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에 이어, 이번에는 '신대방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원풍모방 노조 터 - ②세왕전기 터 - ③한영섬유 노조 터 - ④보라매공원 - ⑤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한국학생건국운동공적비 - ⑥김마리아 동상 - ⑦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 - ⑧동작청소년성문화센터 '더하기'
지난 11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순찰 업무를 하던 중 석탄운송설비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24)을 추모하는 행렬이 점점 불어나고 있다. 22일에는 "내가 김용균이다!"를 외치는 3000여 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대통령의 사과, 위험의 외주화 중단"을 요구하면서 청와대 앞까지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보라매공원의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
▶ 코스안내 : ①원풍모방 노조 터 - ②세왕전기 터 - ③한영섬유 노조 터 - ④보라매공원 - ⑤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한국학생건국운동공적비 - ⑥김마리아 동상 - ⑦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 - ⑧동작청소년성문화센터 '더하기'
지난 11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순찰 업무를 하던 중 석탄운송설비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24)을 추모하는 행렬이 점점 불어나고 있다. 22일에는 "내가 김용균이다!"를 외치는 3000여 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대통령의 사과, 위험의 외주화 중단"을 요구하면서 청와대 앞까지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보라매공원의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
▲ 보라매공원의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은 2000년 한국노총의 제안을 정부가 수용하면서 건립되었다. | |
ⓒ 김학규 |
이런 시점에 보라매공원 호수 서편에 있는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을 찾는 일은 마음을 더 짓누른다.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은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2000년에 세워졌다. 한국노총이 처음 요구하여 '노·정·당 산재사망자위령탑 건립 회의' 개최로 이어졌고, 산재보험기금에서 11억 원이 투입되면서 건립되었다.
이 위령탑 앞에서는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기념하여 매년 4월 28일 전후 한국노총이 주도하는 '산재노동자의 날 추모제'가 열린다. 민주노총은 이와 별도로 '4·28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 민주노총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산재추방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4월 28일이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로 처음 지정된 것은 1996년이다.
1984년부터 캐나다노총(CLC)이 1914년 제정된 노동자보상보험법 제정일인 4월 28일을 추모의 날로 기념한 것을 계기로 캐나다·미국·영국을 중심으로 기념하기 시작한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국제자유노련(현 국제노총 ICFTU)이 1996년 공식화한 것이다.
국제자유노련은 1996년 4월28일 유엔 본부에서 열린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 참석한 국제자유노련 간부를 중심으로 1993년 5월 10일 태국의 장난감공장 대형화재로 사망한 188명의 노동자를 추모하는 '촛불 밝히기' 행사를 열었고, 세계 70개국에서 같은 날 '촛불 밝히기' 행사를 열었다. 2002년부터는 국제노동기구(ILO)가 이날을 자체적인 기념일로 지정했다.
현재 국제노총은 4월 28일을 유엔이 정하는 국제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2000년 8월 국제노총의 요구에 따라 4월 28일을 '산재 노동자의 날'로 지정한 한국노총이 정부에 '국가기념일'로 지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산재추방운동 계기가 된 '문송면 수은중독'과 '원진레이온 사태'
지난 11월 22일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 추모조직위원회'가 주최하는 '원진 직업병투쟁 30년, 전국 산재노동자 한마당'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산재노동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추모조직위원회는 이미 7월 1일과 2일에도 산재사망 노동자 문송면 30주기 추모행사도 진행한 터였다.
이날 참석자들은 '산재 추방과 안전한 일터를 위한 희망 선언'을 발표하면서 ▲ 정부 차원에서 산재사망 절반 줄이기 '산재추방 범국민운동' 추진 ▲ '산재노동자 예우와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 ▲ 산재노동자의 날 국가기념일 지정 ▲ 화학물질에 대한 알권리 보장 ▲ 다단계 하도급과 장시간 노동정책 즉각 중단 ▲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 ▲ 산재사망에 대한 기업책임을 강화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등을 촉구했다.
이 행사에 축사를 보낸 문재인 대통령은 "노동자가 잘 살아야 대한민국이 함께 잘 살 수 있다"라면서 "산업재해는 한 번 벌어지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겠다"라고 다짐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인정했듯이 문송면과 원진레이온은 산재추방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문송면은 1988년 7월 2일 수은중독으로 사망할 당시 열다섯 살의 온도계 공장 노동자였다. 충남 서산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던 문송면은 야간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987년 12월 5일부터 온도계 제조업체인 서울 양평동4가 협성계공에 취업해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을 풀기도 전, 신나 세척과 온도계의 수은을 주입하는 일을 한 지 한 달 만에 몸이 아프고 머리가 쑤시기 시작했다. 문송면은 두 달 만에 회사를 휴직할 수밖에 없었고, 여러 병원을 찾았지만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 의과대학에서 산업보건에 대한 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던 시절의 아픈 현실이었다.
