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노동 후진국 오명 벗기도, 한-EU 무역분쟁 해결도...방법은 노조법 2조 개정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가 벌어진 지 1년 남짓 되던 7월 29일, WTO(세계무역기구)는 한-일 무역분쟁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가 요청한 '패널 설치'를 받아들였다. WTO의 '패널 설치' 결정에 대해 일본 정부는 "깊이 실망했다"며 강력한 유감을 표명했다. 반대로 한국 정부는 WTO 결정에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일본 정부의 엇갈리는 입장에서 알 수 있듯이, 패널 설치는 무역분쟁에서 '제소' 또는 '협의'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을 의미한다. 보통 (전문가) 패널은 3인으로 구성되며, 3인이 공동으로 조사한 후 '패널 보고서'가 작성되는데 이 보고서가 일종의 조정안 역할을 하게 된다. WTO의 경우 만장일치로 반대하지 않는 이상 반드시 패널 보고서가 채택되도록 규칙을 정하고 있다.
한국-EU 무역분쟁도 '패널 소집' 단계
한·일 분쟁은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제소하고 패널 설치를 요구해 받아들여진 경우지만, 정반대로 한국 정부가 패널 설치를 요구받은 경우가 있다. 바로 한국이 유럽연합(EU)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 내용 중 일부를 한국 정부가 이행하지 않았다는 문제제기에 따른 것이다.
유럽연합이 제기한 문제는 한국 정부가 ILO 기본협약 비준 및 국제 노동기준에 맞도록 노동조합법을 개정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8개의 ILO 기본 협약 중 4개(제87·98호 결사의 자유 협약, 제29·105호 강제노동금지 협약)를 아직 비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유럽연합이 문제삼고 있는 '국제 노동기준에 맞도록 개정을 요구하고 있는 노동조합법' 내용은 무엇일까? 지난해 7월 4일 유럽연합은 한국 정부에 '전문가 패널 설치'를 요구하면서 관련 내용을 상세하게 유럽연합 홈페이지에 공개한 바 있다. (아래 그림)
※ 붉은 밑줄은 강조를 위해 필자가 그어놓은 것. 위 내용은 다음 URL 주소로 들어가 pdf 파일을 내려받으면 확인할 수 있음 : http://trade.ec.europa.eu/doclib/press/index.cfm?id=2044
(관련 기사 : 후진적 한국 노동 정책, 결국 무역분쟁까지 일으키다)
'근로자(노동자)' 개념을 확장하라!
유럽연합이 요구하고 있는 노동조합법 개정 4개의 항목을 표로 요약하면 위와 같다. 내용을 보면 거의 모든 내용이 한국 노동조합법 제2조의 1호에 정의된 '근로자' 개념이 너무 협소하다는 문제제기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로자' 개념이 너무 협소해서 특수고용 노동자와 해고자·실업자는 노조에 가입할 수 없도록 하고 있고, 그런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할 경우 전교조·공무원노조 사례처럼 노동조합 자격을 박탈해 버리며, 조합원 중에서만 임원을 선출한다고 하여 이런 노동자들이 노조 임원이 될 자격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 설립을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 역시 사실은 '근로자' 개념이 너무 협소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한국에서 노조 설립 신고를 했으나 정부 당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는 경우들 대부분이 특수고용·플랫폼 또는 실업자·해고자·구직자 등이 조합원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노조법 2조 개정만 쏙 뺀 문재인 정부
유럽연합이 위 문제를 제기하며 전문가 패널 설치를 요구한 시점은 작년 7월 4일, 벌써 1년 하고도 2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국 정부는 지난해 9월 말에 ILO 핵심협약 비준안과 함께 3개의 노동조합 관련 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국회로 발의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우선 한국 정부는 약속한 4개의 핵심협약 비준이 아니라 29·87·98호 협약 비준안만을 국회에 제출했다. 29호와 함께 강제노동 금지협약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105호 협약을 제외한 것이다.
