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성공한 '개혁'이 가져온 사고
지난 12월 8일 토요일, 휴일 이른 아침 여행에 나선 198명의 승객을 태운 강릉발 서울행 KTX 고속열차가 출발 5분여 만에 탈선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탈선한 열차의 앞쪽 2량은 진행방향에서 90도로 꺾어진 채 기울었고 나머지 8량은 선로를 이탈해 기운 상태로 멈춰 섰다. 천만 다행스러운 것은 열차 탈선 같은 큰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인명피해는 경상 16명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이번 사고의 원인은 국토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의 조사로 밝혀지겠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직접적인 사고의 원인은 선로전환기의 상태를 나타내주는 회선 연결이 잘못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철도에서 연이어 사고, 그 이유는?
최근 오송역 전차선 끊김으로 인한 운행중단 사태 등 철도사고가 이어져서 시민들의 불안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인 철도에서 갑자기 사고가 연이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대 철도 사고는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래 동안 문제가 쌓이다 임계점을 넘는 순간 발생한다. 한국사회가 이번 사고로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임계점에 다다르기까지 쌓여온 문제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톺아봐야 한다.
철도안전을 위해서는 2중 3중의 페일세이프 시스템이 가동되어야 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피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존재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크로스 체크 시스템으로 인간의 오류를 시스템이 보완하고 시스템의 오류는 인간이 바로 잡아 주는 방식이다. 기관사가 의식을 잃을 경우 운전실에는 경보장치가 작동하고 기관사가 반응하지 않으면 자동 정차한다. 반면 신호상태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기관사가 시계운전을 통해 안전을 확보한다. 그러나 이같은 크로스 체킹 방식도 시속 300킬로미터가 넘는 고속철도시대에는 완벽한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번 강릉사고도 정상신호를 본 기관사는 아무 의심 없이 운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잘못 연결된 회선이 정상신호를 보낸 것은 설비 단계의 문제였기 때문에 운행선상에서의 크로스 체크 체계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이번 강릉 탈선 사고에서 일부 언론이 제기하듯 누군가가 신호보안장치를 열어서 회선을 바꿔 연결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다. 모듈화된 채 밀봉된 신호 장치를 허가 없이 열고 또 복잡한 결선을 고의든 실수든 바꿔 연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설비의 문제냐 운영의 문제인가로 부딪힌다. 설사 철도시설공단의 설비단계에서 실수가 있었더라도 운영책임을 맡은 철도공사는 무엇을 했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철도공사 입장에서는 완제품을 납품 받았는데 오류의 가능성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발생한다. 새로 산 휴대폰이 혹시라도 문제가 있는지 분해해보는 사용자는 없기 때문이다.
효율화가 만든 구조적 문제
안전의 핵심은 책임의 일원화와 위험의 분산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철도 정책은 책임의 분산이었다. 철도의 특성은 다른 교통수단과 달리 교통로와 차량이 일체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철도가 등장한 이래 수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철도는 철도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시설과 운영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효율화를 명목으로 철도의 근본적 특성을 저해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는데 이 구조가 발생시킬 문제를 해소할 대안은 마련되지 못했다. 더 나아가 철도시설공단과 철도공사는 이해관계에 따라 사사건건 대립을 일삼으며 반목한지 오래됐다. 한국철도를 책임질 컨트롤 타워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토부가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맡아야 하나 그런 의지나 역량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국토부의 철도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는 여러 부서를 순환하는 과정에서 거쳐 가는 곳이다. 철도와 전혀 무관한 업무에 있던 사람이 철도 정책의 수장이 돼서 몇 달간 업무 파악을 한다. 이런 사람이 수 십 년을 철도에 몸담았던 사람들을 향해서 철도에 대해 훈시하는 모습은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이런 조건에서 해외 수주나 국제 경쟁력을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철도에 대한 이해나 철학의 부재는 지난 수 십 년간 철도의 공익적 역할보다는 수익을 최우선 하는 길로 달려왔다.