어렵게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중독과 신나 중독이라는 진단을 받은 문송면은 비로소 산재요양 승인을 신청하지만, 회사와 서울남부지방노동사무소는 이마저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가 회사와 노동부로부터 산재요양승인을 받은 것은 <동아일보> 등 언론에 사건이 폭로된 이후인 6월 20일이었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무관심의 그늘 직업병'이라는 기사에서 "산업보건 전문가들은 직업병을 찾아낸 문군의 경우는 '정말 운이 좋은 예'라고 지적한다"라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공장의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여러 가지 직업병에 시달리고 있지만 노동자 스스로가 잘 모르는 탓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직업병이 확실한데도 의사들이 제대로 진단을 해주지 못해 보상조차 못 받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렇게 '정말 운이 좋은 예'였던 문송면은 수은 중독 진단을 받은 지 4개월 만인 7월 2일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사망하고 만다. 문송면의 시신은 노동계가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 장례위원회를 꾸려 투쟁을 벌인 끝에 회사 측의 공개사과와 보상금 합의를 이루어낸 다음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 안장됐다.
문송면이 사망한 지 불과 20일 후인 7월 22일, 이번에는 인견사를 생산하는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CS2) 중독 참사가 <한겨레신문>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원진레이온 사태는 915명의 직업병 환자와 지금까지 230명의 산재사망자를 낸 대한민국의 산재 역사상 최대·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도 당시까지는 원진레이온은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말과 몸짓이 부자연스러운 중증마비상태에 이른 노동자 12명을 강제퇴직 시키는 방식으로 산재를 은폐하고 있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원진레이온직업병대책위원회(위원장 이소선)를 만들고, 원진노동자들은 원진직업병피해노동자협의회를 만들어 지난한 투쟁을 벌였다. 마침내 1991년에 이르러 원진레이온 공장은 폐쇄됐고, 노동안전 관련법 제·개정으로 이어졌다. 노동재해를 전문으로 하는 원진종합센터(원진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원진복지관)가 만들어진 것도 원진레이온 사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뤄낸 성과였다.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
그럼에도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속에 탐욕에 사로잡힌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태도를 전혀 바꾸려 하지 않았다.
아래 도표에서 확인되듯이 산재노동자수는 최근 비록 미세하나마 줄어드는 추세가 감지되고 있지만, 2001년 이후 지난해까지 매년 9만 명 전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산재 사망노동자수도 2012년 이후 2000명 이하로 낮아졌지만, 매년 2000명 전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산재로 하루에 5명이 사망하고 250명이 다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노동부의 공식 통계 수치는 신뢰 문제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서울대 의대 교수 이진석은 2005년 기준 비의도적 손상 건강보험 환자 1238만330명 중 278만2491명이 직장 재해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2008년). 이 시기 실제 산재 승인자는 8만5411명이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연구원 신상도는 직업성 손상으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 중 건강보험이 69.4%, 일반이 4.9%를 차지할 때 산재보험은 16.1%에 불과했으며, 사망자의 경우도 절반 이상이 건강보험으로 처리한다고 보고했다(2011년).
국회입법조사처가 발간한 '산업재해은폐에 대한 실태조사 및 제도개선 방향'(2015)에서도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산재 사망 1위 국가이지만 전체 산업재해 발생률은 OECD 국가 평균 이하인 기이한 통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산업재해의 80% 이상이 은폐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 산재노동자수가 고용부 통계를 훨씬 뛰어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년 일하다 다친 산재노동자수를 파악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이 산재를 은폐하고 공상처리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일례로 김용균이 사망한 현장인 한국서부발전을 포함한 발전 공기업들은 사실상 '위험의 외주화'를 통해 정부로부터 세제 혜택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우원식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정부로부터 무재해 사업장으로 인정받아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 화력발전 5개사(남동발전, 서부발전, 중부발전, 남부발전, 동서발전) 등 7개 전력기관이 최근 5년간(2013년~2017년) 감면받은 산재보험료는 무려 497억 원이었다.
