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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자 이사장은 달변이었다. 어떤 질문이든 막힘이 없었다. 목소리는 낭랑하고 소프라노였다. 손 제스처와 몸짓도 삼가지 않았다. 답변은 단호했고 추호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이경자 (사)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처음부터 그는 달변이었다. 한국작가회의에 최초로 여성 이사장이 된 것을 축하한다고 하자, 대뜸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 변화를 역사적 관점에서 일장 풀어놓았다. 이후 어떤 질문이든 막힘이 없었다. 목소리는 낭랑하고 소프라노였다. 손 제스처와 몸짓도 삼가지 않았다. 답변은 단호했고 추호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 이사장은 한국문학의 현황에 대해 “한국문학이 그동안 주눅 들어있었다”면서, 그 이유로 분단을 들었다. “분단이 우리를 알게 모르게 짓눌렀기 때문”에 “작가가 감수성을 세계화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응축”됐다는 것이다. 예술가들 정신에 식민지, 반공법, 6.25, 분단 등등이 ‘얼음’처럼 박혀있다는 것이다.
그 해결책으로 당연히 분단문제 해결을 들었다. 분단문제가 해결되면 “작가는 우리의 현실을 더 자유롭고 생기발랄한 언어와 문장, 문체로 표현해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문학은 세계성을 갖게 되는 것”이기에 “작가들에게도 통일은 너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래야 “우리 문학이 주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서 “그래서 세계성을 띨 수 있고. 그래야 제대로 된 언어로 분단문제, 민족문제를 다루고, 나아가 역사를 반추하면서 일제식민지, 4.19, 5.16쿠데타 이런 걸 다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2007년 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민족’을 떼고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꿀 때 “찬성”했다면서, 분단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민족문학보다는 그냥 한국작가회의라고 하는 게 훨씬 더 포괄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하는 게 세계성을 띤다는 게 내 생각”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특히, 이 이사장은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는 “단어로 표현하면 행복, 기쁨, 자부심 그리고 해방”이라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민족문제는 문재인과 김정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며 우리 모두가 함께 나서 관심 갖고 풀 것을 제의했다.
올해 초부터 한국사회를 강타해 홍역을 치른 문단 내 미투 운동에 대해서는 고은 시인이 활동하던 시대와 지금은 문화가 달라졌다면서 “고은 선생을 작가회의로부터 떠나게 해드릴 수밖에 없었다”고 이사장으로서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는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으로서의 역할에도 애정을 표했다. 그는 “(한국작가회의가)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존재만으로도 변화를 느끼는 것 같다”면서 “내 기질이나 분위기만으로도 회원들이 엄마에게 느끼는 편안함, 누나에게서 느끼는 친근함, 그런 걸 느끼는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만족해했다. 나아가 그는 “이경자가 작가회의 이사장하면서, 작가회의가 참 따뜻하고 부드러운 조직, 수평적인 조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첫 번째 욕심”이라며 “작가회의는 권력 단체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그의 문학이 주로 분단문제와 여성문제 등 한국사회의 근본문제를 다룬 것에 대해 “내 기질과 비슷한 것 같다”고는, 고향인 강원도 양양을 ‘강원도의 전라도’라고 하며, 양양에 있는 조산을 두고 ‘양양의 모스크바’라고 했다며 자신의 삶과 기질을 에둘러 표현했다. 이 인터뷰는 지난 6월 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마포중앙도서관 소재 (사)한국작가회의 사무실에서 열렸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한국작가회의, 내가 이사장 된 존재만으로도 변화를 느끼는 것 같다”
□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 : 지난 2월 한국작가회의 신임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첫 여성 이사장이다. 늦게나마 이사장에 취임한 것을 축하한다.
■ 이경자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 고맙다. 여성으로는 처음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함축된 상징성이 있다. 그동안 여성이 우리 사회에서 한 번도 변화의 중심에 서본 적이 없다. 물론 196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수공업 노동자, 그리고 미군이 한국에 왔을 때 양색시, 그 전에 일제시대 때 정신대 성노예 이런 게 있었지만, 그건 다 주류 남성들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 부수적인 존재였다.
