, 통천 근해, 1914년에는 울산, 거제, 강원도 통천군, 함경도 북청군으로, 1916년에는 전라도 대흑산도 근해로까지 포경 조업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후 동양포경주식회사는 1934년 7월 1일 일본수산주식회사에 합병되어 해산되고, 일체의 자산과 사업은 일본수산주식회사의 자회사인 일본포경주식회사에 승계되었다. 일본수산주식회사는 다시 자회사인 1936년 9월 일본포경주식회사 등과 합병하고 1937년 3월에는 일본식료공업주식회사를 합병하여 4월 1일 회사 이름을 일본수산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1910년, 일제가 강제로 병합한 것은 대한제국만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1911년 6월 3일 어업령(제령 제6호)과 어업령시행규칙 및 어업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67, 68호)을 공포한다. 이때부터 한반도 근해에서의 포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할 수 있는 '허가어업'이 되었다. 물론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을 수 있는 포경회사는 일본 포경회사들뿐이었다.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은 일본 포경회사들의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잡이는 포획(捕獲)을 넘어선 '학살(虐殺)'이었다. 1903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 포경회사에 의해 학살당한 대형 고래는 기록된 것으로만 약 8259마리에 이른다. 무려 1만여 마리의 대형 고래가 일제에 한반도 근해에서 무참하게 학살당한 것이다.
1908년 대한제국 농상공부 수산국이 편찬한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러일 전쟁 전후인 1903년부터 1907년까지 5년 동안 한반도 근해에서 포획당한 고래는 약 1612마리에 이른다. 모두 일본 포경회사에 의해서였다. 1900년대 초 한반도 근해에서 포경업을 했던 일본 3대 포경회사는 동양어업주식회사, 나가사키포경합자회사, 일한포경합자회사였다.
세 회사 가운데 가장 많은 포획고를 올린 회사는 동양어업주식회사로 이들은 5년 동안 1200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 1904년부터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를 포획한 나가사키포경합자회사는 4년 동안 377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 1906년에 세 회사 중 가장 늦게 한반도 근해 포경에 뛰어든 일한포경합자회사도 2년 동안 35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
일본포경협회가 1911년부터 1944년까지 자체 집계해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한반도 근해에서 포획된 고래는 무려 약 6647마리에 이른다. 특히 대형 고래에 대한 포획이 심각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 포경회사는 참고래(긴수염고래) 5166마리, 귀신고래 1313마리,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 29마리, 보리고래 5마리, 향유고래 3마리, 북방긴수염고래 1마리를 포획했다. 돌고래 역시 이 기간 동안 130마리가 일본 포경선에 의해 포획되었다. 이 돌고래는 혹등고래를 가리킨다. 당시엔 혹등고래를 돌고래로 불렀다.
물론 이 수치는 기록으로 확인된 것이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는 1908년부터 1910년 이 기간에도 일본 포경회사들은 쉬지 않고 고래를 포획했을 것이다. 또한 일본 포경회사들이 까지 남기지 않은 불법 포획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일제의 고래 학살은 더욱 극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 포획을 주도적으로 한 일본 포경회사는 동양포경주식회사였다. 러일전쟁 직후 한반도 근해에서 가장 많은 고래 포획고를 올렸던 동양어업주식회사가 1909년 5월 일제의 이른바 '전국 포경회사 합동운동'으로 동양포경주식회사로 거듭난 것이다.
오사카에 본점을 둔 동양포경주식회사는 1910년 1월 거제도에 포경지 허가를 받아 한반도 근해 포경을 시작한다. 그리고 1913년에는 울산, 거제도, 통천 근해, 1914년에는 울산, 거제, 강원도 통천군, 함경도 북청군으로, 1916년에는 전라도 대흑산도 근해로까지 포경 조업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후 동양포경주식회사는 1934년 7월 1일 일본수산주식회사에 합병되어 해산되고, 일체의 자산과 사업은 일본수산주식회사의 자회사인 일본포경주식회사에 승계되었다. 일본수산주식회사는 다시 자회사인 1936년 9월 일본포경주식회사 등과 합병하고 1937년 3월에는 일본식료공업주식회사를 합병하여 4월 1일 회사 이름을 일본수산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 장생포는 일본 포경회사들의 대표적인 포경근거지였다. 일제 강점기 일본 포경선들 모습. | |
ⓒ 고래박물관 자료사진 |
일제, 동해에서 포경 쇠퇴하자 서해와 남해로 사업장 확대
한편 1939년 현재 일본수산주식회사의 포경 근거지는 모두 33곳이었고, 이 가운데 한반도에 설치된 포경근거지는 울산 장생포, 제주도 서귀포, 전남 대흑산도, 황해도 대청도 등 네 곳에 있었다.
한반도 근해 포경사에서 마침내 흑산도(대흑산도)가 등장한다. 일본 포경회사인 동양포경주식회사가 포경 조업 영역을 1916년에 전라도 대흑산도까지 넓혔다는 기록과 동양포경주식회사를 승계한 일본수산주식회사가 1939년 현재 대흑산도에 포경근거지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근해에서의 포경은 동해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설치됐다는 것은 일제의 포경 영역이 그 무게 중심을 동해에서 대흑산도 근해 등으로 포경 중심지를 이동했거나 포경의 영역을 확대했다는 것을 뜻한다.
