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 어린이책’ 회수 논란 지난해 말, 5개 초등학교 도서관에 책 134종이 들어왔다. 아동문학 작가와 평론가, 초등학교 교사가 1년간 기획·심사해 뽑은 책들이다. 몸과 성장에 관한 이해를 높이고,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며, 차별과 편견을 깨는 내용이다. 134종은 여성가족부가 지원하는 어린이 성평등교육문화사업인 ‘나다움 어린이책’에 선정됐다. 최고 권위의 아동도서상인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작도 들어갔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책 134종 가운데 7종이 사라졌다. 뒤늦게 문제 있는 책으로 밝혀져서일까? 너무 늦게 ‘문제’가 되긴 했다. 도서관에서 자취를 감춘 책엔 1971년 덴마크에서 출간된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도 포함됐다. 덴마크 문화부 아동도서상을 받았다. 해외에서 유아 성교육 자료로 지금도 널리 쓰인다.
한국에서 이 책은 ‘회수’됐다. 보수정당과 개신교 세력이 책을 두고 “선정적이다” “조기성애화를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세기 전 덴마크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보수 개신교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이 책을 공공도서관에서 회수하라고 했다.
하지만 국회의원 다수는 이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했고,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책이 유아 성교육 도서로 세계적 사랑을 받는 기회로 이어졌다.
2020년 한국에선 달랐다.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이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등 ‘나다움 어린이책’ 7종이 “조기성애화, 동성애 조장 우려가 있다”고 말한 건 지난달 25일이다. 1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선정된 책들이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하루다. 다음날 여성가족부는 부처 지원 사업 결과물인 7종 모두를 회수하기로 결정한다.
한국과 덴마크 사이에 50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여전히 한국 교육에서 성은 비밀스러운 영역이다. 공적인 논의를 금기시한다. 학교 안팎에서 온갖 성폭력 문제가 터져나온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최연소 가해자는 12세이다. 지난 7월 초 경찰 발표를 보면 n번방 성착취 불법 영상 구매자 131명 중 20대가 104명(79.4%), 10대가 7명(5.4%)이었다. ‘성교육의 실패’란 비판이 나온다. 이런 현실 앞에서 유아용 성교육 도서를 두고 제기된 ‘조기성애화’ 우려나 주장은 퇴행적이다.
한국 성교육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시간을 가로막는 이들 맨 앞에 보수 개신교 단체가 있다. ‘나다움 어린이책’을 문제 삼기 시작한 단체는 ‘나쁜 교육에 분노한 학부모 연합’(분학연)이다. 지난 총선 때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이끄는 기독자유통일당을 지지했다. 보수 개신교 세력은 한국 성교육을 번번이 발목 잡았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현실은 고스란히 독이 되어 교육 현장으로, 청소년들의 삶으로 퍼져나간다.
■초등교사들이 본 ‘나다움 어린이책’ 논란과 성교육 현실
선정적·자극적으로 가해진 공격
정부, 하루 만에 정책 철회·회수
정치적 부담 피하려 ‘회피’ 결정
‘나다움 어린이책’ 회수는 책 7종이 다섯 개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사라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부가 추진한 사업이 보수단체의 항의에 순식간에 취소·후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은 회수 배경을 두고 “코로나19로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다른 갈등을 유발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의 회수 결정 전후 현장 학교에서 갈등과 혼란이 증폭됐다.
책 회수 결정은 보수단체의 공격에 ‘기름’을 부었다. 이들 단체는 책을 지원받은 학교엔 항의를 쏟아냈다.
장기적이고 큰 피해는 따로 있다. 한국 사회가 올바른 성교육을 논의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갈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 피해는 지금 학교에서 배우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정부가 할 일은 사회적 논의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아닐까요.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라는 책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다른 대안을 모색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정치적 부담을 피하려고 회피하는 결정을 내렸어요. 길을 막아버린 거죠.”(A교사)
지난 3일 어린이책 연구회 소속 초등학교 교사 2명과 인터뷰했다. ‘나다움 어린이책’ 회수 사태와 학교 성교육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코로나19의 확산에 따른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된 2단계’여서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을 이용해 원격 인터뷰를 진행했다.
■취지·맥락 제거, 선정적 프레임으로 공격
가장 논란이 된 ‘아기는 어떻게…’
정작 아이들은 태아 모습에 집중
어른들만 성관계 적나라하게 봐
B교사 =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란 책을 3년 전 도서관에서 봤어요. 처음 보면 놀랄 수도 있겠죠. 여러 교사나 학부모들한테는 좋은 성교육 교재로 검증된 책들입니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가해진 공격에 여성가족부가 하루 만에 정책을 철회하고 회수하는 식으로 해결한다면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요.
- ‘나다움 어린이책’에 선정된 책들을 보셨나요.