게다가 3개의 노동조합 관련 법 개정안에는 유럽연합이 강력하게 제기한 노동조합법 제2조와 관련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노조 설립신고와 관련한 제도개선 내용도 없었다. 오히려 사업장 기반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의 경우 해고자·실업자는 임원이나 대의원으로 선출될 수 없다는, 사실상 유럽연합 요구와 완전히 충돌하는 개악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사업장 내 쟁의행위 일체를 금지시킬 수 있는 "사업장 일부 또는 전부 점거 금지" 조항, 그리고 단체협약 유효기간 상한선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연장시키는, 그동안 사용자들이 염원해왔던 노조 탄압수단까지 입법 내용에 포함시키고 말았다. 교원·공무원의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라는 ILO 수차례의 권고도 문재인 정부 입법안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사법부가 대신 해결해준 노조법 2조 4호 (라)목
지난 9월 3일, 대법원은 박근혜 정부가 노동조합법 제2조 4호 (라)목과 관련해 전교조에 '노조 아님 통보'를 한 행정처분이 위법한 것이었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실제 '노조 아님 통보' 행정처분의 근거는 시행령에만 있는데, 본 법률에는 이 처분의 근거도 명시되지 않았고 시행령에 위임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 취지에 따르자면, 조합원 가입 범위에 해고자를 포함시킨 특정 사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노조 아님 통보'라는 행정처분 일체가 위법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취지는 사실 ILO 결사의 자유 협약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행정관청이 노동조합을 하고 말고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 ILO 핵심협약의 취지니까 말이다.
대법원의 판결 내용은 국제 노동기준에 부합하는 것이지만, 그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의 행정은 국제 노동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ILO 협약은 사법부의 최종 확정판결 이전에는 노조 활동을 중단시켜선 안 된다는 원칙을 갖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대법원 판결 전까지 전교조 법외노조 상태를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노조 설립신고 했더니 1년 넘게 자료 보완과 출석조사
'노조 아님 통보' 문제는 해결했지만 한국 정부는 아예 노동조합 설립신고 시점부터 진입장벽을 설치하고 있다. 지난 글에서 전국대리운전노조가 문재인 정부 하에서 무려 1천일에 걸친 천신만고 끝에 설립필증을 교부받았다는 얘길 전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노조 설립신고에만 1000일 걸리는 나라)
하지만 대리운전노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언론에 나온 것들만 추려 보았는데도 위 표처럼 많은 사례를 찾아낼 수 있다. 1천일 걸려서 설립필증을 교부받은 대리운전노조는 그나마 '해피엔딩(?)'에 속한다. 방과후강사노조·보험설계사노조는 설립신고 1년이 넘도록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들 노동조합은 설립신고를 낸 뒤 고용노동부로부터 "자료를 보완해달라" "노동청에 출석해 조사를 받으라"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신고제'로 운영해야 할 노동조합 설립 제도를 실제로는 '허가제'로 운영해 왔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라이더유니온은 노동부의 출석조사 요구에 조합원 다수가 출석해 항의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기간제교사노조는 2차례에 걸쳐서 노조가 아니라며 설립신고를 반려했다. 그 이유가 또 놀랍다. 유럽연합이 가장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한 내용, 즉 노동조합법 제2조 4호 (라)목에 따라 반려한다고 명시했다. 이거 뭐 유럽연합과의 무역분쟁에 노골적으로 엿을 먹이는 얘기 아닌가. '노동존중'을 내걸고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의 처분 내용이 이러하다.
째깍째깍 다가오는 한-EU 무역분쟁 패널 보고서
본래 한-EU FTA 합의내용에 따르면 전문가 패널 소집 요청이 있을 경우 2개월 내에 3명의 전문가 패널을 선정해 활동을 개시하도록 하고 있다. 3명의 패널은 90일 내에 일종의 권고 역할을 할 '패널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아래 그림) 그럼 유럽연합과의 무역분쟁 관련 전문가 패널 논의는 현재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을까?