이들이 무재해 인증을 받아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사업장에서 다치거나 숨진 노동자의 대부분이 하청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위험의 외주화'를 통해 대기업과 공공기관은 산재를 대폭 줄이면서 커다란 이익을 얻고 있을 때, 그 위험은 고스란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e-나라지표>는 '산업재해현황'을 설명하면서 "산업구조 및 고용환경의 변화 등으로 비정규직, 외국인, 고령, 여성 등 산재취약계층 근로자의 증가와 소규모사업장에 대한 대기업의 하도급 증가 등 재해유발 요인은 지속 증가할 전망"이라며 "재해다발위험에 대한 집중 관리 등 산재취약계층에 대한 실효성 있는 예방정책·사업을 개발, 행정 역량을 집중"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산재로 사망한 김용균의 사업장이 공공부문인 태안서부발전소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말잔치의 허구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뿐이다.
김용균의 죽음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위령탑 앞에는 2개의 건립 취지문이 있다. 하나는 2000년 건립 당시 만든 취지문이고, 다른 하나는 2004년에 만든 새로운 취지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나라경제 발전을 위하여 산업현장에서 땀흘려 일하다 불의의 재해를 입은 근로자들의 큰 공적과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에게 산업재해에 대한 경각심과 노동의 신성함을 고취하고자 이 탑을 세웁니다." - 2000년 12월 27일
처음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을 세울 당시 만든 취지문의 내용이다. 산업재해 노동자는 그들이 나라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국근대화를 위해 무슨 전쟁터에 나간 '산업전사'라거나 불가피한 상황에서 희생정신을 발휘한 '희생자'로 미화할 대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생명과 안전보다 기업의 이윤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헌법에 명시된 노동권과 행복추구권조차 박탈당한 채 산업재해로 억울하게 사망한 노동자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보라매공원에 있는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은 '노동자' 대신 '희생자'가 들어간 그 이름에서부터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산재 없는 세상'에 대한 강한 열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위령탑 건립 당시 한국노총의 제안으로 시작됐다지만, 정부가 주도하고 경영계도 함께한 결과로 보인다.
반면 제4회 산재노동자의 날에 즈음하여 만든 '산업재해가 없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취지문은 접근법이 꽤 다르다. 정부와 자본가의 개입 없는 한국노총의 순수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러하리라.
"우리의 경제발전사는 일면 산업재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 초 이후 경제발전의 이면에는 광업에서의 탄광사고와 진폐환자를 시작으로 원진레이온 중독사고를 비롯해 공장과 건설현장에서 그리고 최근의 직업성질환에 이르기까지 산재보험법이 제정된 1964년 이후 2003년까지 산업현장에서 업무상 재해를 당한 사람은 모두 350만 명에 이르며 이중 6만2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여기 산재 희생자 위령탑은 산재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꽃을 피운 우리사회가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공을 기림으로써 산업 재해를 우리사회에서 뿌리 뽑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2004년 4월 28일 제4회 산재노동자의 날"
지금 우리는 한 청년의 죽음 앞에 '산업재해가 없는 세상'을 위한 새로운 발걸음을 뗐다. 국회에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처리한 것이다.
심의하는 과정에서는 이장우 한국당 의원이 정부가 입법예고한 개정안에 대해 김용균의 죽음 앞에서도 "이러다 나라 망한다"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는 소식도 들렸다(관련 기사 : '김용균법' 정부안 멈춰세운 이장우 "이러다 나라 망해").
처리 하루 전에도 임이자 자유한국당 소속 고용노동소위 위원장이 환노위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다시 한 번 이해당사자 간 공개 토론을 하고서 통과시켜도 늦지 않다"라고 말해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한 국회 논의가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 등이 지난 24일 국회를 찾아 여야 대표에게 법안 처리를 읍소하면서 환노위 회의장 앞을 지키는 단호함을 보이면서 여론이 꿈틀댔고, 결국 국회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용균의 어머니는 "용균이와 같은 아이들,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 우리 아들은 죽었지만 그래도 본인이 죽으면서 떳떳하게 무언가 했다는 의미 부여를 해주고 싶다"라고 여야 대표에 호소했다.
이제 '위험성·유해성이 높은 작업의 사내도급 금지, 안전조치 위반 사업주의 처벌 강화, 산재에 대한 원청의 책임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또 다른 김용균의 죽음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게 하고 노동자들도 국민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노동권과 행복추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산재추방운동의 역사는 한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을 계기로 이렇게 한 단계 발전하게 됐다.
