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정치시평] 의회지형을 바꿔야 정치가 살아난다
2020.01.05 11:23:20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일까. All's well, that ends well. 독일어 표현도 있다. Ende gut, alles gut. 끝이 긍정적이면 이전에 벌어졌던 부정적인 것들이 묻혀버려 별 것 아닌 것처럼 기억된다. 아무리 고통과 실망의 연속이었어도 마지막 순간이 좋았다면 이전의 나쁜 경험은 기억에서 사라진다. 결말이 그동안의 과정에서 겪었던 온갖 시련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하고 기억의 저 편으로 밀어내기 때문에 끝이 좋으면 다 좋았던 것처럼 느낀다. 아직 임기는 남아있지만 20대 국회가 그랬다. 식물국회라는 말도 모자라 동물국회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국회였다. 폭력과 고함으로 서로 충돌하는 국회, 극기야 '노루발못뽑이'와 '장도리'까지 등장한 국회였다.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사각의 링 같았다.
그런 '막장 국회'가 마지막에 뭔가 해냈다. 최악의 국회로 마무리될 것 같은 절박한 순간에 한두 건 했다. 2019년 연말 임기 만료를 몇 달 앞두고, 실망한 국민을 위로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없는 것보다 나은 개혁입법을 이뤄냈다. 무소불위 검찰의 기소독점을 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과 준연동형 비례제 도입과 만 18세 투표권 부여 등을 주요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늦기는 했어도 기다리다 목마른 촛불시민의 개혁 갈증에 한줄기 소낙비 같았다.
그렇다고 끝이 좋으니 다 좋은 것일까. 사람은 '경험 따로, 기억 따로'인 불합리한 존재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전체적이 아니라 단편적이고 분절적이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경험했어도 마지막 결말이 좋았다면 그동안 겪었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조금은 걱정이다. 국민들이 20대 국회의 긍정적 끝만 기억할까봐 그렇다. 국회는 임기 내내 무기력했고 무능력했다. 한국정치의 후진성과 정치의 실종을 그대로 드러냈다. 의회정치가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고 양 갈래도 모자라 국민을 사분오열시켰다. 그래서 정치혐오와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그러다가 끝이 조금 좋았던 것이다. 그 순간의 긍정이 부정적 전체를 뒤집어 놓을까 두렵다. 절망을 안기고 기대를 저버린 국회의원들을 다 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끝이 조금 좋았다고 바뀌어 버릴까, 국회 문 닫으라던 아우성이 잊힐까 조바심이 난다. 20대 국회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21대 총선에 그들을 다시 소환할까봐 불안하다. 거대 양당은 대선전초전 격인 4월 총선에서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며 사생결단으로 싸울 것이다. 총선을 차기 대선의 바로미터로 여기기 때문이다. 다수당이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와 비난으로 자기 진영의 지지자들을 동원하고 결집하려 할 것이다. 총선에 출마하는 대선주자들은 정치생명이 달려 있으므로 더욱 그럴 거다. 기득권 정치의 구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지도자의 새해인사에 흔히 등장하는 말이'나라의 명운이 걸린 해'다. 2020년이 나라의 명운 운운할 정도는 아니지만 중요한 해임은 틀림없다. 어쩌면 한국 정치의 전환점이 될 21대 총선이 치러지는 해이기 때문이다. 선거법 개정으로 30년 넘은 낡은 기득권정치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새로운 선거제도로 정치에 지각변동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여야 정치권은 긴장하고 있다. 그 변화의 열쇠는 국민의 손이다. 최악이라는 오명을 얻은 20대 국회 4년을 온전히 기억하고 평가하는 선거여야 한다. 임기 마지막 몇 개 개혁입법 통과의 기뻤던 순간만 단편적으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 대결과 갈등으로 진영정치를 고착화시킨 책임을 물어야 한다. 변화된 선거제도로 20대 국회 내내 이어져 온 거대 양당 중심의 극단의 정치를 허물어야 한다. 정당집단주의가 지배하는 정치판을 깨야 한다. 아주 미흡하지만 그 도구가 유권자의 손에 쥐어졌다. 대표성을 왜곡하는 승자독식의 불합리한 선거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균열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연동률 50%에 연동률 적용 의석을 30석으로 제한했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소수 정당의 의회진출이 가능해졌다. 물론 유권자의 선택에 달려 있지만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지역주의에 양당제에서 세대․성별․계층의 다변화를 담은 다당제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다당제 민주주의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기존 정치체제에서 소외되고 차별받아온 소수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도 담아내고 다수 국민을 제대로 대변하는 민의의 전당을 만들 수 있는 디딤돌이 놓인 것이다. 민심 그대로의 국회, 여성․청년․노동자․농민 등 다양한 국민 구성의 축소판이어야 할 국회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승자독식의 폐해인 과소대표나 과잉대표가 점차 사라지고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국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선거연령도 18세로 낮아졌다. 청년세대가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적극적 정치참여로 민주주의가 성숙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령화 사회에서 젊은 유권자의 유입으로 국민의 의사가 폭넓게 반영될 수 있게 되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정치개혁의 시금석이다. 변화의 초석을 놓는 선거여야 한다. 어렵사리 개정된 선거법의 취지를 살리는 선거여야 한다. 시작은 미미하더라도 민의를 반영하는 다당제 의회지형을 만들어내야 포용과 연대, 협치의 정치가 살아난다. 지역주의에 기댄 거대 양당이 좌지우지하는 국회를 재현시킨다면 희망은 사라진다. 깨어있는 유권자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민심 그대로의 국회는 촛불시민의 요청이다. 적대정치가 아니라 공생정치 속에서 선거제도 개혁, 정치개혁도 완성될 수 있다. 21대 국회가 그 시작이다. 그래서 2020년 총선이 중요하다. 유권자의 힘으로 싹 다 갈아엎고 재개발해야 한다. 4월 총선이 기대되는 이유다.