우선 3명의 전문가 패널 구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양 당사국 국적의 패널 각 1인으로 유럽연합은 로랑 브와송 드 샤주네(Laurence Boisson de Chazournes) 스위스 제네바대 교수를, 한국은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선정했다. 나머지 패널이자 제3국 출신의 의장 역할을 맡을 인물로는 미국 국적의 토마스 피난스키 변호사(Thomas Pinansky)로 선정되었다.
본래 2개월 내에 패널이 선정되어야 했지만, 노동기본권 관련 항목이 자유무역협정에 포함된 것은 한-EU FTA가 첫 사례이며, 따라서 이 문제로 '전문가 패널' 소집 단계까지 가보는 것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래서 패널 선정은 조금 늦춰져 지난해 연말에야 선정이 완료되었으며, 작년 12월 30일부터 활동을 시작한 바 있다.
그렇다면 90일째가 되는 3월말 또는 4월초에 '패널 보고서'가 나와야 하는데 그 사이에 코로나19 대유행이 벌어졌다. 여기에 제3국 의장 역할을 맡고 있는 토마스 피난스키 변호사가 암으로 지난 4월 8일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제3국 의장 역할을 맡을 패널을 새로 뽑아야 했고, 코로나19 유행 등으로 패널 활동이 원활하게 벌어지기 어려운 사정 때문에 시간이 지연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패널 활동은 거의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일한 해결책 : 노조법 2조 개정
그 사이 국회 구성이 바뀌었다. 지난해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ILO 협약 비준안과 노조법 개정안은 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되었다. 그래서 21대 국회 개원 후인 올해 7월 7일, 정부는 다시 협약 비준안과 법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문제는 작년에 제출한 내용을 단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제출했다는 점이다.
ILO 핵심협약 4개 중 105호 강제노동 금지협약은 여전히 빠져 있고, 노조법 2조 개정은 담겨 있지 않고 온통 개악안으로 가득 찬 정부 법안이 다시 발의된 것. 이 법안들이 이대로 통과된다면, 그리고 통과된 법에 대해 노동자들이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에 제소한다면, ILO는 한국 정부가 핵심 협약을 위반했다고 판정할 것이 거의 확실한 수준의 법안들이다.
지난 6월 30일, 화상으로 열린 한-EU 정상회담에서 EU 측은 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동기본권 보장을 다시한번 촉구한 상태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패널 보고서 작성시한도 째각째각 다가오는 상황이다. 군사독재 시절과 달리 한국 정부는 노동탄압국의 오명을 벗을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노동 후진국의 멍에를 뒤집어쓸 것인가.
해결책은 노동조합법 2조 개정에 있다.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을 비준한다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협약에 맞게 노동조합법을 개정해야 하고, ILO 협약은 한국의 특수고용이나 플랫폼 노동, 실업자·해고자는 물론이고 일반 자영업자에게도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법 2조의 1호 '근로자' 개념을 확장해 특수고용·플랫폼 노동과 실업자·해고자를 포괄해 낸다면, 유럽연합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다. 게다가 대법원이 노조법 2조 4호의 (라)목 문제를 대신 해결해준 상황 아닌가.
그렇다면 남는 쟁점은 노조 설립신고 문제인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재 노조 설립신고 처분 결과가 늦춰지고 있는 노동조합들의 핵심 쟁점이 모두 특수고용·플랫폼 노동 또는 실업자·해고자 조합원 자격 문제 아니던가. 이건 노조법 2조를 개정하면 금방 해결되는 문제이다.
국제 노동기준도 맞추고, 노조 할 권리도 보장하고, 유럽연합과의 무역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길! 문재인 정부는 왜 한사코 이 길만은 가지 않으려 할까? 본인 스스로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걸었던 국민과의 약속들인데 말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90817185766078#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