이어 한일협정반대 6.3데모니, 유신반대, 그리고 끝없이 통일을 주장하는 통일운동세력들, 그 다음에 전태일과 전태일을 통한 노동자들의 사회적 대각성에 따른 노동자 대투쟁, 그리하여 80년대 중반에 여성 노동자들의 자기 각성이 일어났지만 그건 거의 상징적 수준이었다. 여성이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소수의 여성들만이 역사의 무대에 조금 등장한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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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10일 한국작가회의 총회에서 이사장 취임인사를 하고 있는 이경자 소설가. 왼쪽은 신임 사무총장 한창훈 소설가. [사진제공-한국작가회의] |
이제 비로소 여성이 인간화, 주체화에 대해서 각성하게 되었는데. 그 각성한 것이 소수 지식인 여성이나 소수 엘리트 여성들이 아니라 일반 여성들의 의식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20대 젊은 여성부터 말이다. 이런 것은 마치 누군가가 사회를 이념적으로 주도하는 계층에서 선도해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발성을 가진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문화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다가 올해 들어 누군가 불을 지폈다. 미투 운동이 일어났다. 내가 작가회의 이사장이 된 것은 이 시대에 필요한 능력을 가져서가 아니다. 이 시대 한국사회는 남성적인 것, 남성문화에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인 사회인 것 같다. 그래서 국가나 사회. 가정이나 개인 등 총체적인 분야에서 남성이라고 지칭되는 군사문화, 폭력문화, 위계문화, 가부장문화, 싸움으로 해결하는 것 등, 이런 것들에 대해서 진저리가 난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점에 나이로 보나, 등단한 경력으로 보나, 작가회의에서 꾸준히 회원으로 역할 해온 것 등이 집약에 돼서 이사장이 된 것 같다.
□ 여성의 지위 역할의 변화과정을 설명하셨는데, 이게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변화라고 볼 수 있겠다.
■ 그렇다.
□ 문단에도 남성이 많고 남성 위주로 돌아갈 테니까.
■ 특히, 한국작가회의는 내부에서 그런 문화가 지배했건 아니건 상관없이 외부에서는 굉장히 남성적이고 권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개성이나 기질이라는 게, 권력을 싫어하고 또 군대 문화나 가부장 문화 같은 거 근본적으로 반대하기에 내가 있는 존재만으로도 변화를 느끼는 것 같다. 내 기질이나 분위기만으로도 회원들이 엄마에게 느끼는 편안함, 누나에게서 느끼는 친근함, 그런 걸 느끼는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좋다. 기쁘다.
□ 지금 이사장 되신지 몇 개월?
■ 4개월 됐다.
□ 한국작가회의에서 아직 큰 변화가 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겠다.
■ 아니다. 변화가 있다. 왜냐하면 조직이 옛날과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이다. (옆 책상을 가리키며) 여기 우리 한창훈 소설가가 사무총장인데, 작가회의는 이 사람이 다 꾸려가고 있다. 내가 작가회의에 들어와 조직개편을 했다. 그래서 그동안 권위적인 것으로 비친 사무국에서 그런 권력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작가회의에는 2,700명 회원이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데, 중앙에서 내려가는 수직이 아니라 그 회원들에게 역할을 고루 분배하는, 수평적 조직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조직을 개편했다.
□ 4개월 만에 그런 변화가 있었다면,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다.
■ 이사장 임기가 2년이다. 계속 변화하지 않으면 지루해질 것 같다.
“민족문제는 문재인과 김정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
□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오늘날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이 변경돼 왔다. 각 명칭에는 그 시대를 반영한 정체성이 있을 것 같다. 단체 이름에 자유실천, 민족문학, 한국이 각각 들어간 이유를 설명해 달라.
■ 한국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창립된 게 1974년이다. 그때 유신반대로부터 시작했다. 당시 우리는 80년대까지는 모두 모여서 농성하고 데모하러 다녔다.
