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 19:40최종 업데이트 20.09.05 19:40김종성(qqqkim2000)
▲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비대위원장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
ⓒ 공동취재사진 |
국민의힘으로 개명한 보수 정당의 변신 노력은 지난 2004년 봄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천막 당사'로 상징되는 쇄신 작업을 벌였을 때보다 치열하다. 당시는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려다가 역풍을 당하고 대선 불법자금으로 인해 차떼기 사건이 발생한 뒤였다.
한나라당이 국회 앞 10층 당사를 나와 여의도 공터의 천막당사에 입주한 날은 정확히 2004년 3월 24일이다. 이날 서울의 낮 기온은 제주·강릉·부산보다 3℃ 낮은 13℃였고, 구름도 많고 안개와 비도 있어서 다른 지방에 비해 다소 음산했다.
천막당사 입주식에서 박근혜는 "말이 아닌 실천으로 개혁의 참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국민에게 공약했다. 자서전인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그것은 우리가 부패와의 절연을 선언하고 풍찬노숙의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고 평가했다.
지금 국민의힘은 10층 당사를 나와 천막 당사로 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모험의 길을 걷고 있다. 박근혜는 '부패와의 절연을 선언했다'고 했지만, 그 정도 절연과도 비교도 할 수 없는 험난한 상황이 국민의힘 앞에 놓여 있다. 임시정부 법통을 인정하고 5.18 정신의 계승을 선언하며 사회적 약자 배려 및 경제민주화를 지향하는 정강정책만 봐도, 과거 기억의 상당부분을 지워버리고자 애쓰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1990년 전후 동유럽 공산당의 사례
국민의힘보다 더 절박한 상황에서 당 쇄신을 시도한 정당들이 있다. 1990년을 전후한 동유럽 공산당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공산당의 존립 기반이 극히 취약해진 정치지형 속에서 생존과 활로를 모색했다.
동유럽 정당들은 공산주의를 추구했고,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은 극단적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를 추구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존립기반이 크게 동요해 기존의 지배적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무엇보다 '너희들은 안돼!'라는 국민의 신호를 명확히 수신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동구권 몰락 후로는 이곳에서 공산당이 소멸됐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공산당 계열의 정당들이 있다. 헝가리어 약자가 MSZP인 헝가리사회당(Hungarian Socialist Party)도 그중 하나다.
▲ 헝가리사회당 홈페이지의 영문판. | |
ⓒ 헝가리사회당 |
헝가리의 조상인 훈족은 중국 한나라의 압박정책에 밀려 몽골초원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흉노족과 동일하다는 역사학계의 학설이 있다. 이 훈족의 이동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낳고 유럽문명의 원형을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훈족의 후예인 헝가리는 또 다른 면에서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동유럽 공산권의 몰락과 미소 냉전체제의 와해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13명의 유럽 고교 교사 및 대학 교수들이 쓴 <새 유럽의 역사>는 1980년대 후반부터 확산된 세계적 탈냉전 속에서 일어난 헝가리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미 경제 자유화의 선두주자로 나와 있던 헝가리인들이 최초로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1988년 5월,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56년 이래 국가원수 자리를 지켜온 야노슈 카다르의 축출을 결의했다. 이듬해 초부터는 소련에 의한 탄압의 피해자들이 복권되었으며, 40년 넘게 유지된 일당 독재가 막을 내리고 복수정당제가 부활했다.<br /><br />이어서 헝가리 지도부가 내린 상징적인 결단은 유럽 전역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을 가로지르는 철조망을 절단하고 그럼으로써 철의 장막을 뚫는 돌파구를 연 것이다."
