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방한하자 온갖 정치꾼들이 몰려들어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1000만 촛불의 열기에 밀려난 보수정치세력들이 너나없이 반기문을 촛불에 맞설 대항마로 보고 영입에 공을 들이는 모습입니다.
반기문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반기문은 보수진영, 나아가 이른바 제3지대의 대권주자로 거론됩니다. 반기문은 노무현 정부에 몸담았던 인물이지만 미국의 정책과 노선에 맹종하는 종미성향을 뚜렷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춘기 때 미국을 숭배하고
반기문의 종미성향, 숭미성향은 그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반기문은 1962년 충주고등학교 재학시절, 미국적십자사의 영어경시대회에서 1등을 해 ‘청소년적십자 국제견학 및 연구대회’(Operation VISTA in the United States)에 대한적십자사의 청소년 대표 4명 중 1명으로 선발되어 미국을 가서 당시 미 대통령 존 F. 케네디를 직접 만났습니다. 반기문은 2013년 11월 22일, 미 <USA투데이>에 당시 상황에 대해 ‘존재감 없는 한국의 촌에서 온, 별볼일 없는 10대였던 내가 그를 만난 것은 하늘이 준 행운이었다. 인생의 전환점이었다.’라고 회고하였습니다.
반기문은 그 당시 케네디로부터 “세계시민이 되라. 세계에 봉사하고 당신의 나라를 사랑하라”는 말을 들었으며 ‘나는 세계의 젊은이들과 만날 때, 이 말을 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반기문은 “케네디의 싸인은 귀국 후 지워졌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내 인생에 새긴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며 케네디를 회고하였다고 합니다.
냉전적 사고방식이 확고하던 1960년대, 청소년들이 자기 고향을 시골이라며 미국을 동경하는 모습은 일반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기문은 단순한 미국 동경을 떠나 직업적인 대미외교관의 길을 걸었습니다. 반기문은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1970년에 외무고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이후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행정대학원으로 유학해 41세가 되던 1985년 4월에 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반기문은 1987년 7월 주미대사관 총영사, 1990년 6월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9월 주미 공사 등 주로 외교부 핵심부서인 미국관련 부서에서 근무하며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그에게 미국은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이에게 찾아온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것입니다.
용산기지 이전 협상에서 대통령을 따돌림
반기문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근무하였습니다. 하지만 반기문에게 노무현 정부의 노선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한-미간 외교현안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따돌리며 미국의 외교적 이익을 위해 불철주야 일했습니다.
반기문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근무하던 2003년, 용산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미국과 협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김용민 PD의 책 <보수를 팝니다>에는 당시 협상의 책임자로 반기문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결국 당시 협상팀의 방침은 반기문이 상당부분 관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래는 2003년 11월 18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작성한 ‘용산기지 이전 협상평가 결과보고’에서 밝혀진 당시 협상팀의 협상 방침입니다.
– 대통령(노무현)은 반미주의자이므로 협상 개입을 최소화 시킨다. – 용산기지 이전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얼마의 돈이 들든지 추진해야 한다. – 국회와 국민들이 문제 삼지 않는 수준에서 합의의 형식으로 문자와 표현을 바꾸는 것을 협상의 목표로 한다.
당시 협상팀은 노무현 대통령을 반미주의자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종미로 편향된 시각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역시나 그들은 기지 이전 비용은 액수에 구애받지 않고 미국이 원하는 대로 추진하려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외세와 야합해 국고를 빼돌려 나라 팔아먹는 전형을 보였습니다.
반기문은 대한민국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었지만 엉뚱하게도 대통령을 따돌리고 미국이 원하는대로 협상을 추진하였습니다. 반기문의 자발적 종미행위로 미국의 한국정치 개입이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김용민 PD는 이와 관련하여 “도대체 이거 어느 나라 협상팀의 방침인가? 한미 양국 모두가 한마음으로 미국의 이익을 챙기고 있는데 이게 무슨 협상이겠는가?”라며 한탄하였습니다.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종미적 사업방식과 연결됩니다. 미국은 대통령을 따돌리면서까지 미국의 이익을 중시하였던 반기문을 유엔사무총장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내세워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평화협정 제안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킴
아울러 반기문은 매우 극단적인 남북대결론자입니다. 반기문은 남북관계와 관련된 일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을 배제시켜 논란을 낳았습니다.
2005년 3월 미국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기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하고 이를 한국에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외교부 장관이었던 반기문은 ‘평화협정은 북한의 기만전술’이라는 생각으로 이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화협정은 북한의 기만전술’이라고 판단하는 것과, 미국정부의 제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의도적 직무유기를 통해 국정을 농단하는 일을 계속해서 발생시켰던 것입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노무현 대통령은 훗날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에게 미국이 평화협정을 검토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기문을 크게 질책했다고 합니다.
NSC를 무시하고 기획탈북을 공개
반기문은 노무현 대통령 뿐만 아니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결정도 무시하였습니다. 2004년 7월, 외교부 장관이던 반기문은 NSC의 결정을 무시하고 베트남에 모여 있는 탈북자 486명을 공개적으로 입국시켜 북한의 반발을 초래하였습니다.
반기문의 커다란 문제점은 반북대결행각을 벌이기 위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결정도 무시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남북화해협력을 중시해 북한당국에 자극적인 사안을 공개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정동영은 “외교부 장관이 그런 냉전적 시각으로 외교를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있느냐”며 반기문과 언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김종대 정의당 의원도 “한반도 평화체계를 놓고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반기문 외교부 장관의 갈등이 심했다”고 비화를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반기문의 대북관이 정부의 보고체계까지 무너뜨릴만큼 매우 대결적이란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유엔에서도 미국을 받들어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을 수행할 당시에도 미국의 정책을 관철하는 방향으로 유엔을 이끌어 국제적 논란을 낳았습니다.
심지어 반기문은 2016년 1월 1일,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 졸속타결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께서 비전을 갖고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한-미-일 3각동맹을 추구하는 오바마행정부의 집요한 압박에 따른 결과인 것은 정평이 나 있습니다. 오바마행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것입니다. 2014년 2월 13일에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한일이 역사를 극복하고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 좋다"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중재할 만큼 이 사안이 그렇게 두드러져서는 안 된다"라고 해 4월에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 전까지 한일문제를 개선하라고 반공개적으로 압박하였습니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은 2015년 2월 27일, “어디에서건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손쉽게 박수를 얻어낸다. 그러나 그런 도발은 진보가 아니라 정체를 가져올 뿐이다."라며 한일관계 개선에 미적지근한 한국정부를 비판하였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압박 끝에 2015년 10월 30일에 아베 일본총리가 방한하였으며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일 정부가 졸속합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위안부 합의가 그 동안 오바마 행정부의 집요한 요구였다는 점을 보면, 반기문 사무총장의 "박근혜 대통령께서 비전을 갖고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발언은 누구보다 오바마행정부가 좋아할 발언이었습니다.
미국 아바타는 대선후보 자격없어
고등학생 시절 케네디를 우상으로 삼은 것을 어찌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기문은 미국을 단순한 인생의 전환점으로 보는 데에서 나아가 전문적인 종미 외교관에 종사하면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했습니다.
반기문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였으며 망국적인 위안부 합의를 추켜올리기까지 하였습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미국 아바타 반기문은 대선에 나설 자격이 없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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