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프로치(approach)가 좀 마일드(mild)한 것 같아요. (중략) 프루덴셜 레귤레이션(prudential regulation)이라는 것은 굉장히 시스텀매티클리(systematically) 연결이 되어 있는 분야가… (중략)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global supply chain)의 디스럽션(disruption)의 문제가 일어나는…”
위 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시나요?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해 11월15일 기자 간담회에서 한 말입니다. 이를 두고 과도하게 영어 단어를 섞어쓰는 한 총리의 유별난 ‘영어 사랑’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사실 웃고 넘어갈 일은 절대 아닙니다. 공직자나 공공기관이 국민을 대상으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인 ‘공공언어’는 쉽고 분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립국어원은 그 이유를 크게 2가지로 꼽았습니다. 첫째, 공공기관(공직자)과 국민 사이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뤄지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경제적 손실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정책 용어가 난무하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국민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데요, 이를 개선했을 때 절감되는 사회적 비용은 한 해 114억원(2010년 기준)에 이른다고 합니다. 국립국어원은 공공언어를 구사할 때 특히 외국어는 될 수 있으면 쉬운 우리말로 쓰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이 없다면 부득이하게 외국어를 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외국어를 쓰는 경우가 최근 한 총리를 비롯해 종종 눈에 띕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예외는 아닙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2차 비상경제민생회의 마무리 발언에서 “2023년에는 다시 대한민국(이) 도약하는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더 아주 어그레시브(aggressive)하게 뛰어보자”고 말했습니다. 이날 윤 대통령은 ‘시장’과 ‘규제’를 굳이 ‘마켓’(market), ‘레귤레이션’(regulation)으로 바꿔 말하거나 ‘거버먼트 인게이지먼트’(government engagement)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요, 정부 관여라는 뜻입니다.
한글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교육부는 어떨까요. 아쉽게도, 최근 교육부의 보도자료나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발언에도 불필요한 외국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난 5일 발표된 교육부 새해 업무보고 보도자료에는 “교육현장의 애로사항을 디지털 신기술을 활용해 해결할 수 있도록 테스트베드(test bed)를 확대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테스트베드는 시험장, 시험무대, 가늠터 등으로 쓸 수 있는데요, 국립국어원이 2018년 선정한 ‘꼭 다듬어 써야 할 행정용어 100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주호 부총리는 신년사에서 “대학이 지역의 혁신 허브(hub)가 되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는데요, 허브 역시 ‘필수 개선 행정용어’로 꼽히며 중심, 중심지로 바꿔쓰면 됩니다.
‘업스킬링’(up-skilling), ‘리스킬링’(re-skilling) 같은 표현은 어떤가요. 교육부가 지난달 28일 발표한 ‘평생학습 진흥방안(2023~2027년)’ 보도자료에 나온 표현입니다. 향상교육, 재교육이라고 병기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불친절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보도자료에는 정확히 적혀 있지 않지만 현재 직무의 혁신을 위한 기술을 배우면 업스킬링, 새로운 직무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면 리스킬링이라고 합니다.
한편, 지난달 교육부는 10여년만에 대규모 조직개편을 실시했습니다. 이때 주요 보직 가운데 하나인 ‘국제협력관’의 명칭이 ‘글로벌교육기획관’으로 바뀌었습니다. 교육부는 “기존 명칭이 다소 수동적이고 교육부처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고 (명칭을 바꿔) 한국 교육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할 수 있는 정책 기획을 강화할 예정이다”고 설명했는데요, 그런 이유라면 국제교육기획관 정도로 바꿔도 되지 않았을까요? 국립국어원은 공공언어를 쓸 때 ‘글로벌화’는 ‘세계화 또는 국제화’로, ‘글로벌 스탠더드’는 ‘국제 표준 또는 세계적 표준’으로 다듬어 쓰도록 권고합니다.
올해는 공직자들의 발언과 정부 보도자료에서 외국어가 조금이나마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난해 10월9일 열린 제576돌 한글날 경축식 기념사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의 말과 글의 힘이 곧 우리 대한민국의 경쟁력입니다. 정부는 공공기관, 언론과 함께, 공공언어에서 불필요한 외국어 사용을 줄이고,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나가겠습니다.” 기념사는 누가 했냐고요? 한덕수 국무총리입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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