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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만 명이 참여한 소등 퍼모먼스 지난 2016년 12월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공범처벌과 적폐 청산의 날-8차 촛불집회'에서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1분 암흑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본집회가 시작된 이후 6시 40분께 촛불집회에 참석한 65만 명이 일제히 동참하며 "박근혜는 퇴진하라. 박근혜를 구속하라. 황교안은 물러나라. 김기춘을 구속하라"고 외쳤다. 이들은 "대한민국은 아직도 겨울 공화국이다"라며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혼돈의 시간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기 위한 촛불이 되겠다"는 마음을 모아 소등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들은 "곧 새벽이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어둠은 아직 물러가지 않았고 잘못이 없다. 모른다. 버티겠다고 한다"며 "스스로 물러갈 어둠이 아니기에 촛불을 끌 수 없고 더 크게 타 올라야 한다"고 말했다. | |
ⓒ 유성호 |
안녕하세요, 저는 대한민국의 촛불시민 이창희라고 합니다. 우선, 촛불혁명의 성공을 축하하며 대한민국의 1700만 촛불시민을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뉴스를 듣지 못했다면, 해결되지 않은 일상의 고단함에 치여서 우리가 같이 만들어낸 '승리'를 까맣게 잊어버릴 뻔했습니다. 이 상을 계기로 그날들의 승리에 나도 촛불 한 개를 더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며, 질척한 현실에 방치되었던 저의 자존감을 다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2016년 겨울, 촛불이 타오르던 광장에 있었습니다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지난해 10월, '최순실'이라는 낯선 이름을 뉴스에서 듣게 된 후로 저는 놀라운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동안 이해가 되지 않던 정부의 모든 행위들이 납득이 되기 시작했거든요. 그들이 왜 저렇게 국민을 무시하려 했는지, 국민의 기대와는 전혀 관계없이 정책을 결정하는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에게 '대한민국'은 왜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는지, 정말 혼란스러웠던 그 모든 상황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던 거예요.
'설마' 했던 것들이 사실로 드러나고, 우리끼리 반목하며 서로 싸우게 만들었던 이유도 '국정 농단 세력'의 이익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너무나 허탈했어요. 정권 내내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신당하면서 '정말 이민을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촛불이 타오르고 광장에 자리를 펴고 앉을 수 있었던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져요. 지난해 11월 12일이었을 거예요. 제가 참석했던 첫 번째 촛불집회였는데, 시민 문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광화문에 자리를 펴고 앉은 순간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광장에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도, 국가와 권력에 대해 이렇게 환한 광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런 기분 아세요? 너무 좋아서 자꾸 웃음이 나고, 입으로는 함성에 동참하여 깔깔거리고 있는데, 자꾸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상황 말입니다. 그날, 제가 그랬어요. 기괴한 장면이죠. 한낮의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권력에 반대한다'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거든요.
얘기가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는데, 죄송해요. 2015년 11월 14일에도 저는 광화문에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광화문 광장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8차선 대로에서, 누구 하나 빠져나갈 수 없도록 빽빽하게 쳐 놓은 차벽 안에 갇혀 있었죠. 대한민국의 모든 경찰에게 총동원령이라도 내려진 것처럼 광화문 광장엔 경찰들로 가득했고, 1차 민중총궐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사거리의 통제구역 안으로 몰아넣어졌어요.
그날 시위대와 합류하려던 시민들은, 빽빽한 차벽 사이로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좁은 통로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가 있었답니다. 게다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은 국민에게 열어준 '개구멍'을 통과하는 우리를 여기저기에서 채증하며, 계속 겁을 주는 겁니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조심해' 하는 듯한 압박이 계속 느껴졌어요.
여지껏 '겁먹은 시민'으로만 살았는데... 그날 광장이 열렸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시위는 제대로 행진 한 번, 구호 한 번 외쳐보지 못했어요. 그날의 언론 보도로는 '반정부 전문 시위꾼들에 의한 폭력집회'라고 했지만, 그곳에는 저처럼 '나라에 기대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크게 얘기하고 싶었던 우리 '일반 시민'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우리가 경찰이 쳐 놓은 통제선 안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던 동안, 살수차가 물을 뿌리기 시작했고 백남기 농민께서 쓰러지신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에도 무력했고, 분노는 했지만 힘을 낼 수가 없었어요. 내 편이 누구인지 몰랐고, 어디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났거든요. 백남기 어르신에 대한 폭력을 보고 나니, 저는 더 겁이 났어요. 나도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 국가는 저를 그렇게 '공포심'으로 길들였던 거죠.