그때 우리는 독자나 사회가 우리 작가를 통해 무엇을 요구하는지 귀 기울였다. ‘자유’를 실천하고 자유가 무엇인가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대가 변해서 ‘민족문학’ 하자고 했다. 그리고 자유와 민족을 지나서 지금 ‘한국’작가회의가 가장 중요한 이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분단된 조국에서 분단현실을 인식하거나 자각하지 않으면 작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민족문학’이라고 하면 우리끼리만 하는 것 같다. 문학은 우리의 분단현실을 자각하고 그걸 개선하려고 하고, 또한 분단으로부터 생기는 모든 비극이나 억압과 차별들을 극복해내는 것이다. 문학적으로 극복해내는 것, 문학적으로 드러내는 것, 이런 것들은 결국 세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분단도 폭력이지 않은가. 거대한 폭력의 산물이다.
지금 자본주의 사회 여러 군데에서 폭력이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는데 우리가 분단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민족이라는 말에 갇히지 않고, 더 민족문제를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민족문제를 떼고서는 우리 현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단문제로 인해 우리 내면에서 국가보안법을 의식하고, 분단된 반쪽을 끝없이 의심하고 밀어내고 배척해야 하고 증오하지 않으면 애국자가 아닌 것 같은 왜곡된 심성이 길러지고 있다. 분단문제로 생긴 노이로제 때문에 남한 모든 사람들의 심성이 왜곡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민족문학보다는 그냥 한국작가회의라고 하는 게 훨씬 더 포괄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하는 게 세계성을 띤다는 게 내 생각이다.
□ 2007년 당시 제 기억에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민족’을 떼고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꿀 때, 1년여 시간을 끈 걸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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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는 나의 문제이다. 민족문제는 문재인과 김정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문제, 나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 이름 바꾸는 것, 명패를 바꾸는 것에 나는 그때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이다. 체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것인데 당장 밥상 위에 분단이 있어서, 그것을 드러내면서 우리의 문제를 드러내면서 어떻게 세계성을 띨 수 있을까가 작가들의 고민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취성과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회의라는 게 무슨 누군가의 독재성을 갖고 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라서, 가능하면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쓴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걸렸다.
□ 반대가 심했다는 말씀이다.
■ 반대가 많기는 했다. 하지만 작가회의로 이름을 바꾸는 것에 설득되거나 못마땅해도 받아들이거나 그렇게 된 거다. 인삼 녹용도 체질적으로 안 맞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떤 이념이나 헌장 같은 것들이 누구에게나 다 맞겠는가.
□ 그런데 아직도 민족에 대한 희망, 민족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 작가회의도 그렇고 나도 엄청 그렇다.
□ 단체 이름에 ‘민족’이 빠진 것 자체를 불순하게 보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
■ 그건 오해다.
□ 지난 3월 문단 일부에서 민족작가연합이 창립됐다. 민족작가연합은 강령에서 일제시대에는 저항의 문학을 지향해야 했듯이 분단시대에는 통일의 문학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 바른 작가의 사명이라 했다. 그래서 ‘민족’을 넣었다는 의미다. 이는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민족문학’이 빠진 것에 대한 반발로 보여진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향후 양 단체의 관계 설정은?
■ 나도 그 단체에 참가한 작가들의 명단을 봤다. 그리고 주축인 작가들을 광주에서 만났는데, 이 분들이 딱히 우리 한국작가회의에 대해서 대척점에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작가회의의 40년 넘는 역사에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있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수고들이 있었다. 여기에 오기까지 우리 작가회의에 계신 분들 중에서 투옥되고 고문 받은 분들이 많다. 그리고 그분들의 투옥과 고문에 대해서 후배 작가들의 존경과 위로를 위한 노력의 역사가 있었다. 상호 대립하는 게 아니기에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회의에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 이사장께서는 소설 <순이>, <언니를 놓치다>에서도 보이듯 분단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 내가 쓴 작품에 50%가 분단과 관련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분단에 대해서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우리는 분단과 관련돼 있고 그리고 분단으로부터 나온 모든 억압이 우리들의 의식주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에 대해서 인식하지 않는다고 하면 곤란하다.