1984년부터 캐나다노총(CLC)이 1914년 제정된 노동자보상보험법 제정일인 4월 28일을 추모의 날로 기념한 것을 계기로 캐나다·미국·영국을 중심으로 기념하기 시작한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국제자유노련(현 국제노총 ICFTU)이 1996년 공식화한 것이다.
국제자유노련은 1996년 4월28일 유엔 본부에서 열린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 참석한 국제자유노련 간부를 중심으로 1993년 5월 10일 태국의 장난감공장 대형화재로 사망한 188명의 노동자를 추모하는 '촛불 밝히기' 행사를 열었고, 세계 70개국에서 같은 날 '촛불 밝히기' 행사를 열었다. 2002년부터는 국제노동기구(ILO)가 이날을 자체적인 기념일로 지정했다.
현재 국제노총은 4월 28일을 유엔이 정하는 국제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2000년 8월 국제노총의 요구에 따라 4월 28일을 '산재 노동자의 날'로 지정한 한국노총이 정부에 '국가기념일'로 지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 제18회 산재노동자의 날 추모제 한국노총은 2001년부터 매년 4월 28일 전후로 보라매공원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에서 "산재노동자의 날" 행사를 한다. | |
ⓒ 한국노총 |
산재추방운동 계기가 된 '문송면 수은중독'과 '원진레이온 사태'
지난 11월 22일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 추모조직위원회'가 주최하는 '원진 직업병투쟁 30년, 전국 산재노동자 한마당'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산재노동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추모조직위원회는 이미 7월 1일과 2일에도 산재사망 노동자 문송면 30주기 추모행사도 진행한 터였다.
이날 참석자들은 '산재 추방과 안전한 일터를 위한 희망 선언'을 발표하면서 ▲ 정부 차원에서 산재사망 절반 줄이기 '산재추방 범국민운동' 추진 ▲ '산재노동자 예우와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 ▲ 산재노동자의 날 국가기념일 지정 ▲ 화학물질에 대한 알권리 보장 ▲ 다단계 하도급과 장시간 노동정책 즉각 중단 ▲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 ▲ 산재사망에 대한 기업책임을 강화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등을 촉구했다.
이 행사에 축사를 보낸 문재인 대통령은 "노동자가 잘 살아야 대한민국이 함께 잘 살 수 있다"라면서 "산업재해는 한 번 벌어지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겠다"라고 다짐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인정했듯이 문송면과 원진레이온은 산재추방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문송면은 1988년 7월 2일 수은중독으로 사망할 당시 열다섯 살의 온도계 공장 노동자였다. 충남 서산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던 문송면은 야간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987년 12월 5일부터 온도계 제조업체인 서울 양평동4가 협성계공에 취업해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을 풀기도 전, 신나 세척과 온도계의 수은을 주입하는 일을 한 지 한 달 만에 몸이 아프고 머리가 쑤시기 시작했다. 문송면은 두 달 만에 회사를 휴직할 수밖에 없었고, 여러 병원을 찾았지만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 의과대학에서 산업보건에 대한 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던 시절의 아픈 현실이었다.
어렵게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중독과 신나 중독이라는 진단을 받은 문송면은 비로소 산재요양 승인을 신청하지만, 회사와 서울남부지방노동사무소는 이마저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가 회사와 노동부로부터 산재요양승인을 받은 것은 <동아일보> 등 언론에 사건이 폭로된 이후인 6월 20일이었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무관심의 그늘 직업병'이라는 기사에서 "산업보건 전문가들은 직업병을 찾아낸 문군의 경우는 '정말 운이 좋은 예'라고 지적한다"라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공장의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여러 가지 직업병에 시달리고 있지만 노동자 스스로가 잘 모르는 탓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직업병이 확실한데도 의사들이 제대로 진단을 해주지 못해 보상조차 못 받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렇게 '정말 운이 좋은 예'였던 문송면은 수은 중독 진단을 받은 지 4개월 만인 7월 2일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사망하고 만다. 문송면의 시신은 노동계가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 장례위원회를 꾸려 투쟁을 벌인 끝에 회사 측의 공개사과와 보상금 합의를 이루어낸 다음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 안장됐다.