A교사 = 성인지 감수성·다양성 측면에서 빼어나면서도 어린이들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에요. 아이들 반응이 무척 좋아요. 어른으로서 ‘좋은 어린이책 리스트’를 구하는 게 쉽지 않은데, 하나의 참고 리스트가 된 거죠. 항의나 반대 가능성을 의식해서인지 해외에서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거나 검증된 유명한 책들 위주로 구성했더라고요.
- 가장 논란이 된 책이 성관계를 설명한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인데요.
A교사 = 저학년들에게 적합한 책이에요. 아이들은 태아 모습에 집중해서 봐요. “태아가 이렇게 작았어?” “아기가 어떻게 이렇게 커져?” 이런 걸 궁금해하죠. 어른들 눈에는 성관계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이는 거예요. 고학년 성교육으로 쓰기에 저는 이 책이 ‘올드’하다고 생각해요. 남성 중심으로 섹스를 설명하죠. 남자가 발기해도 여성이 원치 않으면 거절할 수 있어야 해요. 또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썼어요. 한부모가정 같은 다양한 가족이 있잖아요. 제가 한부모가정 아이라면 이 책은 다른 의미로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미 섹스가 뭔지 생각하고, 남자친구의 성관계 요구에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이 책으로 성교육을 하면 잘못된 정보를 줄 수 있는 거예요. 1970년대 책이잖아요. 더 나아간 성교육을 고민할 시기인데, 이 책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논의도 어려운 상황이에요.
회수 대상 책 가운데엔 국제앰네스티 추천 도서 <우리 가족 인권 선언> 시리즈 4권도 들어갔다. 이 시리즈는 전통적 성역할 구분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설명한다. <딸 인권 선언>은 “헝클어진 머리를 해도 될 권리, 마음껏 까불 수 있는 권리” “대통령, 조각가, 외과 의사 등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등으로 구성된다. 권리 선언 중 “남자든 여자든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권리”가 문제 됐다. 보수 개신교단체와 보수 정당은 “동성애를 조장·미화한다”고 했다.
또 다른 책 <나는 토펭이!>는 토끼와 펭귄 사이에 태어난 토펭이가 따돌림을 당하지만 토끼의 장점과 펭귄의 장점을 살려 늑대를 물리치는 내용을 담았다. 누가 봐도 다문화시대 다른 인종·민족에 대한 차별·편견을 깨는 내용을 담았지만, 나쁜교육에분노한학부모연합(분학연) 등은 이 책이 “수간을 정상적으로 생각하게 한다”고 비난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지만, 논란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회수됐다.
B교사 = “조기성애화, 동성애, 수간” 등 자극적인 워딩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공격했어요. 실제 학교 도서관에는 더 이상한 책이 많아요. 한 학생이 <키다리 아저씨> 같은 성인 남성이 여학생에게 엄청 잘해주는 내용의 책을 가리키며 “이상하다”고 한 적이 있어요. 최근 문제가 되는 ‘그루밍(길들이기) 성범죄’를 연상시키는 책이었죠. 그런 책들도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는 게 현실이에요. 그런 것들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이미 선정 과정을 통해 검증된 책들을 ‘프레임’을 씌워 공격했죠.
A교사 = 이미 학교에선 자신의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을 고민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동성애’가 나온다는 이유로 회수하는 건 그 친구들을 지워버리는 조치예요. 인권 침해라고 봐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8년 중학생 4065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성정체성 또는 성적지향으로 고민해본 학생은 각각 26.1%, 30.7%로 나타났어요.
■성 금기시가 ‘과잉 성애화’ 부른다
비밀스러운 영역에 갇혀버린 성
인터넷 속 온갖 성지식 접하는데
학교가 정확한 정보 제공해야
- 학교 성교육 현실이 궁금합니다.
A교사 = 학교마다 달라요. 보건교사를 둔 학교도 있고, 담임교사가 성교육을 하는 학교도 있죠. 안전, 인권, 진로교육 등 10개의 범교과 과정 중 안전교육에 성교육이 들어가요. 단독 성교육 시간도 정말 짧고, 이 시간에 실제 성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외부강사가 오면 1~6학년에 다 같은 내용을 방송으로 틀어주는 식이죠.
B교사 = 담임교사로서 고학년 아이들과 성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무리가 있어요. 아이들은 교사 말을 교사의 행동과 일치시켜요. 선생님이 “섹스”란 단어를 말하면, “어머, 선생님이 섹스라고 했어” 이런 식이죠. 고학년 학생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건 어른이 아이에게 성에 관해 말하는 사례가 없기 때문이에요.