□ ‘민족은 하나다’, ‘언어도 하나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분단 상황에서는 모국어를 쓰는 작가는 문학을 통해 민족과 민족문제, 통일문제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사장께서 생각하는 민족문학이란?
■ 나는 지금 민족의 현실이 자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민족문제는 나의 문제이다. 민족문제는 문재인과 김정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문제, 나의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민족문제에 대해서 인식하든 아니든 남북관계가 새로운 변화의 조짐에 한 발 한 발 가고 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민족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 나아가 민족 스스로가 해결하지 못하게 된 원인들에 대해서는 처절하게 다시 곱씹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나는 누군가 민족문제에 대한 분단현실, 분단을 낳게 된 역사적 맥락을 통시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디에서 일하든 타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해선 안 된다고 본다. 민족문제에 대해서 자각이 없다면 박근혜처럼 통일은 대박이라면서 쇼하다 만다. 그러면 안 된다.
“고은 선생을 작가회의로부터 떠나게 해드릴 수밖에 없었다”
□ 이사장께서는 분단문제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특히 여성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 <절반의 실패>와 <사랑과 상처> 등은 페미니즘 소설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시인이자 운동가였던 고정희의 정신을 잇기 위한 ‘고정희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올해 이사장이 된 뒤 문단 내 성폭력 문제, 미투 운동을 겪었다. 이에 대한 생각과 관련 문인들의 처리 방향은?
■ 신문이나 보도를 보셔서 알겠지만 고은 선생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초기 발기인이다. 고은 선생이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이사장도 하면서 그 분의 이름과 우리 작가회의 이름도 널리 알려졌다. 그 분 덕을 많이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역사를 보면 시대에 따라서 영웅이 역적도 되고 그러는 게 인간사 아닌가. 시대는 변한다. 중국의 모택동도 대장정하고 농민혁명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손꼽히는 위인인데, 그렇지만 그 시대에 문화대혁명은 잘못됐다. 사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이 그런 식으로 가는 걸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문화를 건들지 않으면 혁명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모택동이 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영웅은 없다. 그 시대의 영웅인 것이다. 고은 선생이 활동하시고 고은 선생이 사랑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는 맞다. 우리도 그 분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문화가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너무나 훌륭하고 유명하기 때문에 전체 국민들이 다 아는 큰 사건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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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와 문화가 달라졌다. 고은 선생을 작가회의로부터 떠나게 해드릴 수밖에 없었다”[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미투 운동 초기에 걷잡을 수 없는 세찬 바람이 불 때, 내가 이사장으로 오고 작가회의가 새 조직이 꾸려졌는데, 그걸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가회의에는 70-80세 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20대 회원도 있다. 우리는 너무나 상이한 문화를 습득하고 있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조직이다. 그런데 이 조직은 앞으로 나가야 하고 발전해야 하는 조직인 것이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조직도 생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활습관이나 양성 간 관계의 인습들을 주장해서 새로운 물결에 대해서 담을 쌓으려고 한다든가 둑을 쌓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문학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기본 성정이 자유, 평등, 평화이어야 하는데, 그건 그 정신과도 배치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1973년에 등단했기에 고은 선생과 오래도록 같이, 내가 시를 쓰지 않았지만 늘 모임에서 인사하고 뵌 분이다. 나는 술을 전혀 못 한다. 그래서 술자리에 같이 있어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고은 선생을 아무튼 작가회의로부터 떠나게 해드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회원이 아니다.
□ 일종의 악역을 맡으셨는데, 착잡했을 것 같다.
■ 뭐, 굉장했다. 시간이 신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의 신에 맡겨야 한다. 우리가 그 분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행동이나 언행이 그냥 유쾌하게 통용되던 시대가 있는가 하면 지금은 범죄가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미투 운동은 아마 지금 2, 3월처럼 요란하지 않아도 그 변화가 물밑에서 계속 흐르리라고 생각한다.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여성과 남성 관계에서, 남성에 의해서 여성이 억압받는가, 또는 그 반대인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 최근 한국사회가 다양화, 극단화되면서 ‘남혐’, ‘여혐’ 등의 조어가 나오면서 극도의 성 차별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특히 여혐이 강한 ‘일베’에 대항해 ‘메갈리아’, ‘워마드’ 등이 나왔는데 일부에서 ‘남혐’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페미니즘 작가 입장에서 ‘메갈리아’, ‘워마드’ 운동을 어떻게 보는가?
