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명스님과의 밤샘 토론
» 12월 28일 경북 문경 봉암사에서 거행된 적명 스님 다비식
“눈은 가로로 놓여있고 코는 세로로 놓여있다” ㅡ 안횡비직(眼橫鼻直)
일본 조동종의 개조 도원 선사(1200~1253)는 깨달음의 경지를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의미일까? 말과 글은 발화되고 난 이후 각자의 해석에 있으니 나름대로 헤아려 볼 일이다. 후학들은 이 구절을, 삶의 진실과 환희는 일상을 떠나서 있지 않다고 받아들인다. 이 안횡비직의 구절이 들어있는 게송 전체를 보면 수긍이 간다. 한번 살펴보자.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다리는 땅을 딛고 있으며 정천각지(頂天脚地)
눈은 가로로 놓여있고 코는 세로로 붙어있고 안횡비직(眼橫鼻直)
밥이 오면 입을 벌리고 반래개구(飯來開口)
잠이 오면 눈을 감는다 수래합안(睡來合眼)
그렇다. 깨달음이란 지금, 여기, 나를 떠나 별도의 세계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별스러운 것도, 별스러운 짓도 아니다. 내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는 무언가를 벗겨내고 사물을 보는 일이다. 탐욕과 집착의 사슬을 훌훌 끊어내고 그저 보고, 듣고, 일하고, 사랑하고, 노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가 삶의 방향을 이렇게 말했는가. 머리는 하늘에, 다리는 땅에 있어야 한다고. 또 선사는 삶의 자유와 질서를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이라고 말했다. 늘 보고 듣는 것들이 늘 새삼스러운 모습으로 내게 오는 것, 이것이 깨달음과 환희장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성공이라는 속도에 눈이 멀어 방향을 잃고, 온갖 근심 걱정으로 밥맛과 잠맛을 모르고 있다.
» 2019년 12월24일 입적한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
안횡비직! 평범 속에 비범을 생각할 때 떠오른 분이 있다. 적명 스님이다. 겸손하면서 당당하고, 논리적이면서 직관적이며, 소박하면서 빛나는 분이 적명 스님이다. 그 적명 스님이 세수 80세로 12월 24일 사바의 인연을 접었다. 스님은 그 흔한 방장이니 조실이니 하는 그런 직책이 주는 권위로 사신 분이 아니었다. 또 그런 권위로 선승들의 믿음과 존경을 받은 분이 아니었다. 그저 수행자 적명으로 권위를 인정받으신 분이다.
적명 스님은 20세에 전남 나주에 있는 다보사에서 출가했다. 은사는 천진도인이라고 존경받는 우화 스님이다. 필자도 소년 사미승 시절 은사 스님을 모시고 다보사에 들러 적명 스님의 은사이신 우화 스님을 뵌 적이 있다. 존재 자체로 사람을 편하고 즐겁게 해주시는 분이었다.
적명 스님의 속가 인연은 불가에도 그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스님의 조부는 출가 사문이었다. 조부는 제주도에서 석성(石惺) 김석윤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석윤 스님은 1894년 전주 위봉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항일투쟁으로 1909년에 1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그런데 적명 스님은 조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고 한다.
»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세계적인 명상가 아잔브람을 반갑게 맞이한 적명 스님의 생전 모습. 한국 간화선 선승들의 상당수가 남방불교와 티베트불교 등의 다른 불교수행 전통에 대해 배타적인데 비해 적명 스님은 열린 자세로 대하며 절차탁마의 자세를 보였고, 이날 아잔브람과 공개토론에 응했다.
필자는 적명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지는 못했다. 다만 온몸으로 감동받은 한 번의 만남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아마 2012년 가을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조계종 승려의 교육 행정을 담당하는 조계종 교육원 교육부장의 소임을 맡고 있었다. 여름 3개월 선수행 안거가 끝난 어느 날, 교육원장 현응스님이 공부모임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을 모시고 몇몇 스님들과 어떤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자리라고 했다. “뭐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하는데 남는 시간에 공부하지요”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그때 내심 바라는 것이 있었다. 참여하는 다른 스님들도 뵙고 싶지만 무엇보다도 적명 스님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스님의 인품도 느껴보고 싶었고, 특히 불립문자 가풍의 선승이면서도 대화와 토론을 무제한으로 즐겨하신다는 점이 끌렸다. 한때 적명 스님은 토굴에서 도법 스님과 밤을 세워가며 무려 13시간을 법을 토론했다고 하는 지인의 증언이 늘 머리에 남아있었다. 때로 선승들은, 특히 조실의 위치에 있는 분들은 합리적인 대화와 깊은 토론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늘 아쉽고 마음 한구석에 미덥지 못한 부분이다.
하늘은 맑고 볕은 고운 날, 서울 성북동 전등사에 수도승(서울 거주하는 스님)과 산승들이 모였다.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 실상사 회주 도법 스님, 교육원장 현응 스님, 전등사 주지 동명 스님, 선운사 초기불전승가대학원장 재연 스님,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 스님, 그리고 필자가 모였다.
