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3-01-24 09:13
수정 :2023-01-2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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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BAR_배지현의 보헤미안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보건복지부·고용노동부·여성가족부·식품의약품안전처·질병관리청 새해 업무보고에 참석해 머리 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옛날에 선거 때 막 돈 쓴다고 그러면 선거자금은 뭐 한 100억을 뿌렸는데 막상 유권자에게 돌아가는 건 10%만 돌아가도 선거에 이긴다는 옛날 얘기가 있었잖아요…”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일 보건복지부‧고용노동부‧여성가족부 업무보고를 받은 뒤 쏟아낸 마무리 발언 중 일부입니다. 이날 윤 대통령은 약자 복지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검증되지 않은 얘기나 국정과제 핵심과는 거리가 먼 사례 등을 들며 5000자에 가까운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대통령실은 이번 부처 업무보고가 시작되기 전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를 국민에게 직접 보고하는 형식의 ‘대국민 보고’가 될 것이라고 홍보했습니다. 그러나 18개 부처 가운데 15곳이 업무보고를 마쳤지만, 윤 대통령의 발언은 긴 분량에도 요점을 알기 힘든 ‘난수표’에 가까웠습니다.
대통령 업무보고는 취임 뒤 두 번째입니다. 지난해 여름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 대통령과 각 부처 장관의 독대로 진행한 첫 업무보고와는 달리 부처 관계자뿐 아니라 전문가와 정책수요자 등이 참석한 대규모 업무보고였습니다. 대통령실 안팎에선 핵심 정책에 관한 대통령의 생각을 부처 공무원들과 민간이 직접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대통령실은 “오로지 국민과 국익만 생각하고 나아가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확고한 철학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업무보고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공개된 윤 대통령의 발언은 번번이 입길에 올랐습니다. 짧게는 9분에서 길게는 28분 동안의 마무리 발언에선 현실과 거리가 있는 인식을 드러냈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일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학교 다닐 때 국어가 재미가 없었다. 우리말을 무엇 하러 또 배우나. 저도 학교 다닐 때 국어가 재미가 없었다. 문학 하시는 분들은 청록파, 이런 것을 국어라고 했지만 그게 아니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또 “어떤 시라든가 이런 거를 놓고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뭔가 자기의 느낌을 적는다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한다면 재미없어 할 사람이 아마 없지 않겠나 싶다”고 말했으나, 실제 교과서엔 이미 그런 내용이 있어 윤 대통령이 현실도 모른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마무리 발언이 길어지다 보니 불필요한 발언도 적지 않았습니다. 윤 대통령은 “일본도 이제 머리 위로 (북한의) 아이아르비엠(IRBM·중거리탄도미사일)이 날아다니니까 방위비를 증액하고 소위 반격 개념을 국방계획에 집어넣기로 하지 않았나. 그걸 누가 뭐라고 하겠나”(지난 11일 외교부·국방부 업무보고)라고 말해 방위비 증액을 뼈대로 한 일본 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을 용인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지난 9일 복지부 업무보고에선 연금개혁의 기초작업을 강조하면서 뜬금없이 대법원 표결을 비유로 들기도 했습니다. “어떤 케이스가 대법원에 올라가면 대법원에 법관이 13명이다. 올라가자마자 대법관끼리 표결을 하는 게 아니다. 충분히 연구하고 자료조사하고 회의도 하고, 전원합의로 결론이 안 날 때마다 표결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연금개혁도 기초 자료수집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예를 든 것이지만, 표결을 위한 자료 수집과 국민여론 수렴을 위한 기초 작업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긴 힘들지 않을까요.
이번 업무보고에서는 정부 정책을 국민에게 소개하는 ‘대국민 보고회’라는 설명이 무색하게 야권을 겨냥하는 ‘정치적 발언’도 적지 않았습니다. “과거 정부가 부동산 문제와 환경 문제를 어떤 정치와 이념의 문제로 인식했다”(3일 국토교통부 업무보고), “생산되는 쌀이 시장에서 어느 정도 소화하느냐와 관계없이 무조건 정부가 매입해주는 이런 식의 양곡관리법은 농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4일 농림축산식품부 업무보고) 등이 그것입니다.
대통령실은 매번 업무보고가 끝난 뒤 대통령의 전체 발언을 정리해서 공개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마무리 발언은 사전 원고 없이 즉석에서 대통령의 생각을 전한 것”이라며 “대통령이 갖고 있던 평소 생각, 소신, 철학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대통령실 일부 인사들은 “대통령이 아는 게 얼마나 많으면 즉흥 발언을 20분 넘게 하겠느냐”며 추어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실 주변에서도 윤 대통령의 ‘폭포수 발언’을 두고 우려가 나옵니다. 국정 철학이나 기조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발언 속에서 부적합한 사례, 부적절한 인용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핵심 메시지는 사라지고 실수만 부각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게 대통령실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국민에게 각인되는 대통령의 메시지는 장편소설보다는 명료한 ‘한 줄의 시’일 것입니다.
배지현 기자 bee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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