■ 레닌이 초기에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혁명은 처음에 이렇게 돌아있는 것을 이렇게 바꾸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가 가운데로 왔다가 다시 왼쪽으로 돌림). 그래야 제대로 오는 것이다. 이건 모든 사회 변화에 필요한 명제이다. 극우는 극좌에 갔다가 균형을 잡는 것이다. 지금은 그런 시대라고 생각한다. 걱정할 필요 없다. 왜냐면 이렇게(고개를 왼쪽으로 돌려서) 가는 걸 두고 나쁘다고 해서 막으면 이리(고개를 가운데로) 돌아올 수 없다. 저는 이런 거라고 본다.
□ 정상화로 가는 길에 있어 피치 못할 상황이다?
■ 거듭 레닌이 말했듯이 운동이란 이것(오른쪽)을 이렇게(가운데) 돌리려면 이렇게(왼쪽) 가야 하는 거다.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도 집이 미아리고개 너머인데 버스 타고 대학로 가다 보면 성폭력과 성희롱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면서 까만 옷 입는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나도 가서 앉고 싶다. 제 마음이. 너무나 앉고 싶다. 그러면서 지나간다.
어느 여성이 건물 앞에서 웃통을 벗어 던졌다고 치자. 이에 대해 그런 행위가 옳다, 나쁘다, 저거는 극단주의자다... 그렇게 보면 안 된다. 일반인은 그렇게 봐도 되지만 뭔가 사회 흐름을 읽고 책임지려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동참하면 안 된다. 아까도 말했지만, 극우는 극좌로 가지 않으면 중간으로 올 수 없다. 그런 사회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 71세인데. 아직 정신적으로 젊으시다.
■ 작가로서 늘 변화를 느낀다. 생각해보라. 한여름에 농구를 하다가 더우면 남자는 웃통을 벗는다. 웃통을 절대로 벗을 수 없는 사람의 억압 같은 거. 그 여성들은 우리도 남자처럼 웃통 벗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 어떤 극단적 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한류에도 한국문학 들어있다’
□ 이제 한국문학의 수준과 현황에 대해 묻고 싶다. 지난 1970-80년대만 해도 한국사회의 문화 분야에서 문학이 강세였다. 특히 민주화운동 시기 문학은 저항과 투쟁의 상징이었고 문인이 민주인사이기도 했다. 그만큼 사회적 파급력이 컸다는 얘기다. 지금 한류가 국제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런데 한류에서 문화는 케이팝,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 웹툰 등인데, 문학은 없다. 한국작가회의가 큰 단체인데, 수장으로서 섭섭하지 않은가.
■ 우리 세대에서 문학의 영향이 극대화된 시대는 1990년대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사실 문학이란 인간의 삶과 희로애락을 문자와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요즘 방탄소년단의 ‘페이크 러브’(Fake Love)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언어에 리듬을 얹은 것이다. 리듬 속에 언어를 넣은 것이다. 가사를 보면 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진 불안, 슬픔, 저항을 담고 있다.
케이팝이라는 게 그 노랫말도 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2016년에는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지 않은가. 책으로 된 것만 문학인 게 아니다.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 아리랑 아리라요”도 문학이다. 문학이 다양하게 넓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종이책이나 신문도 영향력이 약해졌다. 표현이 달라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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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자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6월 26일 한국작가회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 한류에도 사실은 한국문학이 들어있는 거군요.
■ 1970년대에 한국문학의 김지하 시인은 대한민국은 몰라도 세계적인 사람이었다. 유럽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다 알았다. 그런데 한국문학이 그동안 주눅 들어있었다. 왜 주눅 들었느냐. 분단이 우리를 알게 모르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가 감수성을 세계화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응축된 것이다.
