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 제정 이끈 유족들도 반기지 못해, 눈물 흘린 강은미 “대안 마련할 것”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 이하 중대재해법)이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 산업재해 유족들이 끝까지 반대했던 독소조항은 그대로 유지된 채 처리되면서 아쉬운 첫발을 뗐다. 중대재해법 제정을 위해 한 달 가까이 단식을 이어온 고 김용균의 어머니와 고 이한빛의 아버지는 법안 통과 소식에도 기뻐할 수 없었다.
19대 국회, 20대 국회에서 번번이 좌절
후퇴 논란 속 21대 국회서 통과
중대재해법은 이날 본회의에서 재석 의원 266명 중 찬성 164명, 반대 44명, 기권 58명으로 의결됐다. 후퇴한 중대재해법을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었던 정의당 의원들과 열린민주당 의원 전원은 기권표를 던졌다. 민주당에서는 이원욱 의원이 반대했고 김경만·김영주·김주영·박용진·장철민 의원이 기권했다.
중대재해법 제정은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달라는 시민들의 오랜 요구였다. 옛 통합진보당 김선동 전 의원이 2013년 19대 국회에서 '기업살인처벌법'을 발의했고, 2017년 20대 국회에서는 정의당 고 노회찬 의원이 '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책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두 번의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던 중대재해법은 비로소 21대 국회 문턱을 넘어섰다.
이번에 통과된 중대재해법의 핵심은 원·하청 관계에서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할 경우 원청의 경영책임자에도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기업의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가 안전·보건 의무를 위반해 1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올 경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고, 법인의 경우 50억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 제3자에 도급, 용역, 위탁을 준 경우에도 같은 안전·보건 의무를 부여해 원청의 경영책임자에게 하청의 안전도 책임질 수 있도록 했다.
산업재해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같은 사회적 참사도 '중대시민재해'의 개념으로 추가했다. 이에 따라 안전 의무를 위반하고 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간 기업의 경영책임자들도 처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만 법 심사 과정에서 제정 취지를 크게 훼손하는 독소조항들이 추가되면서 개혁 후퇴라는 비판이 나왔다.
중대산업재해의 경우 5인 미만 사업장을 아예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에 대한 처벌 수위 역시 낮아졌다. 경영책임자의 정의를 모호하게 규정함으로써 경영책임자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빈틈'이 생겨났고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유예 조항은 중대재해법을 더 후퇴시켰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는 이러한 비판을 의식한 듯 "부족하지만 중대재해를 예방해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새로운 출발을 삼고 앞으로 계속 보완·개선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단식 통해 중대재해법 제정까지 이끈 유족들
"국민 우롱하는 것, 우린 허용할 수 없다"
본회의 전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에서는 원안보다 크게 후퇴한 중대재해법을 비판하며 전체회의에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소위에서 의결된 법안을 전체회의에서 수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여야가 합의한 법안이 당초 내용에서 멀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직접 중대재해법을 발의한 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중대재해법에서 5인 미만 사업장이 제외된 데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박 의원은 소위 회의에서도 같은 주장을 펼쳤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 의원은 "5인 미만 사업장을 통으로 배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대통령령에 위임이라도 해서 일부 사업장은 빼더라도, 적용이 필요한 곳은 포함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당 신동근·최기상·소병훈 의원과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도 5인 미만 사업장도 중대재해법 적용대상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반대하면서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중대재해법은 소위에서 합의한 대로 의결됐다.
대신 민주당 소속 윤호중 법사위원장은 정부를 향해 "앞으로 6개월이든, 1년이든,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줄어들지 않고 계속 발생하면 법 개정에 동의하겠냐"라고 질문했고, 법무부·중기벤처부·고용노동부 측으로부터 '동의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고 김용균의 어머니와 고 이한빛의 아버지도 전체회의에 출석해 강하게 항의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김용균 어머니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중대재해법 국회 국민동의 청원을 발의한 당사자로서,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발언권을 요청했으나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미숙 이사장은 "5인 이하 사업장에서 한해 4백명이 죽어 나간다. (지금의 중대재해법은) 계속 죽어 나가게 하겠다는 것"이라며 "절대로 유족들은 허용할 수가 없다"고 울분을 토해냈다.
이한빛 아버지 이용관 한빛미디어인권노동센터 이사장도 "저희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청원을 발의할 때 10만명을 채울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면서 온 힘을 기울여서 몇 달 전부터 준비해서 (만든 것인데, 후퇴한 중대재해법은)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라며 "이게 국민을 위한 국회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이들과 함께 단식농성을 했던 정의당 강은미 원내대표는 중대재해법의 대안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강 원내대표는 중대재해법 표결 전 토론을 신청해 "중대재해법이 제정되는 이 자리가 결코 웃을 수 없는 서글픈 자리가 되었음을 국민 여러분께 고백한다"며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중대재해법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은 목숨을 건 단식을 한 유가족분들과 국민의 성과"라고 말했다.
강 원내대표는 "고 노회찬 의원의 뜻을 이어 21대 국회에 제일 먼저 정의당의 이름으로 발의한 이 법의 무게를 잊지 않겠다"며 "'다녀올게'라는 인사가 누군가에게는 사무치는 아픔이 되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하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중대재해법 제정 촉구 단식 농성단은 이날 본회의 직후 해단했다. 지난해 12월 11일부터 시작된 단식농성은 29일차가 된 이날에서야 종료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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