» 12월 28일 경북 문경 봉암사에서 거행된 적명 스님 영결식
간단한 점심공양을 마치고 차 한 잔 곁들이며 공부를 시작했다. 그날 공부는 누가 발제를 하고 토론하는 그런 약속도 없었다. 그저 모여서 평소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 서로에게 묻고 싶은 말을 중구난방으로, 횡설수설하면서, 그야말로 야단법석을 펼치고자 했다. 모두가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적명 스님께서 몇 권의 책과 문서를 꺼냈다. “저, 오늘 공부는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대중의 시선이 스님께 쏠렸다. “다름이 아니라 그동안 제가 여기 계신 각묵 스님이 번역하신 <청정도론>을 탐독했습니다. 오늘 각묵 스님을 직접 뵈니 참 반갑습니다. 그리고 각묵 스님, 스님이 번역하신 산스크리스트 본 <금강경> 읽고 내가 그동안 석연하지 않았던 부분이 많이 풀렸습니다. 고마운 말씀 이 자리에서 전합니다.”
적명 스님의 돌연한 발언에 누구보다도 각묵 스님이 놀랐다. “아이고, 스님 그저 부끄럽습니다. 큰스님이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각묵 스님이 적명 스님보다 세납과 법납이 20년 정도 아래다. 절집 서열로 스승벌이다. 더구나 선원의 권위가 서슬 푸른 조계종의 풍토에서 큰 어른이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제자벌인 각묵 스님에게 진심으로 몸을 숙여 고마움을 전한 것이다.
각묵 스님은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는 역경승이다. 흔히 말하는 해인사 장경각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라 일컬어지는, 한문으로 된 고려대장경은 이미 한글로 번역되었다. 각묵 스님은 인도말, 즉 빨리어 본의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다. 한역으로는 <아함>이라고 부르고 빨리 어로는 <니까야>라 부르는 방대한 분량을 번역하였다. 그 중에 적명 스님이 탐독했다는 <청정도론>도 도반 대림 스님과 함께 우리말로 옮겼다. <청정도론>은 5세기 경에 인도의 붓다고사 스님이 저술한 남방불교의 경율론 삼장에 대한 해설서이자 수행의 지침서이다. 붓다고사 스님은 우리의 원효대사에 필적하는 분이다. 번역된 <청정도론>은 3권이고 천오백 쪽 분량이다.
“각묵 스님, 실은 제가 스님과 대림 스님이 번역한 <청정도론>을 정밀하게 거듭 읽었습니다. 읽고 나니 수행하면서 평소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이 풀리고, 석연하지 않은 점도 확연해졌습니다. 제가 책의 주요 핵심 내용을 나름대로 간추려 정리했습니다.” 적명 스님은 그날 참석한 공부 대중들에게 간추린 내용을 나누어주었다. 분량은 아마 50쪽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500쪽의 내용을 그렇게 요약한 것이다. 옆에서 책을 보니 형광펜으로 밑줄이 곳곳에 그어져 있고 포스트 잇도 수없이 붙어 있었다. 모두가 내심 놀랐다. 연배도 높으신 분이, 선수행자를 지도하는 봉암사의 수좌 스님이, 북방불교의 간화선 수행을 하는 어른이, 우리와는 사뭇 풍토가 다른 남방불교의 논서를 정독하고 요약하여 오신 것이다. 아마 세속의 분들은 절집안의 흐름과 분위기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놀람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 지난 12월 28일 경북 문경 봉암사 영결식장에서 다비식장으로 적명 스님 법구를 운구하는 행렬
이어 적명 스님이 각묵 스님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제가 <청정도론>을 읽어가면서 북방의 간화선과 남방의 위빠사나 선수행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몇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각묵 스님께서 내가 공통점이라고 말한 부분이 맞는지를 말해주십시오. 그리고 차이점에 대해서도 스님 나름대로 견해를 말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적명 스님의 요청에 각묵 스님은 훗날 내게 말했다. “그때 정말 놀랐고, 송구스러웠고, 기뻤고, 감격했다”고.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또 그 자리에서 누가 그렇게 느끼지 않았겠는가? 여하튼 공부거리를 착실히(?) 준비해 오신 스님 덕분에 대중들은 그날, 밤을 세워가며 진지한 경청과, 날카로운 질문과, 성실한 답변을 주고받았다. 수행승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고요한 침묵’과 ‘의미 있는 대화’라는 붓다의 말씀을 실감하는 환희로운 법석이었다.
적명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새삼 ‘배움’에 대해 생각한다. 배운다는 것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일깨움일 것이다. 그러나 일깨움 이전에 배움에 대한 마음가짐과 태도일 것이다. 자신의 향상을 위하여 누구에게나 물을 수 있는 마음가짐, 설령 그 대상이 아랫사람이라 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물을 수 있는 그 마음[不恥下問], 그 마음씀이 수행의 결실이고 경지가 아니겠는가. 예전에 절집의 대 강사들은 제자의 공부가 무르익으면 자리를 바꿨다. 제자가 강단에 올라가 강의하고 스승이 밑에서 듣고 물었다. 허튼 권위와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경지에서 나올 수 있는 태도다.
그 해 가을날의 적명 스님에 대한 기억은 더 뚜렷하다. 하심과 배움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멀리 가는 향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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