황석영 선생의 소설을 봐도 그게 분단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가슴 후련하게 확대되어 있지 못하다. 작가정신을 옭매이고 있는 게 있다. 국가보안법이다. 자기 검열을 해야 한다. 우리의 DNA에는 국가보안법이 있다. 종북도 있고.
그것들이 작가의 정신, DNA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분단문제가 해결되면 그게 해결된다. 그러면 작가는 우리의 현실을 더 자유롭고 생기발랄한 언어와 문장, 문체로 표현해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문학은 세계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가들에게도 통일은 너무 중요하다.
□ 촛불집회를 안 짚을 수가 없다. 2016년 겨울과 2017년 봄 사이에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촛불집회에는 참여했는가?
■ 물론 참석했다. 안 갈 수가 없지 않은가. 회원들이 작가회의 깃발에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에서 막 오니까.
□ 작가는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이에 따라 작품은 사회와 사건을 반영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촛불혁명이 한국문단에 어떤 영향을 끼치리라고 보는가.
■ 이런 것도 다 결국은 억압을 푸는 일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탐욕과 위선, 비애국, 반민족, 특권의식, 척결되지 않은 가부장제와 봉건의식 등 말이다. 비서실장 김기춘이 박근혜를 여왕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그런 의식을 가지고 권력을 누린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 민중이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수 엘리트나 대학생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것이다. 촛불은 민중이라는 것이다.
□ 문학이 민중의 삶을 다뤄야 하는 만큼, 민중들이 촛불로 일어났으니 작품 속에도 녹아들어가겠다.
■ 작가는 작가이기 이전에 민중이다. 일단 민중이다. 민중이면서 작가이다.
“남북정상회담을 단어로 표현하면 행복, 기쁨, 자부심 그리고 해방”
□ 10여 년 동안 막혀있던 남북관계가 풀리고 있다. 남북의 정상과 북미 정상이 만나면서 한반도 평화 분위기 속에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있다. 4.27 남북정상회담과 6.12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작가로서의 심정은?
■ 단어로 표현하라면 행복, 기쁨, 자부심 그리고 해방.
□ 다 긍정적인 표현이다.
■ 이번 기회를 통해서, 분단문제에 대해서 관심 없던 젊은 아이들이 아, 한국의 운명에는 이런 강대국과 연관되어 있구나, 이 사람들이 우리의 운명에 간섭하고 줄이 닿아있었구나, 그래서 이것에 의해서 우리 운명이 간섭받고 있었구나, 하는 게 교육된 것이다. 선생님이 교육한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이 교육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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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문학에서 남북교류는 작가회의가 중심이 되지 않고 아마도 범 문단적으로 남북작가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더군다나 트럼프가 정상회담을 한번 안 하겠다고 했다. 그게 엄청난 교육적 효과를 한 것 같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주성을 우리가 획득하지 못하면 이렇게 종속된다, 우리 운명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강대국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
□ 최근 남북관계가 개선되면서 앞으로 문학 분야에도 남북교류가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지난 노무현 정부 시기에도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북측과 교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어떤 행사, 어떤 교류를 했는가?
■ 참여정부 때인 2005년에 남과 북의 작가들이 평양, 백두산 등에서 민족문학작가대회를 개최했고, 2006년에는 금강산에서 6.15민족문학인협회를 결성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는 끊겼다.
□ 앞으로 남북교류 계획은 있는가.
■ 예전 70-80년대, 90년대까지는 소수 엘리트들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은 촛불혁명에서 보듯이 모든 작가들과 단체들이 다 자기들의 지분과 역량을 갖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작가회의가 중심이 되지 않고 아마도 범 문단적으로 남북작가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
□ 그게 더 현실에 맞겠다. 촛불로 엘리트 위주에서 다수가 참여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니까. 이는 거꾸로 이야기하면 한국작가회의가 기득권을 버리는 것 아닌가.
■ 기득권은 작가회의뿐만 아니라 그 누구든지 버려야 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다 개개인을 존중하고 개개인이 가진 역량을 이해하는 사회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통일로 가는 길과도 맞다.
□ 이사장 되시고 4개월 지났다고 했는데, 그간 했던 사업은?