다시 2016년이네요. 그렇게 '겁먹은 비겁한 시민'으로 너무 오래 살다 보니, 그저 '도망쳐야겠다'하는 생각밖에는 못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광장이 열린 거예요. 기적 같았어요.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것, 미소만으로도 '우리가 기대하는 희망'을 전달할 수 있다는 연대감, 정말 기적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어요. 흘러내리는 눈물도 벅찬 가슴도, 제가 첫 번째 집회를 위해 나간 광장에서 느꼈던 그 모든 감동을 대변하는 것이었겠죠. 이 감동은, 아마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던 광장의 축제를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테고요.
그러다가, '그 사진'을 찍게 된 거예요(관련 기사: '시위대 농민' 기념사진, 무릎 굽혀 찍어준 경찰관). 아직 광장의 열기가 계속 이어지던 오후 9시 30분쯤, 저는 슬슬 광장을 벗어나서 서울역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포항 가는 마지막 기차가 오후 10시 20분에 있었거든요). 모르는 길도 아니었고, 지하철을 타기엔 광장에 모인 100만 명의 시민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다만,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은 시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사람들의 바다를 거슬러서 헤엄치는 게 힘들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간신히 걷다 보니, 눈앞에 남대문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거기에 계셨어요. 벼 이삭이 그려진 붉은색의 전국 농업인 연합회 깃발과 그분들의 흥겨움을 기꺼이 사진으로 남겨주신 경찰관 말이에요. 갑자기 제 머릿속에는 정확히 1년 전, 그러니까 2015년 11월 14일의 광장에서 대치했던 그분들이 떠올랐어요. 아, 그때는 서로에게 그렇게나 심하게 상처를 주던 분들인데, 오늘은 이렇게나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계시다니! 다시 눈물이 흘렀고, 저도 그분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왔어요.
'(제게 좋은 순간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덧 '탄핵' 촛불집회 1주년, 광장에서 다시 만나요
첫 번째 집회에서의 감동으로 그 후로도 여러 번 '상경투쟁'을 이어갔어요(고백하자면, 그냥 재밌어서, 광장에 모인 우리에 행복해져서 올라갔던 것이지만 말입니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광화문에서 만나는 것으로 약속을 잡았네요. 울진의 제 동생은 애들 셋을 데리고 거의 매번 참석해줘서, 제가 그 방에서 신세도 많이 졌네요. 막내 조카가 그 당시 네 살이었는데, 우리의 광장이 어떤 모습으로 기억에 남았을지 궁금하기도 해요. 그 아이들이 살게 될 대한민국은, 더 이상 국민을 버리지 않는 나라이길 원했던 촛불이니까요. '촛불의 목표'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에요.
이렇게 또 1년이 지나서, 2017년 11월이 다가오고 있네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깜짝 놀랐어요. 저, 정말 세상이 바뀐 것을, 그것도 '우리 힘으로' 바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거든요. 억울하지만 '촛불 시민' 이창희가 '생활인' 이창희로 바뀌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지 않아요.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출근하는 아침이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윗사람의 지시에 한없이 주눅 들어서는 '나 아니어도 될' 자리에서 '자존감은 집에 두고 나올걸' 후회하며 살고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인권상' 수상이라니요! 갑자기 놀라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제 '조급함'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기다리는 시간이 갑갑해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겠지요. 짙은 구름을 걷어내고 환하게 얼굴을 드러낸 햇살이, 울창한 나무를 뚫고 바닥의 들풀들에게 닿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럼에도 자꾸만 조바심이 고개를 들고는 '저것 봐, 햇살은 저 큰 나무들이 다 가져가고 있잖아' 말할 때는 너무 두려워요. 분명히 세상은 바뀌었고 2015년의 11월의 물 대포도 2016년 11월의 빽빽한 차벽도 모두 사라진 평화로운 광장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이 환하게 웃고 계신 데 말이에요.