▲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 |
ⓒ 구글 지도 |
베를린장벽 붕괴는 1989년 11월 9일 있었다. 헝가리 정세는 이 사건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동독보다도 먼저 공산당이 약해진 헝가리에서, 김종인과 국민의힘처럼 당의 쇄신을 도모하는 그룹이 있었다. 헝가리 공산당인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개혁파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1989년 10월 헝가리사회당을 창당했다. 이 당은 자본주의 당이 아니라 여전히 공산주의 색채를 띤 정당이었다. 당명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산당 경력이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전 이름과 비슷한 당명을 갖고 활로를 모색했으므로, 이들이 처한 난관은 국민의힘이 처한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자산 90% 사회 환원... 처절한 생존전략
하지만 헝가리사회당의 도전은 결국 성공했다. 그동안 부침이 있긴 했지만, 이들은 소련도 몰락하고 동구 공산권도 몰락한 세상에서 지난 30년간 유력 정당 지위를 유지해왔다. 이들의 쇄신 작업이 성공한 비결과 관련해, 2013년에 명지대 미래정치연구소가 발행한 <미래정치연구> 제3권 제1호에 실린 정치학자 박경미의 '탈공산화 이후 공산당 계승정당의 생존전략'은 이들의 전략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 번째 전략은 공산당의 법적 정통성을 계승하되 차별화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왔지만 그곳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이들은 정강정책을 사회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수정하고 좌파가 아닌 중도좌파의 노선을 표방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은 정치인들을 대체로 불신한다. 과거와의 차별을 선언하고 이념을 수정하면 당이 어느 정도는 바뀌겠지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문서나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대중은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헝가리사회당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어떻게 했는지,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공산당이 보유하였던 자산을 버림으로써 공산당과 실질적인 거리두기를 실현하는 방식을 꼽을 수 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다는 명분에서 공산당을 잇는다는 법적 연속성은 유지한다고 하였지만, 1990년 초까지 공산당 자산의 90%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여 실질적인 단절을 추진하였다."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둘 수는 없지만, 자기 재산을 무언가에 사용하는 것은 진심을 명확히 보여주는 방법 중 하나다. 공산당 때 확보한 재산의 90% 이상을 환원하는 조치는 헝가리사회당의 진심을 보여주는 첩경이 됐다. "이는 MSZP가 초기에 대중적 인기를 얻게 한 중요한 요인"이라고 위 논문은 평가한다.
2004년 3월 24일 한나라당과 박근혜는 10층짜리 당사를 나와 천막당사로 들어갔다. 헝가리사회당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재산을 거의 다 버리고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당 쇄신의 격이 달랐던 것이다.
헝가리사회당의 두 번째 전략은 체질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산당의 조직 원리인 민주집중제에 연연하지 않았다. 당 간부나 기관들을 상향식으로 선거하되 하부가 상부에 복종하는 민주집중제에 집착하지 않고, 지방 지부에 정책결정권과 공직선거 후보자 선출권 등을 나눠줬다. 당비 액수도 지방 지부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 이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당에 애착을 갖도록 하고 그들에 의해 당이 살아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헝가리사회당은 재산을 내놓고 권한을 이양하는 과감한 전략을 구사하면서도 지지 계층을 고를 때만큼은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이전에 거리를 뒀던 그룹을 상대로 '앞으로는 우리가 책임질 테니 지지해달라'며 접근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핵심은 외형 아닌 '내면 혁신'에 있다
▲ 3일 오전 국민의힘 관계자가 국회 당 대회의실 백드롭을 교체하고 있다. 미래통합당은 지난 2일 "국민의 힘"으로 당명을 교체했다. 당명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힘, 국민을 위해 행사하는 힘,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힘을 함축한 것이라는 것이 당의 설명이다. 2020.9.3 | |
ⓒ 연합뉴스 |
헝가리사회당의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맺었다. 1990년 의회 선거에서는 10.9% 득표율로 386석 중 33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4년 뒤에는 33.0%로 209석을 차지해 제1당에 올랐다. 1998년에는 28.2%, 2002년에는 42.0%, 2006년에는 43.2%, 2010년에는 19.3%, 2014년에는 25.7%, 2018년에는 12.3%를 기록했다. 2010년부터는 세가 약해졌지만 동구권 몰락 후로도 오랫동안 상당한 득표율을 올렸던 것이다. 공산당의 법통을 승계하면서도 이런 생존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동구 공산권 몰락 뒤의 공산당 후예정당은 '몰락한 부잣집 자녀' 같은 존재였다. 공산당 일당독재 하에서 그들은 형식적 선거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공산권 몰락 뒤에는 수많은 정당들이 난립하는 속에서 일종의 자유경쟁을 벌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헝가리사회당이 유력 정당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가진 것에 집착하지 않고 체질을 전면 개선하면서, 가까워지기 쉬운 유권자들에게 집중 구애를 벌인 데 있다. 헝가리사회당은 이전의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과 당명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당명을 확 바꾸지 않고도 생존에 성공한 것은 외형적 혁신보다 내면적 혁신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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