■ 물론 문재인 대통령도 관심을 가져줬지만 제주4.3 평화문학, 5.18문학 등의 행사를 아주 크게 치렀다. 이들 행사에서 나온 어휘와 발언들이 옛날보다 훨씬 더 적나라해졌다. 진실에 가까운 표현을 할 수 있었다. 학살자, 자유당 정부, 이승만 정권이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것을 옛날에는 적나라하게 말할 수 없었다면, 이제는 말하고 있다.
□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더 있는가.
■ 금년에 몇 개의 사업들을 할 것이다. 여수, 순천사건도 할 것이다. 감추어졌던 역사, 감춰진 비극을 우리가 분단과 관련해서 꺼내야 한다. 여순을 비롯해 4.3제주, 광주 등이 모두 분단과 관련된 것이다.
□ 민주정부가 들어선 나아진 조건에서 전보다 더 과감하게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큰 사건 위주로 다루는 것 같다.
■ 내가 개인적으로 작가로서 정신에 얼음이 박혀있다고 했는데, 우리 사회의 정신에, 우리 민족의 정신에도 박혀있다고 본다. 이런 것을 꺼내는 작업 중의 하나가 여수, 순천사건이다.
“내가 문학에서 분단문제와 여성문제를 주로 다룬 건 내 기질 때문”
□ 개인사가 궁금하다.
■ 해방공간에서 태어나서 내 고향이 38선 이북이다. 강원도 양양인데 양양의 절반이 38선 이북이다. 군청, 면사무소가 다 이북에 있었다. 내 집이 이북 쪽에 속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끝없이 엄마들이 부엌에서 속닥속닥하면서, 저 집에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다. 손가락질하면서 국군이 와서 쏴 죽였다, 굴에 들어가서 숨어 있었다, 평양에서 공부한 삼촌, 심지어 김일성대학 다닌 삼촌이 한밤중에 내려왔다가 들켜서 온 집안이 박살났다 등등. 나는 어려서 이런 걸 많이 겪었다. 게다가 60년대, 통일혁명당사건. 그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서 말하고, 그리고 인간이 잘 살자, 우리가 평등하게 살자, 가난과 부자의 간극을 줄이자고 말해서 무기징역을 받고 사형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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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문학에서 분단문제와 여성문제를 주로 다룬 건 내 기질 때문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박정희 정권 때 더군다나 70년대 들어가면 선거 임박해서 이런 사건들이 끊임없이 막 생겼다. 간첩사건이 막 만들어지는 거다. 그러면 나는 내 정신에 꼭 얼음이 막 박힌 것 같다. 냉동실에서 ‘나’라는 정신이 냉동된 것 같다.
이 냉동상태에서 인간을 억압하는 거다. 북한은 원수다, 뿔 달렸다, 적화통일하자는 것이다. 우리 세대와 우리 윗세대가 이런 세뇌를 끝없이 받으면서 자랐으니,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 수 있겠는가. 물론 7.4남북공동성명도 있었고, 그게 오늘날 4.27판문점선언에 이르는데 주춧돌을 놓기는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때 그렇게 세뇌 받으며 컸다.
우리 예술가들도 정신에 식민지, 반공법, 6.25, 분단 등등이 박혀있는 거다. 이제 이런 것들이 통일과 관련해서 녹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문학이 주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세계성을 띨 수 있고. 그래야 제대로 된 언어로 분단문제, 민족문제를 다루고, 나아가 역사를 반추하면서 일제식민지, 4.19, 5.16쿠데타 이런 걸 다 쓸 수 있는 거다. 외국에서 한국같이 분단된 조건에서 왜 큰 문학이 안 나오느냐고 말하는데, 이건 우리를 너무 모르는 거다. 우리 정신에 얼음이 박혀있어 응축되어 있는 것을.
□ 1973년에 등단했는데,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 7번 떨어지고 8번째 붙었다.
□ 습작도 엄청 많았겠다.
■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소설을 썼다. 중편도 쓰고 단편도 쓰고. 될 만할 때 된 것 같다.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등단했다면 꼴값했을 것 같다. 내가 21살에 등단했다면 꼴값해서 작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망가졌을 것 같다. 7전 8기라서 그나마 조금 나았다.