▲ 1988년 7월 2일, 문송면 군은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 급성 수은 중독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 |
ⓒ 일과건강 |
문송면이 사망한 지 불과 20일 후인 7월 22일, 이번에는 인견사를 생산하는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CS2) 중독 참사가 <한겨레신문>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원진레이온 사태는 915명의 직업병 환자와 지금까지 230명의 산재사망자를 낸 대한민국의 산재 역사상 최대·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도 당시까지는 원진레이온은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말과 몸짓이 부자연스러운 중증마비상태에 이른 노동자 12명을 강제퇴직 시키는 방식으로 산재를 은폐하고 있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원진레이온직업병대책위원회(위원장 이소선)를 만들고, 원진노동자들은 원진직업병피해노동자협의회를 만들어 지난한 투쟁을 벌였다. 마침내 1991년에 이르러 원진레이온 공장은 폐쇄됐고, 노동안전 관련법 제·개정으로 이어졌다. 노동재해를 전문으로 하는 원진종합센터(원진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원진복지관)가 만들어진 것도 원진레이온 사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뤄낸 성과였다.
▲ 원진레이온 산재 문제를 처음 보도한 한겨레신문(1988. 7. 22) 문송면이 사망한 지 불과 20일 후인 7월 22일, 이번에는 인견사를 생산하는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CS2) 중독 참사가 한겨레신문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원진레이온 사태는 915명의 직업병 환자와 지금까지 230명의 산재사망자를 낸 대한민국의 산재 역사상 최대·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 |
ⓒ 한겨레신문 |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
그럼에도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속에 탐욕에 사로잡힌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태도를 전혀 바꾸려 하지 않았다.
아래 도표에서 확인되듯이 산재노동자수는 최근 비록 미세하나마 줄어드는 추세가 감지되고 있지만, 2001년 이후 지난해까지 매년 9만 명 전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산재 사망노동자수도 2012년 이후 2000명 이하로 낮아졌지만, 매년 2000명 전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산재로 하루에 5명이 사망하고 250명이 다치고 있는 셈이다.
▲ 연도별 산업재해 현황(고용노동부 통계) 산재노동자수는 최근 비록 미세하나마 줄어드는 추세가 감지되고 있지만, 2001년 이후 지난해까지 매년 9만 명 전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산재 사망노동자수도 2012년 이후 2천명 이하로 낮아졌지만, 매년 2천명 전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산재로 하루에 5명이 사망하고 250명 이 다치고 있는 셈이다. | |
ⓒ 고용노동부 |
그나마 노동부의 공식 통계 수치는 신뢰 문제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서울대 의대 교수 이진석은 2005년 기준 비의도적 손상 건강보험 환자 1238만330명 중 278만2491명이 직장 재해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2008년). 이 시기 실제 산재 승인자는 8만5411명이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연구원 신상도는 직업성 손상으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 중 건강보험이 69.4%, 일반이 4.9%를 차지할 때 산재보험은 16.1%에 불과했으며, 사망자의 경우도 절반 이상이 건강보험으로 처리한다고 보고했다(2011년).
국회입법조사처가 발간한 '산업재해은폐에 대한 실태조사 및 제도개선 방향'(2015)에서도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산재 사망 1위 국가이지만 전체 산업재해 발생률은 OECD 국가 평균 이하인 기이한 통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산업재해의 80% 이상이 은폐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 산재노동자수가 고용부 통계를 훨씬 뛰어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년 일하다 다친 산재노동자수를 파악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이 산재를 은폐하고 공상처리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일례로 김용균이 사망한 현장인 한국서부발전을 포함한 발전 공기업들은 사실상 '위험의 외주화'를 통해 정부로부터 세제 혜택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우원식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정부로부터 무재해 사업장으로 인정받아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 화력발전 5개사(남동발전, 서부발전, 중부발전, 남부발전, 동서발전) 등 7개 전력기관이 최근 5년간(2013년~2017년) 감면받은 산재보험료는 무려 497억 원이었다.
이들이 무재해 인증을 받아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사업장에서 다치거나 숨진 노동자의 대부분이 하청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위험의 외주화'를 통해 대기업과 공공기관은 산재를 대폭 줄이면서 커다란 이익을 얻고 있을 때, 그 위험은 고스란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e-나라지표>는 '산업재해현황'을 설명하면서 "산업구조 및 고용환경의 변화 등으로 비정규직, 외국인, 고령, 여성 등 산재취약계층 근로자의 증가와 소규모사업장에 대한 대기업의 하도급 증가 등 재해유발 요인은 지속 증가할 전망"이라며 "재해다발위험에 대한 집중 관리 등 산재취약계층에 대한 실효성 있는 예방정책·사업을 개발, 행정 역량을 집중"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산재로 사망한 김용균의 사업장이 공공부문인 태안서부발전소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 말잔치의 허구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뿐이다.
