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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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0월 24일, 국정원 발전위는 미얀마 인근 안다만 해역에서 실시한 KAL858기 동체 수색 결과 성과가 없었다고 발표했다. 진실위원회 자료 검토 중 “프랑스 석유회사 TOTAL사에서 해저 송유관 건설 위해 안다만 해역 바닥 전부 스캔”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사진은 2006년 4월 국정원발전위 조사팀이 현장조사를 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이번에 자료를 살펴보면서 가장 관심이 가고 고민이 됐던 부분 가운데 하나는 전 국정원 발전위 조사관의 면담 내용이다. 진실위원회는 2008년과 2009년 그를 참고인 자격으로 최소한 3번 면담했다.
그에 따르면, 발전위가 기체 잔해 조사를 위해 안다만 해역에 가는 과정에서 실종자 “가족들에게 같이 가겠다고 약속하고 같이 가지 않은 것 사실”이다(DA0799647, 44쪽). 담당조사관이었던 자신의 판단에 따랐던 것으로, 이 점이 가족들이 발전위를 “불신하게 된 동기 중 하나일 것”이라고 한다(가족회는 국정원 발전위가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을 때 이를 비판하며 사건을 진실위원회로 가져갔다).
아울러 그는 동체 수색 작업 관련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바로 “프랑스 석유회사 TOTAL사에서 해저 송유관 건설 위해 안다만 해역 바닥 전부 스캔”했었다고 한다.
사건 전반에 대해 그는 “초동수사에는 문제가 많았으나 사건의 본질에는 변화가 없음. 정부에서 사고 대책 및 후속 조치 등에 있어 다소 실패한 부분은 있으나 사건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거나 감추려고 한 정황은 발견되지 않음”이라고 말했다(43-44쪽).
참고로 이 조사관은 발전위에 합류하기 전 KAL858기 가족회 및 대책위에서 일했다. 그래서인지 진실위원회는 그에게 “입장 바꾼 이유”를 물었다(44쪽). 그는 국정원에서 기록을 거의 다 보았고, 파견관과 본부 사이에 오간 전문 8천여 건을 모두 조작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답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건을 최초 보고했던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 쿠웨이트 파견관을 면담하며 김현희 일행에 대한 의혹이 많이 풀렸다고 한다. 파견관은 그에게 김현희 추적‧체포는 “거의 운이 좋아서” 가능했던 면이 있다고도 했다(43쪽).
“김현희 면담은 절대적으로 이루어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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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 발전위의 대면 조사 요구를 거부하고 잠적했던 김현희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언론에 등장해 참여정부가 자신을 탄압했다고 주장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결국 이 조사관에 따르면, 사건의 본질은 “북한이 사주한 것이 맞다. … 가족회의 의혹제기는 상당부분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진실이 바뀔 부분은 없다.” 그렇더라도 그는 “김현희 면담은 절대적으로 이루어져야하며, 다음 사항에 대한 본인의 진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 김현희는 왜 스스로 폭파범임을 인정했는가? 2) 사전에 사면에 대한 언질이 있었는가? 3) 북한출신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
그리고 또 다른 면담에서 그는 “발전위에서 조사할 당시 러시아, 헝가리 등 동유럽 등을 실지조사 하지 않은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DA0799651, 36쪽). 한편 이 조사관은 발전위의 활동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던 2007년 8월 ‘사퇴’했는데, 문서상 이유를 알 수는 없다(DA0799647).
올해는 KAL858기 실종 3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의 일을 관련 문서들을 통해 나름대로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건을 처음으로 보고했던 이는 안기부 쿠웨이트 파견관이다. 그는 “11월 29일 통상적 대북 업무 수행하기 위해 두바이행 비행기 탑승 중 두바이 공항 도착 후 한국인 정보원”에게서 “858기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DA0799647, 47쪽). 그리고 “북한 공작원들의 평소 공작 방법과 매우 유사하여 전문가의 입장에서 단번에 북한의 소행으로 파악”했다(48쪽).
