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대(왼쪽)·고영한 전 대법관. <한겨레> 자료사진
법원이 7일 새벽 직권남용 등 혐의를 받는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구체적 물증과 현직 법관들의 진술이 담긴 A4 158쪽, 108쪽에 달하는 영장 속 범죄사실보다, 두 전직 최고 법관의 ‘죄가 안 되거나 약하다’는 주장에 법원이 좀 더 무게를 둔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으로 올라가는 수사 길목이 차단당하면서 검찰의 양 전 대법원장 소환 조사 일정에도 차질이 예상된다.
앞서 두 사람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됐던 것과도 형평이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거셀 전망이다. 임 전 차장 구속영장에는 직속상관인 두 전직 대법관이 ‘공범’으로 적시돼 있다. 이 때문에 법원이 ‘사법사상 초유 전직 대법관 구속’이 미칠 내부 파장을 먼저 고려해 ‘제 식구 감싸기’에 나섰다는 후폭풍이 불가피하다. ‘방탄판사단’ 논란이 재연되며 특별재판부 구성 요구도 다시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전날 박 전 대법관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숙고에 들어갔던 임민성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7일 0시37분께 “범죄 혐의 중 상당 부분에 관해 피의자의 공모관계의 성립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또 이미 다수의 증거자료가 수집되어 있고, 현재까지 수사경과 등에 비춰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같은 시간 고 전 대법관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진행한 이 법원의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도 “범행에서 피의자의 관여 정도 및 행태, 일부 범죄사실에 있어서 공모 여부에 대한 소명 정도, 주거지 압수수색 등 광범위한 증거수집이 이루어진 점” 등, 박 전 대법관 기각 사유와 동일한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영장심사 결과를 기다리던 두 전직 대법관은 바로 풀려났다.
대법관이 겸직하는 법원행정처장을 잇달아 맡았던 두 전직 대법관은 전날 영장심사에서 “정당한 지시였다” “죄가 되지 않는다”며 혐의를 적극적으로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사법행정의 영역을 범죄로 몰아가고 있으며, 일부 부적절한 내용이 있더라도 실무선에서 벌어진 일이라 자신들은 모른다는 취지다. 특히 고 전 대법관은 ‘다른 사람보다 죄가 약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통해 불구속 재판을 받게 해달라는 ‘차별화’ 전략을 썼다고 한다. 그는 영장심사에서 “나는 청와대와의 (재판) 거래는 없어서 상대적으로 (죄가) 약한 거 아니냐”고 항변했는데, 이는 2014년 10월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직접 만나 일제 강제노역 사건 재판 지연 등을 논의했던 박 전 대법관의 혐의와 자신의 행위는 가벌성을 다르게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박 전 대법관의 영장심사에선 그가 2015년 4월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이완구 국무총리의 낙마로 공석이 된 총리직을 제안받은 사실을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검찰이 이를 ‘박근혜 정부와의 유착’ 증거로 먼저 제시하자, 박 전 대법관은 “거절하지 않았느냐”며 재판 거래는 없었다고 거듭 주장했다고 한다.
지난 3일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영장 발부를 자신했던 검찰은 “영장 기각은 재판 독립을 훼손한 반헌법적 중범죄의 전모 규명을 막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영장 재청구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검찰은 영장심사에서 “업무상 상하·지시관계에 따른 범죄”라며, 앞서 법원이 구속을 허가한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에게 적용된 범죄 혐의가 당시 상급자였던 두 행정처장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강조했다. 구속기소된 임 전 차장보다 범죄 실행에 더 큰 결정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구속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행정처에서 작성된 문건들, 재판 개입 및 사법행정권 남용의 윗선으로 두 사람을 지목한 전·현직 법관의 진술 등 구체적 증거도 제시했다.
법원이 사법농단 수사 전체를 떠받치는 이런 증거에도 불구하고 두 전직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양 전 대법원장을 피의자로 소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보강수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재판 개입과 법관 사찰 등이 ‘양승태→박병대·고영한→임종헌’으로 내려가는 지시·승인을 통해 이뤄졌다는 수사 구도를 그리고 있다. 이를 입증할 증거도 다수 확보된 상태라고 한다.
이 때문에 법원이 ‘전직 대법관 구속’이 미칠 내부 파장을 우선 고려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두 사람의 범죄혐의가 워낙 광범위한데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직접 연결되는 혐의도 상당수다. 두 사람이 구속될 경우 국회의 법관 탄핵소추 논의에도 힘이 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결정은 지난 6개월 검찰 수사를 ‘원점’으로 되돌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우리 김양진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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