김용균의 죽음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위령탑 앞에는 2개의 건립 취지문이 있다. 하나는 2000년 건립 당시 만든 취지문이고, 다른 하나는 2004년에 만든 새로운 취지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나라경제 발전을 위하여 산업현장에서 땀흘려 일하다 불의의 재해를 입은 근로자들의 큰 공적과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에게 산업재해에 대한 경각심과 노동의 신성함을 고취하고자 이 탑을 세웁니다." - 2000년 12월 27일
처음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을 세울 당시 만든 취지문의 내용이다. 산업재해 노동자는 그들이 나라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국근대화를 위해 무슨 전쟁터에 나간 '산업전사'라거나 불가피한 상황에서 희생정신을 발휘한 '희생자'로 미화할 대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생명과 안전보다 기업의 이윤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헌법에 명시된 노동권과 행복추구권조차 박탈당한 채 산업재해로 억울하게 사망한 노동자일 뿐이다.
▲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 옆의 노동자 군상 위령탑 뒤편의 추모시와 함께 노동자를 "산업전사"로 묘사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 |
ⓒ 김학규 |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보라매공원에 있는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은 '노동자' 대신 '희생자'가 들어간 그 이름에서부터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산재 없는 세상'에 대한 강한 열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위령탑 건립 당시 한국노총의 제안으로 시작됐다지만, 정부가 주도하고 경영계도 함께한 결과로 보인다.
반면 제4회 산재노동자의 날에 즈음하여 만든 '산업재해가 없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취지문은 접근법이 꽤 다르다. 정부와 자본가의 개입 없는 한국노총의 순수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러하리라.
"우리의 경제발전사는 일면 산업재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 초 이후 경제발전의 이면에는 광업에서의 탄광사고와 진폐환자를 시작으로 원진레이온 중독사고를 비롯해 공장과 건설현장에서 그리고 최근의 직업성질환에 이르기까지 산재보험법이 제정된 1964년 이후 2003년까지 산업현장에서 업무상 재해를 당한 사람은 모두 350만 명에 이르며 이중 6만2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여기 산재 희생자 위령탑은 산재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꽃을 피운 우리사회가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공을 기림으로써 산업 재해를 우리사회에서 뿌리 뽑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2004년 4월 28일 제4회 산재노동자의 날"
▲ "산업재해가 없는 세상을 위하여" 보라매공원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 앞에는 두 개의 건립 취지문이 있다. 사진은 2004년 4월 28일 제4회 산재노동자의 날 추모제에 즈음하여 한국노총이 만든 취지문이다. | |
ⓒ 김학규 |
지금 우리는 한 청년의 죽음 앞에 '산업재해가 없는 세상'을 위한 새로운 발걸음을 뗐다. 국회에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처리한 것이다.
심의하는 과정에서는 이장우 한국당 의원이 정부가 입법예고한 개정안에 대해 김용균의 죽음 앞에서도 "이러다 나라 망한다"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는 소식도 들렸다(관련 기사 : '김용균법' 정부안 멈춰세운 이장우 "이러다 나라 망해").
처리 하루 전에도 임이자 자유한국당 소속 고용노동소위 위원장이 환노위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다시 한 번 이해당사자 간 공개 토론을 하고서 통과시켜도 늦지 않다"라고 말해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한 국회 논의가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 등이 지난 24일 국회를 찾아 여야 대표에게 법안 처리를 읍소하면서 환노위 회의장 앞을 지키는 단호함을 보이면서 여론이 꿈틀댔고, 결국 국회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용균의 어머니는 "용균이와 같은 아이들,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 우리 아들은 죽었지만 그래도 본인이 죽으면서 떳떳하게 무언가 했다는 의미 부여를 해주고 싶다"라고 여야 대표에 호소했다.
이제 '위험성·유해성이 높은 작업의 사내도급 금지, 안전조치 위반 사업주의 처벌 강화, 산재에 대한 원청의 책임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또 다른 김용균의 죽음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게 하고 노동자들도 국민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노동권과 행복추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산재추방운동의 역사는 한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을 계기로 이렇게 한 단계 발전하게 됐다.
▲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2차 범국민추모제 태안화력발전소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을 추모하며 "산재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2차 범국민추모제가 12월 29일(토) 17시 광화문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 |
ⓒ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 |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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