한반도 포경기지 변천사를 연구해온 김백영 박사는 일제가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전반기까지 동해에서의 포경이 쇠퇴하는 추세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일제는 1900년 초부터 한반도 근해에서 포경을 독점했고, 그 주 사업장은 동해였다. 하지만 10년 넘게 지속된 동해에서의 고래 남획은 동해 포경의 쇠퇴로 이어졌고, 그 활로는 포경 영역을 남해와 서해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즉 동해에서의 포경 실적 쇠퇴는 1914년부터 일제로 하여금 포경사업장을 서해와 남해로 확장하게 만들었다. 특히 1916년부터는 포경 대상지를 대흑산도 근해로까지 확장하게 만들었고, 고래 해체 작업 등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체계적인 기반 시설인 '포경근거지'를 대흑산도에 설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구병 교수가 정리한 '1917년부터 1934년까지 각 도별 포경선 수와 포획 두수'는 이를 명확하게 입증한다. 동해에서만 활동하던 포경선들이 서해 (황해도 52척, 전라남도 95척)와 남해(경상남도 150척)로 이 시기에 급격하게 진출한다. 동해(경상북도 36척, 강원도 54척, 함경북도 50척)에서 활동하는 포경선의 수를 크게 앞지른 것이다.
고래 포획고 역시 이 시기에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일본 포경회사가 1917∼1934년까지 경상북도, 황해도, 함경북도 등 동해에서 올린 전체 포획 두수는 151두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황해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등 서해와 남해에서 포획 두수는 무려 2854두였다. 동해의 포획고보다 약 18배나 많은 포획고다.
▲ 한반도 근해에서 가장 많이 대형 고래를 포획한 일본 포경회사는 동양포경주식회사였다. 동양포경주식회사는 대형 고래 해체 장면을 담은 기념 우편엽서를 만들 정도였다. | |
ⓒ 일본포경협회 자료사진 |
흑산바다는 따뜻하고 먹잇감 풍부한 고래들의 고향이었다
대상지를 더 좁혀보면 이 기간 동안 경상북도 근해에서 활동한 포경선은 모두 36척으로, 47두의 고래를 잡았다.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전라남도 근해에서는 95척의 포경선이, 고래 1095마리를 포획했다. 전라남도 근해에는 이 시기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본 포경선에 의해 흑산도 근해에서 포획당한 고래의 수는 흑산바다에 동해 못지않게 많은 고래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슬프게 증빙한다.
조선수산회가 집계한 '1930년 동양포경주식회사의 한국 근해 포경 실적' 역시 이를 증빙한다. 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30년 한 해 동안 울산 사업장에선 긴수염고래 55두와 귀신고래 10두 등 모두 65두를 포획했다. 하지만 남해와 서해에 걸쳐진 제주도 사업장(31두)과 대흑산도 사업장(46두), 대청도 사업장(85두)에선 대왕고래, 긴수염고래(참고래), 혹등고래 등 모두 162두를 포획했다. 동해보다 서해와 남해에서 약 2.5배 이상 더 포획한 것이다. 이 시기 한반도 동해에서의 포경이 쇠퇴하고 서해와 남해에서의 고래 포획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포경회사들이 포경근거지를 동해에서 흑산도로까지 확장할 만큼 대형고래가 많이 살고 있었던 흑산바다. 흑산바다에 큰 고래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까닭은 흑산바다가 고래들이 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흑산도 근해는 수심 100m 안팎으로, 겨울철에도 평균수온이 섭씨 7도∼8도로 유지한다. 이 온도는 귀신고래의 회유 동선에 있는 사할린해나 오오츠크해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따뜻한 온도다. 봄이 되면 수온은 더 올라가니 고래들에겐 새끼를 낳거나 어린 새끼를 키우기엔 더없이 아늑한 바다였던 셈이다.
또한 흑산바다에는 고래의 먹이가 풍부했다. 흑산도는 조기들의 산란장과 월동장으로 이동하는 길목 한가운데 있다. 조기는 서해에서 산란해 가을에 월동장인 제주도 남방 동중국해로 회귀하는 회유성 어종이다. 조기가 이동하는 곳엔 멸치와 새우, 청어, 꽁치 등이 풍부하다. 이들은 고래가 매우 좋아하는 먹잇감들이다.
일제가 포경근거지를 동해에서 서해와 남해로 확장했던 곳이 흑산도와 제주도 서귀포, 황해도 대청도였다. 이곳들은 모두 조기 회유 동선과 일치한다. 이런 까닭에 더글라스 칼튼 아브람스(Douglas Carlton Abrams)는 <고래의 눈 Eye of the Whale>에서 "북서태평양 귀신고래 등은 동중국해 하이난의 얕은 바다에서 새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한국 포경사를 탐구해온 일부 연구자들은 더글라스의 주장을 이어받아 "흑산바다 역시 하이난 바다와 마찬가지로 조기 회유 길목에 있는 등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귀신고래가 새끼를 낳았던 곳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랜 기간 동안 생태 추적 조사가 꼼꼼하게 진행되지 못한 상태에서 "흑산바다가 귀신고래의 고향"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록된 사실만으로도 흑산바다는, 참고래·대왕고래·혹등고래·귀신고래 등 대형 고래들이 평화롭게 살았던 '생명의 고향, 유랑의 거처'였음은 분명하다.
▲ 흑산도 근해는 큰 고래들이 좋아하는 먹잇감이 풍성했다. 이를 확인해주는 조기 회유도. | |
ⓒ 나증만, 조경만, 김준 등 공저 <서해와 조기> 67p |
# 다음 기사 '조선총독부가 직접 흑산도에 직원 파견한 까닭'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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