다시 짐을 챙겼습니다. 1년 전과 똑같은 꽃무늬 가방에 광장 바닥의 한기를 막아줬던 천 원짜리 깔개를 조심스레 접어 넣었어요. 크지 않은 배낭이지만,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가 불러올 감기가 두려워 얇은 목도리와 작은 담요도 꾸역꾸역 챙겼습니다. 자꾸만 조바심으로 불안은 커지고, 먹구름이 걷혔다고 '한편이었던' 우리끼리 또 싸우게 될까 봐서 아직은 두렵지만, 완성되지 않은 촛불의 염원을 다시 기억해 내야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구겨졌던 자존감도 햇살에 말려서 다시 마음에 챙겨 넣어야 할 테고, 우리 모두가 같이 바라는 희망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런 건 어때요?
'다스는 누구 겁니까?'
'우리끼리 싸우면 누가 좋아할까요?'
다시 한번, 뜻깊은 상을 통해 사라지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멋진 승리를 우리 모두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냈다는 것을, 글을 읽으시는 '우리 촛불시민들'도 잊어버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혁명은 끝나지 않았으니, 우리 광장에서 다시 만나요!
'설마' 했던 것들이 사실로 드러나고, 우리끼리 반목하며 서로 싸우게 만들었던 이유도 '국정 농단 세력'의 이익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너무나 허탈했어요. 정권 내내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신당하면서 '정말 이민을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촛불이 타오르고 광장에 자리를 펴고 앉을 수 있었던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져요. 지난해 11월 12일이었을 거예요. 제가 참석했던 첫 번째 촛불집회였는데, 시민 문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광화문에 자리를 펴고 앉은 순간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광장에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도, 국가와 권력에 대해 이렇게 환한 광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런 기분 아세요? 너무 좋아서 자꾸 웃음이 나고, 입으로는 함성에 동참하여 깔깔거리고 있는데, 자꾸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상황 말입니다. 그날, 제가 그랬어요. 기괴한 장면이죠. 한낮의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권력에 반대한다'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거든요.
얘기가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는데, 죄송해요. 2015년 11월 14일에도 저는 광화문에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광화문 광장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8차선 대로에서, 누구 하나 빠져나갈 수 없도록 빽빽하게 쳐 놓은 차벽 안에 갇혀 있었죠. 대한민국의 모든 경찰에게 총동원령이라도 내려진 것처럼 광화문 광장엔 경찰들로 가득했고, 1차 민중총궐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사거리의 통제구역 안으로 몰아넣어졌어요.
그날 시위대와 합류하려던 시민들은, 빽빽한 차벽 사이로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좁은 통로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가 있었답니다. 게다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은 국민에게 열어준 '개구멍'을 통과하는 우리를 여기저기에서 채증하며, 계속 겁을 주는 겁니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조심해' 하는 듯한 압박이 계속 느껴졌어요.
여지껏 '겁먹은 시민'으로만 살았는데... 그날 광장이 열렸습니다
▲ 2015년 11월 14일의 광화문 광장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던 경찰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 '이 나라 도둑들은 오늘이 장날인가?' | |
ⓒ 이창희 |
그렇게 시작된 시위는 제대로 행진 한 번, 구호 한 번 외쳐보지 못했어요. 그날의 언론 보도로는 '반정부 전문 시위꾼들에 의한 폭력집회'라고 했지만, 그곳에는 저처럼 '나라에 기대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크게 얘기하고 싶었던 우리 '일반 시민'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우리가 경찰이 쳐 놓은 통제선 안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던 동안, 살수차가 물을 뿌리기 시작했고 백남기 농민께서 쓰러지신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에도 무력했고, 분노는 했지만 힘을 낼 수가 없었어요. 내 편이 누구인지 몰랐고, 어디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났거든요. 백남기 어르신에 대한 폭력을 보고 나니, 저는 더 겁이 났어요. 나도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 국가는 저를 그렇게 '공포심'으로 길들였던 거죠.
다시 2016년이네요. 그렇게 '겁먹은 비겁한 시민'으로 너무 오래 살다 보니, 그저 '도망쳐야겠다'하는 생각밖에는 못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광장이 열린 거예요. 기적 같았어요.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것, 미소만으로도 '우리가 기대하는 희망'을 전달할 수 있다는 연대감, 정말 기적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어요. 흘러내리는 눈물도 벅찬 가슴도, 제가 첫 번째 집회를 위해 나간 광장에서 느꼈던 그 모든 감동을 대변하는 것이었겠죠. 이 감동은, 아마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던 광장의 축제를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테고요.
