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국립대전현충원 소방공무원 묘역. 이날 소방관으로는 122번째 국립묘지에 묻힌 고(故) 양언 소방위 안장식에서 전북 군산소방서 정은애 금동 119안전센터장이 추도사를 읽어 내려갔다.
“안장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선배님과 한 산모의 가슴 뭉클한 사연을 접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 과연 우리의 역할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32년 전 발생했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의 모든 결정과 책임이 국민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잊지 않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32년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88년 3월2일 새벽 0시30분, 전북 익산시 시골마을에 살던 산모 김미현씨(당시 29세)에게 진통이 시작됐다. 자가용이 없던 가족은 급히 택시를 수소문했지만 늦은 시간인 데다 외진 곳이어서 차를 구하지 못했다. 상황이 급해지자 119에 도움을 요청했다.
구급차를 몰고 달려온 이는 양언 소방관(당시 36세)이었다. 구급차는 평소 산모가 다니던 인근 산부인과로 향했다. 병원에서는 “산모의 상태가 위급하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쌍둥이 중 한 아이의 다리가 몸 밖으로 나오다 걸려 산모와 태아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급히 차를 대학병원으로 돌린 양 소방관은 이송 중에 응급조치를 취하면서 현 상태를 병원에 타전했다. 그러면서도 산모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두 손을 꼭 잡아주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응급실에 도착한 산모는 산고 끝에 무사히 쌍둥이 자매를 낳았다. 양 소방관은 동이 터 오는데도 한동안 응급실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산모와 쌍둥이가 건강하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자리를 떴다.
이런 사연이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22년 뒤였다. 산모 김씨가 “천사 같은 소방관님을 꼭 찾고 싶다”면서 2010년 익산소방서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김씨는 편지에 “처음부터 출산 때까지 모든 상황을 끝까지 지켜준 당시 구급대원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면서 “시간은 수십년이 흘렀지만 두 딸이 반듯하게 컸으니 이제라도 은혜를 갚고 싶은 심경을 헤아려 달라”고 부탁했다.
익산소방서는 당시 구급대원으로 활동했던 소방공무원과 대학병원 관계자들을 상대로 수소문했다. 마침내 미담의 주인공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는 하늘나라에 가 있었다. 산모를 구해낸 10년 뒤인 지난 1998년 구급출동 중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와 아들(현재 소방관)을 두고 순직한 양언 소방위가 그였다.
소식을 접한 김씨는 망연자실했다. 그는 익산소방서 모든 소방대원들에게 양말과 떡, 과일 등을 전달하며 “22년 동안 그때 일을 한번도 잊지 못하다가 신원을 확인했는데 고인이 되셨다는 말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군산소방서는 김씨에게 그동안 일반묘지에 묻혀 있던 양 소방위가 국민소방영웅으로 추서돼 국립묘지에 안장된다는 소식을 맨 먼저 전했다. 김씨 모녀는 뛸 듯 기뻤다. 이날 열린 안장식에 김씨는 물론 간호사와 언어치료사가 돼 사회봉사를 실천 중인 두 딸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안장식을 손꼽아 기다려온 모녀는 갑자기 집안에 사고가 생기는 바람에 달려오지 못했다. 모녀는 “함께하지 못해 너무 서운하다. 따로 시간을 내 대전현충원을 참배할 예정이니 묘지번호를 알려달라”는 문자를 군산소방서에 보내왔다.
김씨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그날 그 자리에서 죽는 줄로만 알았던 쌍둥이 두 딸은 소방관께서 베풀어주신 큰 사랑을 갚아 나가고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서 “아이들이 커갈 때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며 그분이 베풀어주신 큰 뜻을 잊지 말고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삶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라고 당부해왔고, 두 딸이 잘 따라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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