A교사 = 실제 아이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하고 싶은 체위’ 설문조사를 올리기도 해요. 또 포르노에 자주 나오는 체위가 선호된다고도 해요. 성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데, 남자아이면 그런 자신이 이상하다고 여기기도 해요. 이런 문제를 두고 학교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가르치는 게 마땅해요. 성교육을 이수하고, 시험도 봐야 한다면 아이들이 과잉성애화되진 않을 거예요. 성이 비밀스러운 영역에 갇혔어요. 그걸 깨려 시도하면 더러운 존재 취급을 받거나 영웅시되는 상황이에요. 아무도 아이들이 몸과 마음이 성숙하기 전 일찍 성관계를 하고, 동의 없는 성관계를 하거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길 바라지 않아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태도를 갖고 건강한 관계를 맺길 바라죠. 해외에선 성공한 성교육 사례가 나와요. 한국에선 이(성교육)를 ‘선정적’ ‘동성애’ 등 프레임을 짜서 막는 거죠.
2018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청소년 성교육 수요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가운데 34.1%는 ‘학교 성교육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51.1%는 ‘학교 밖에서 성지식과 정보를 얻고 있다’고 답했다. 주 경로는 SNS·유튜브 등 인터넷(22.5%)이었다. 온갖 성지식이 인터넷을 통해 아이들에게 흘러들어간다. 그 결과 중 하나가 ‘n번방’ 사건이다. ‘디지털 성범죄’에 무분별하게 노출된 청소년들의 존재가 드러났다. 가해자들은 미성년자 등 여성을 성착취해 만든 영상을 판매·유포했다. 가해자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는 12세였다.
■n번방 사건…터질 게 터진 것
정부, 책 회수부터 하기보다는
어떻게 수업하고 담론 만들어 갈지
논의하고 사회 분위기 이끌었어야
결국 학교·교사 부담으로 남게 돼
- n번방 사건은 참혹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한국 사회 성교육은 실패했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어요.
A교사 = 터질 일이 터졌다고 생각했어요. 학교에선 끊임없이 산발적으로 터져왔던 사건이죠. 누구 사진을 찍어서 단톡방에 몰래 돌리고, 헛소문을 퍼뜨리며, 원격으로 뭘 시키는 행위들이 이어졌어요. 유튜브에 뜬 ‘참교육’ 시리즈엔 잘못한 사람을 응징하고 처벌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보통 힘 있는 남성이 권력을 휘두르고 약자가 당하는 형식이에요. 따로따로 벌어진 일이 다 연결된 게 디지털 성범죄예요. n번방 사건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면서 “학교에 알리겠다”고 한 점이에요. 학교가 한 번도 이런 일들을 제대로 제재한 적이 없어요. 학교에는 디지털 성범죄 관련 가이드라인이 전혀 없어요. 사이버·언어 폭력으로 다룰 수도 있지만, 이것도 학교장 선에서 종결이 가능해요. 불법촬영해서 카카오톡으로 돌려보는 명백한 디지털 성범죄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종결될 수 있는 거죠. 학교 현장엔 가해자를 교육하거나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없어요. 오히려 면죄부를 주는 거죠.
B교사 = 교사들 중엔 n번방 사건을 바라보면서 “피해자들이 왜 일탈계정을 운영했나” “피해자는 왜 그런 행동을 했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요. 취약계층 아이들이 피해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은데, 교사들 시선도 ‘이상한 애인가 봐’라고 바라보는 거죠. 이런 문제들을 두고 사회나 정부기관이 제대로 된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개인에게 미뤄놓기만 하니 너무 지쳐요. ‘나다움 어린이책’ 사건도 마찬가지예요. 정부가 책을 선정해 사업을 했으면, 이 책들로 어떤 수업을 하고 담론을 만들어갈지 나서서 논의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이끌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못하니 각 학교와 교사의 부담으로 돌아가는 거죠.
A교사는 인터뷰 말미에 “첫 번째 사람”을 언급했다. “아이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말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그는 “우리 사회엔 ‘첫 번째 사람’이 없다. 부모에게 말하면 혼나겠지, 교사에게 말하면 나를 이상하게 보겠지. 이런 상황에서 피해가 더 커진다. 어른들이 섹스의 ‘섹’자도 말 못하게 하는데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고 말했다.
“책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요. 그루밍 성범죄에 대해서, 성폭력에 대해서도 책을 통해 더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죠. 성교육을 하기 좋은 하나의 교재들인데, 사용하지 말라면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건가요. 그럼 어떻게 성교육을 하란 말인가요.”
이 질문에 관한 답을 찾으려는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보수 개신교 공격, 방관하는 교육부…학교 성교육 11년째 제자리
“교과서에서 성기 삽화·콘돔 삭제”
6억원 들여 만든 교육부 표준안엔
순결 강조·성소수자 등 빠져 ‘후퇴’
“제가 학교를 다닌 11년, 참 긴 시간입니다. 그동안 저는 키가 50㎝나 크고, 2차 성징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11년 동안의 학교 성교육은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교육이든 그것은 시대에 맞춰서 바뀌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학교 성교육은 계속해서 동그란 트랙을 돌고 있습니다.”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주최로 지난 6월 열린 ‘2020 성평등 문화 만들기 연설 대전’ 영상에 나온 한 청소년 참가자 발언이다.