그러다가, '그 사진'을 찍게 된 거예요(관련 기사: '시위대 농민' 기념사진, 무릎 굽혀 찍어준 경찰관). 아직 광장의 열기가 계속 이어지던 오후 9시 30분쯤, 저는 슬슬 광장을 벗어나서 서울역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포항 가는 마지막 기차가 오후 10시 20분에 있었거든요). 모르는 길도 아니었고, 지하철을 타기엔 광장에 모인 100만 명의 시민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다만,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은 시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사람들의 바다를 거슬러서 헤엄치는 게 힘들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간신히 걷다 보니, 눈앞에 남대문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거기에 계셨어요. 벼 이삭이 그려진 붉은색의 전국 농업인 연합회 깃발과 그분들의 흥겨움을 기꺼이 사진으로 남겨주신 경찰관 말이에요. 갑자기 제 머릿속에는 정확히 1년 전, 그러니까 2015년 11월 14일의 광장에서 대치했던 그분들이 떠올랐어요. 아, 그때는 서로에게 그렇게나 심하게 상처를 주던 분들인데, 오늘은 이렇게나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계시다니! 다시 눈물이 흘렀고, 저도 그분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왔어요.
'(제게 좋은 순간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덧 '탄핵' 촛불집회 1주년, 광장에서 다시 만나요
▲ 2016년 11월 12일의 촛불집회를 마치고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던 순간이예요. 저도 이분들이 서로를 위해 무릎을 굽히고,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행복했답니다. 감사합니다! | |
ⓒ 이창희 |
첫 번째 집회에서의 감동으로 그 후로도 여러 번 '상경투쟁'을 이어갔어요(고백하자면, 그냥 재밌어서, 광장에 모인 우리에 행복해져서 올라갔던 것이지만 말입니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광화문에서 만나는 것으로 약속을 잡았네요. 울진의 제 동생은 애들 셋을 데리고 거의 매번 참석해줘서, 제가 그 방에서 신세도 많이 졌네요. 막내 조카가 그 당시 네 살이었는데, 우리의 광장이 어떤 모습으로 기억에 남았을지 궁금하기도 해요. 그 아이들이 살게 될 대한민국은, 더 이상 국민을 버리지 않는 나라이길 원했던 촛불이니까요. '촛불의 목표'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에요.
이렇게 또 1년이 지나서, 2017년 11월이 다가오고 있네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깜짝 놀랐어요. 저, 정말 세상이 바뀐 것을, 그것도 '우리 힘으로' 바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거든요. 억울하지만 '촛불 시민' 이창희가 '생활인' 이창희로 바뀌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지 않아요.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출근하는 아침이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윗사람의 지시에 한없이 주눅 들어서는 '나 아니어도 될' 자리에서 '자존감은 집에 두고 나올걸' 후회하며 살고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인권상' 수상이라니요! 갑자기 놀라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제 '조급함'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기다리는 시간이 갑갑해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겠지요. 짙은 구름을 걷어내고 환하게 얼굴을 드러낸 햇살이, 울창한 나무를 뚫고 바닥의 들풀들에게 닿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럼에도 자꾸만 조바심이 고개를 들고는 '저것 봐, 햇살은 저 큰 나무들이 다 가져가고 있잖아' 말할 때는 너무 두려워요. 분명히 세상은 바뀌었고 2015년의 11월의 물 대포도 2016년 11월의 빽빽한 차벽도 모두 사라진 평화로운 광장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이 환하게 웃고 계신 데 말이에요.
다시 짐을 챙겼습니다. 1년 전과 똑같은 꽃무늬 가방에 광장 바닥의 한기를 막아줬던 천 원짜리 깔개를 조심스레 접어 넣었어요. 크지 않은 배낭이지만,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가 불러올 감기가 두려워 얇은 목도리와 작은 담요도 꾸역꾸역 챙겼습니다. 자꾸만 조바심으로 불안은 커지고, 먹구름이 걷혔다고 '한편이었던' 우리끼리 또 싸우게 될까 봐서 아직은 두렵지만, 완성되지 않은 촛불의 염원을 다시 기억해 내야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구겨졌던 자존감도 햇살에 말려서 다시 마음에 챙겨 넣어야 할 테고, 우리 모두가 같이 바라는 희망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런 건 어때요?
'다스는 누구 겁니까?'
'우리끼리 싸우면 누가 좋아할까요?'
다시 한번, 뜻깊은 상을 통해 사라지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멋진 승리를 우리 모두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냈다는 것을, 글을 읽으시는 '우리 촛불시민들'도 잊어버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혁명은 끝나지 않았으니, 우리 광장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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