그런 '막장 국회'가 마지막에 뭔가 해냈다. 최악의 국회로 마무리될 것 같은 절박한 순간에 한두 건 했다. 2019년 연말 임기 만료를 몇 달 앞두고, 실망한 국민을 위로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없는 것보다 나은 개혁입법을 이뤄냈다. 무소불위 검찰의 기소독점을 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과 준연동형 비례제 도입과 만 18세 투표권 부여 등을 주요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늦기는 했어도 기다리다 목마른 촛불시민의 개혁 갈증에 한줄기 소낙비 같았다.
그렇다고 끝이 좋으니 다 좋은 것일까. 사람은 '경험 따로, 기억 따로'인 불합리한 존재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전체적이 아니라 단편적이고 분절적이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경험했어도 마지막 결말이 좋았다면 그동안 겪었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조금은 걱정이다. 국민들이 20대 국회의 긍정적 끝만 기억할까봐 그렇다. 국회는 임기 내내 무기력했고 무능력했다. 한국정치의 후진성과 정치의 실종을 그대로 드러냈다. 의회정치가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고 양 갈래도 모자라 국민을 사분오열시켰다. 그래서 정치혐오와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그러다가 끝이 조금 좋았던 것이다. 그 순간의 긍정이 부정적 전체를 뒤집어 놓을까 두렵다. 절망을 안기고 기대를 저버린 국회의원들을 다 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끝이 조금 좋았다고 바뀌어 버릴까, 국회 문 닫으라던 아우성이 잊힐까 조바심이 난다. 20대 국회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21대 총선에 그들을 다시 소환할까봐 불안하다. 거대 양당은 대선전초전 격인 4월 총선에서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며 사생결단으로 싸울 것이다. 총선을 차기 대선의 바로미터로 여기기 때문이다. 다수당이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와 비난으로 자기 진영의 지지자들을 동원하고 결집하려 할 것이다. 총선에 출마하는 대선주자들은 정치생명이 달려 있으므로 더욱 그럴 거다. 기득권 정치의 구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지도자의 새해인사에 흔히 등장하는 말이'나라의 명운이 걸린 해'다. 2020년이 나라의 명운 운운할 정도는 아니지만 중요한 해임은 틀림없다. 어쩌면 한국 정치의 전환점이 될 21대 총선이 치러지는 해이기 때문이다. 선거법 개정으로 30년 넘은 낡은 기득권정치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새로운 선거제도로 정치에 지각변동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여야 정치권은 긴장하고 있다. 그 변화의 열쇠는 국민의 손이다. 최악이라는 오명을 얻은 20대 국회 4년을 온전히 기억하고 평가하는 선거여야 한다. 임기 마지막 몇 개 개혁입법 통과의 기뻤던 순간만 단편적으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 대결과 갈등으로 진영정치를 고착화시킨 책임을 물어야 한다. 변화된 선거제도로 20대 국회 내내 이어져 온 거대 양당 중심의 극단의 정치를 허물어야 한다. 정당집단주의가 지배하는 정치판을 깨야 한다. 아주 미흡하지만 그 도구가 유권자의 손에 쥐어졌다. 대표성을 왜곡하는 승자독식의 불합리한 선거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균열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연동률 50%에 연동률 적용 의석을 30석으로 제한했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소수 정당의 의회진출이 가능해졌다. 물론 유권자의 선택에 달려 있지만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지역주의에 양당제에서 세대․성별․계층의 다변화를 담은 다당제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다당제 민주주의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기존 정치체제에서 소외되고 차별받아온 소수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도 담아내고 다수 국민을 제대로 대변하는 민의의 전당을 만들 수 있는 디딤돌이 놓인 것이다. 민심 그대로의 국회, 여성․청년․노동자․농민 등 다양한 국민 구성의 축소판이어야 할 국회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승자독식의 폐해인 과소대표나 과잉대표가 점차 사라지고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국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선거연령도 18세로 낮아졌다. 청년세대가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적극적 정치참여로 민주주의가 성숙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령화 사회에서 젊은 유권자의 유입으로 국민의 의사가 폭넓게 반영될 수 있게 되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정치개혁의 시금석이다. 변화의 초석을 놓는 선거여야 한다. 어렵사리 개정된 선거법의 취지를 살리는 선거여야 한다. 시작은 미미하더라도 민의를 반영하는 다당제 의회지형을 만들어내야 포용과 연대, 협치의 정치가 살아난다. 지역주의에 기댄 거대 양당이 좌지우지하는 국회를 재현시킨다면 희망은 사라진다. 깨어있는 유권자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민심 그대로의 국회는 촛불시민의 요청이다. 적대정치가 아니라 공생정치 속에서 선거제도 개혁, 정치개혁도 완성될 수 있다. 21대 국회가 그 시작이다. 그래서 2020년 총선이 중요하다. 유권자의 힘으로 싹 다 갈아엎고 재개발해야 한다. 4월 총선이 기대되는 이유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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