한국 성교육이 같은 트랙을 뱅뱅 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가족부의 ‘나다움 어린이책’ 회수 사태는 지속된 학교 성교육 후퇴의 연장선에 있다. 보수 개신교 세력이 후퇴와 퇴보의 중심에 섰다.
여성가족부 ‘나다움 어린이책’ 7종을 문제 삼은 곳은 나쁜교육에분노한학부모연합(분학연) 등 보수 개신교 성향 단체들다.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안티페미협회, 바른성문화를위한국민연합(바성연), 우리아이지킴이학부모연대 같은 단체가 들어갔다.
이들은 이전에도 성교육이 포함된 보건교과서 삽화와 내용 삭제를 요구하고 불매운동을 벌였다. 시작은 2007년이다. 그해 학교보건법 개정으로 보건교육이 의무화되면서 2009년 처음 보건교과서를 이용한 보건교육이 시작됐다. 보수단체는 보건교과서를 공격했다.
김대유 경기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극우 종교단체 등이 지속적으로 보건교과서를 제작한 출판사와 저자들을 압박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성기 삽화를 가려라, 콘돔이란 말은 쓰지 말라’고 요구했다. 결국 삽화가 축소되거나 삭제됐다. 전문가들이 원하는 수준의 성교육 자료를 게시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당시 보건교과서 공격에 앞장선 단체 중엔 ‘나다움 어린이책’을 비판한 바성연, 우리아이지킴이학부모연대도 포함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건교과서는 11년 동안 한 차례도 개정되지 못했다. 최근에야 겨우 한 종만 개정됐다. 디지털 성폭력·기후변화와 코로나19 같은 전염병 등 최신 이슈들을 반영했다. 이 교과서도 보수단체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법 개정에 따른 성교육이 공격받는 동안 교육부는 뭘 했을까? 수수방관했다. 김 교수는 “교육부는 문제를 단위학교로 미루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임했다. 그 결과 현재까지 성교육이 위축되거나 지장받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부가 2015년 만든 성교육 표준안 또한 성교육을 둘러싼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2년간 6억원을 들여 만든 성교육 표준안엔 “이성친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남성의 성에 대한 욕망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충동적으로 급격하게 나타난다” 같은 내용이 들어갔다. “데이트 비용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게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원치 않는 데이트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도 썼다. 김 교수는 “표준안을 제작하면서 보수성향 단체와 기독교 단체 위주로 의견을 수렴하고, 내용도 종교적 순결인식을 강요하고 여성에게 불리한 측면으로 서술했다”며 “기존 보건교육에서 시행되는 성교육 내용을 외면하고 후퇴했다”고 지적했다. 여성단체 비판으로 문제가 된 내용 일부는 삭제했지만, 성소수자·자위·성적자기결정권에 관한 내용이 빠졌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초등학교 교사 C씨는 “표준안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할 수 없는 근거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멈춰선 성교육은 빠르게 흐르는 아이들의 시간을 따라잡지 못한다. 질병관리본부의 2019년 ‘청소년건강행태조사’를 보면 성관계 경험을 한 중·고등학생 비율은 해마다 증가한다.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학생은 2017년 5.2%, 2018년 5.7%, 2019년 5.9%였다.
과연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와 같은 사실적 교육은 아이들의 ‘조기성애화’를 불러올까. 연구 결과를 보면 반대다. 유네스코의 ‘국제 성교육 가이드’를 보면 5~12세 아동을 위한 교육 내용으로 “다양한 결혼 방법, 생물학적 성과 젠더의 차이, 성 및 재생산 건강과 관련한 몸의 부분 묘사하기, 성기가 질 속에 사정하는 성관계의 결과로 임신할 수 있음을 알기, 신체적 접촉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방식 설명하기” 등을 제시한다. 유네스코는 2016년 옥스퍼드대학 연구 결과 성교육을 통해 성행위 시작 시기 지연, 성행위 빈도 감소, 성 파트너 수 감소, 피임 증가 등 효과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유럽 여러 나라에선 유아 시절부터 체계적인 성교육을 실시한다. 스웨덴은 만 4세부터 성교육을 시작한다. 스웨덴 10대 임신율은 전 세계 최저 수준이다. 독일에선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는다. 성관계에 대해 숨기는 것 없이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명화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장은 “조기성애화라는 말 자체가 순결주의, 금욕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면서 “성에 대한 갈증과 호기심을 갖고 있는 아이들은 음담패설·음란물이 아니라 진지한 교육 텍스트로 성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인간에 대한 존중과 성평등에 기반한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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