1987년 12월 15일 또 다른 안기부 관계자도 비행기가 사라지자 “대한민국 관계당국 및 항공사에서는 즉각 동사건을 북괴테러범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조사를 시작했다고 말한다(DA0799707, 13쪽). 박쌍용 당시 외무부차관에 따르더라도, 1987년 12월 8일 기준 이 사건은 “북한의 소행임이 거의 분명”했다(DA0799654, 1쪽). 이는 처음부터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철저하게 확인하는 작업이 부족할 수 있었다고 일러준다.
교통부는 1988년 1월 15일자 문서에서 비행기에 타고 있던 115명이 모두 사망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1개월 이상이 경과된 현재까지 생존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점등으로 미루어볼 때 추락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것이 확실시됨”(DA0799698, 115쪽). 이는 ‘실종’ 및 ‘사망’선고와 관련해 유예기간을 두고 있는 민법 27-28조에 어긋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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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들에게 실종을 확인받은 '확정증명원'. 통상 실종기간 보다 빠르게 처리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다만 국정원 발전위에 따르면 상속관계, 보험문제 등을 이유로 사망처리를 바랐던 ‘유족들’이 있었다. 그래서 교통부가 민법에 우선한 호적법에 따라 처리했고, 발전위는 “절차상 무리가 없었다고” 판단한다(<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주요 의혹사건편 下권(III)>, 540-541쪽).
하지만 시신이나 제대로 된 유품 하나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의 경우 상황은 다르다(박강성주, <슬픈 쌍둥이의 눈물: 김현희-KAL858기 사건과 국제관계학>, 183-194쪽).
어찌됐든 공식 수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의 책임은 김현희와 김승일에게 있다. 두 사람 모두 체포 당시 자살을 시도했지만 김승일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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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과학연구소가 <통일뉴스>의 행정정보공개 청구를 받아들여 공개한 김승일 부검감정서. 한국으로 들여온 김승일의 시신은 화장해 파주 북한군.중국군 묘지에 매장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1988년 4월 27일자 안기부 1국의 수사보고는 이 시신에 대한 처리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체부검 및 VTR[비디오 테이프 녹화기] 촬영등을 통한 증거확보가 되었고 남북대화 또는 외교상 활용가치 없어 시체를 매장 또는 화장처리하여도 무방하다는 의견임”(DA0799715, 88쪽). 김승일의 시신은 현재 파주에 있는 ‘북한군 / 중국군 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다. 1묘역, 더 구체적으로는 ‘대한항공 폭파범’이라는 푯말 아래 묻혀 있다(<연합뉴스>, 2011년 6월 19일).
김현희는 서울로 압송되어 ‘자백’을 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1988년 1월 15일 안기부 수사결과가 발표된다. 북은 인도네시아 주재 대사관 등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반박했고, 정부는 기자들에게 1983년 버마 “랑군사태를 다시 상기시키고” 북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했다(DA0799652, 49쪽).
이런 가운데 외무부 비밀문서에 따르면, 1988년 1월 27일 스웨덴의 한 일간지(Expressen)에 테러 공격에 대한 편지가 전달됐다. 두 명의 여성 공작원이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앵커리지로 가는 대한항공기를 대상으로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공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DA0799679, 151쪽). 공작 시기는 1월 25-31일로 예상됐는데,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문서상 알기 어렵다.
유엔 안보리 등에서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지만, 국제적 차원에서는 대부분 북에 KAL858기 사건의 책임을 묻는 분위기였다. 예컨대 1988년 3월 30일자 외무부 문서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 주재 북쪽 대사관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인 이유는 “북괴 공작원이 자국과 비슷한 여건인 주서서[스위스] 공관에 비해 과다하다는 결론”에 따른 것으로, 인력을 19명에서 12명으로 줄이라는 요청이 들어왔다(DA0799696, 202쪽).
그렇더라도 사건으로 북이 얻은 이익은 무엇인가라는 점에서 의문이 일었다. 예를 들어, 안기부 수사발표 당일 있었던 말레이시아 주재 대사관 관계자와의 면담에서 말레이시아 외무성 아주국장이 “수사결과는 범인의 자백만에 의한 것인지 여타 물증이 있는지를 문의한 바 … 북괴측이 무슨 목적으로 동사건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여사한 사건은 북괴측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DA0799655, 16쪽).