최고의 안전성을 자랑하는 일본 고속열차 신칸센은 시설과 운영이 통합된 철도회사 JR이 맡고 있다. 독일의 경우 종합적인 컨트롤타워는 독일 철도공사 도이치반(DBAG)이다. DB 산하에 운영을 책임지는 여객과 화물철도 사업부가 있고 시설관리와 역사관리를 책임지는 사업부도 있다. 독일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최종 책임은 독일철도공사에 있다. 프랑스는 시설과 운영을 분리했다가 재통합하여 프랑스철도공사(SNCF)가 철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한국철도를 책임지는 주체는 국토부일까? 철도공사일까? 철도시설공단일까?
사고가 났으나 안전책임자는 여객팀장 한 명뿐
탈선사고가 나자 승객들은 알아서 대피해야 했다. 휴가 나온 장병이 승객들을 대피시키는 사진은 철도공사의 무대책을 질타하는 상징적인 장면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견된 것이었다. 198명의 승객이 탄 열차에 객실 안전을 책임지는 승무원은 단 1명이었다. 경강선 KTX에는 철도공사 여객팀장 1명과 코레일 자회사인 관광개발 소속 승무원 1명이 탑승한다. 이 중에서 안전책임자는 여객팀장 1명뿐이다.
한때 상징적인 비정규직 문제였던 KTX 여승무원 대량 해직 사태 때 여승무원은 여객 안전 업무가 아니라 서비스 담당이라는 유권해석과 법원 판결 때문이었다. 불법파견 소지를 없애기 위한 편법적 조치였다. 효율화를 위해 안전을 뒷전으로 돌린 셈이다.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 간을 운영하는 러시아 고속열차 삽산은 KTX 산천과 같이 10량 1편성인데 승무원이 분야별로 20명이 넘는다. 폴란드의 고속열차 펜돌리노도 10명 이상의 승무원이 탑승한다. KTX 산천에 안전담당 1명과 서비스 담당 1명의 승무원 운영체제는 만일의 사태는 없다는 가정 아래 유지되는 체제다.
항공기 승무원들에게 힘들기로 악명 높은 비상탈출 훈련은 수시로 반복된다. 항공기 승무원 대부분은 퇴직할 때 까지 실제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을 상황을 승객 안전을 위해서 반드시 수행하는 훈련이다. 왜 철도에는 이같은 정신이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성공한 '개혁'이 가져온 사고
공기업 문제가 발생하면 사장 문책론이 일고 낙하산 인사 문제가 불거진다. 철도 안전 확보가 사장 문책으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일수도 있다. 철도공사는 2018년 내내 공공성 강화를 내걸고 달려왔지만 내재된 구조적 문제의 해결 없이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비전문가의 낙하산 인사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는 정당이 집권했을 때의 인사 난맥상과 낙하산 문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동안 철도 공사 사장은 대부분 낙하산이었지만 그 속에는 많은 차이가 존재했다. 노동조합을 적으로 간주해 진압 대상으로 삼아 끝없는 분쟁이 계속되기도 했다. 반면 공기업 문화를 배려와 존중으로 바꿔 안전사고를 적극 예방하고자 했던 CEO도 있었다. 오히려 철도 전문가란 이름을 달고 부임한 사장은 평소의 입장까지 바꿔가며 정권이 밀어붙인 고속철도 분리운영에 총대를 멨다.
공기업 사장은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공기업의 존재 이유, 목적과 기능을 이해해야 한다. 공기업의 사회적 역할은 그 기업이 수행하는 사업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1년 내내 수익성의 채찍을 휘두르다 연말 연탄배달 사진 한 장으로 사회적 역할을 다했다는 최면을 거는 일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이번 사고가 한국사회에 주는 경고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상대 정치세력에 대한 좋은 공격 소재로 써먹거나 핫한 보도 아이템으로 조회수를 올리다가 새로운 이슈가 터지면 우르르 달려가는 과정의 하나라면, 분풀이는 했을지언정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철도공사의 승객 대피 안내 실태를 꾸짖는 언론이나 국회의원들도 사실은 현 사태의 조력자들이다. 철도공사의 방만 경영에 따른 적자가 과도한 인력과 인건비에서 비롯됐다며 인력감축을 통한 효율화를 역설했던 당사자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철도구조개혁을 줄기차게 진행해온 국토부 역시 철도공사의 인력 효율화는 중요한 개혁과제였다. 성공한 개혁이 가져온 사고. 어쩌면 온 사회가 한 마음으로 달려온 효율화의 종착역이 강릉 탈선 사고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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