진실위원회 재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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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15일 KAL858기 가족회 차옥정 회장이 진실위원회에 진상규명 신청서를 접수하고 있다. 가족회는 결국 신청을 자진 철회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이와는 별도로 공식 수사결과에 대한 의혹들이 꾸준히 제기됐다. 이에 국정원 발전위가 만들어져 처음으로 재조사가 시도된다. 발전위에서 KAL858기 사건 담당위원으로 활동했던 이에 따르면, 이 사건은 조사 대상 7건 가운데 “국정원에서 사건 실체에 대해 가장 자신 있어 하던 사건”이었다(DA0799647).
그리고 ‘미흡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기존 안기부 수사결과가 맞다’는 중간 및 최종결론이 나왔다. 김현희 조사가 빠진 상태였다.
이후 독립기구인 진실위원회에서 재조사를 담당했던 조사관은 발전위 보고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학자 입장에서 볼 때 굉장히 정밀하게 조사된 보고서였다. 더 이상 조사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조선일보>, 2012년 6월 26일).
진실위원회는 적어도 초기에는 독립기구답게 적극적인 조사의지를 보였다. 실종자 가족들을 면담하여 관계기관의 “감시‧미행”에 대한 진술을 듣기도 했다(DA0799646). 2007년 6월 29일 사전조사 결과 보고서에는 사건의 의혹사항이 4항목으로 분류돼 있다. 안기부 사전인지‧개입, 사라진 원인(폭파, 추락, 실종), 무지개 공작의 실체, 신청인들 인권침해 등이다(61쪽).
위원회는 전체적으로 사건을 “진실규명의 필요성이 한층 요청되는 사안”이라고 평가했다(65쪽). 조사계획에는 “국정원 실지조사, 해외 출장조사, 김현희 등 조사, 폭파시험‧시뮬레이션”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해외 출장조사는 심사의뢰 뒤 바로 철회됐고, 김현희 면담은 없었으며, 폭파시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정원 조사는 국정원(안기부) 자료가 아닌, ‘발전위’의 기록을 중심으로 열람한 듯하다.
참고로 실종자 가족들은 “더 이상 국정원을 조사해도 나올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국정원의 협조를 받지 말고 진실위원회에서 독자적으로 조사해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DA0799650, 60쪽).
결국 가족들은 재조사 신청을 철회하게 된다. 발전위의 경우도 그렇지만, 아마 조사를 담당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다.
이상으로 11회에 걸쳐 진실위원회 자료들을 나름대로 살펴봤다. 열람 당시 개인적으로 제한된 시간 때문에 충분히 보지 못했거나 놓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아울러 자료에 대해 나의 해석과는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밝혀둔다. 무엇보다 연재에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마지막 이야기를 할까 한다.
1987-2017,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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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대통령선거를 하루 앞둔 12월 15일 김현희가 압송돼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KAL858기 사건은 1987년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는 노태우 여당 후보의 당선에 도움이 됐다고 여겨진다. 1987년 12월 4일자 외무부 문서를 봐도 그렇다. 한 스웨덴 언론(G?teborgs-Posten)은 대한항공기 사건이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논평”했다(DA0799684, 44쪽).
2017년 올해 역시 대통령 선거가 있다. 지금까지 그랬듯,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1988년 1월 14일,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 뒤 안기부 수사발표를 하루 앞둔 날이다. 최광수 당시 외무부장관은 야나이 신이찌 한국 주재 일본 대사와 면담을 갖는다(DA0799688, 16쪽). 이 자리에서 나온 말은 곱씹어볼 만하다.
“우리는 노총재 임기 5년 이내에 우리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민주적 변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임. 만약 이번 선거에 노총재가 실패했다면 10-15년은 후퇴했을 것임. 이런 점에서 이번 선거는 매우 다행이었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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