□ 신춘문예 당선이 무척 어렵다고 들었다.
■ 금방 되는 분도 있다. 한 번에 되는 분도 있다. 그런데 소설가는 인생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서 40대에 되도 괜찮다. 나는 26살에 됐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썼다. 계속 썼다. 매년 신춘문예에 냈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글 잘 쓴다는 소리를 양양 시골 바닥, 인구 얼마 안 되는 거기에서 들었기 때문에, 그거 이외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 태어나신 곳은 양양 골짜기인데, 문학은 분단문제와 여성문제를 주로 다뤘다. 뭐랄까 한국사회의 가장 근본적 문제에 접근했는데 이유가 뭔가?
■ 내 기질과 비슷한 것 같다. 강원도에서 양양을 어떻게 멸시하냐 하면, 비하하는 게 아니라 양양을 강원도의 전라도라고 한다.
양양에 낙산사가 있는데 그 근처에 조산(造山)이라고 있다. 조산이 김일성 정권의 초대 사법상을 한 최용달 씨 고향이다. 그리고 초대 양양군 인민위원장이 조산에서 나왔다. 그래서 조산을 양양의 모스크바라고 한다.
양양에서 내가 초등학교 다니고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조회를 서면 설악산 대청봉이 보인다. 10월 말부터 5월 초순까지 대청봉이 하얗다. 그 대청봉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서 싹 쓸어가지고 동해로 빠진다. 그 사이에 뭔가 없다. 벽이 없다. 둔덕이 없다. 바람 막을 둔덕이.
그래서 양양 사람들이 아주 거칠다. 악착같이 살아남고. 일제 때 항일운동 하거나 사회주의운동 할 때 춘천에서 대회한다고 하면 양양 대표와 철원 대표가 오지 않으면 회의가 안 됐다고 한다. 양양이 대한민국에서 3.1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지역으로 손꼽힌다. 산골은 아니고 작은 읍이다. 아주 세고 거칠다. 유관순 오빠가 양양 여자하고 결혼했다. 양양읍 성내리 여자하고 결혼했다. 그런 양양이 내 고향이다.
“작가회의는 권력 단체 아냐, 문학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해방”
□ 이사장 맡고 나서 바쁘실 것 같다. 그래도 본업은 작가다. 이사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행사나 모임에도 자주 참석해야 하기에 작가로서 작품을 못 쓰면 어떡하나 하는 기우가 든다. 혹시 최근에 준비하는 작품이 있는가.
■ 금년 5월에 장편을 끝내서 7월에 내는 게 목표였는데, 아직 못 쓰고 있다. 몇 년 동안 취재해서 쓴 것인데 멈춰있다. 가제인데 <슬픔의 정원>이다. 내가 분단문제를 <세 번째 집>으로 마감했다면, 이것은 여성 문제의 마감이다. 가부장제가 어떻게 남성을 망가뜨리나 하는 게 그 소설의 주제이다. 작가회의 일 때문에 아직 못 쓰고 있다.
포항제철소 가면 용광로 불 안 꺼뜨리는데, 소설가는 그래야 한다. 용광로 불을 꺼뜨려선 안 된다. 장편소설 같은 경우는 1년간 용광로 불을 때야 한다. 제가 <사랑과 상처>를 쓰기만 하는 데 22개월 걸렸다. 그 22개월 동안 용광로 불을 유지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지금 작가회의 일 때문에 멈춰 있다.
□ 그래도 이사장으로서 좋은 점도 있지 않은가.
■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미투 운동 일어났을 때, 다양한 인간성을 볼 수 있었다.
□ 그렇다면 지금 준비하는 장편이 조금 늦어지고 있지만, 새롭게 접하는 관계로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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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자가 작가회의 이사장하면서, 작가회의가 참 따뜻하고 부드러운 조직, 수평적인 조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첫 번째 욕심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이경자가 작가회의 이사장하면서, 작가회의가 참 따뜻하고 부드러운 조직, 수평적인 조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첫 번째 욕심이다. 사실 똑같은 소설가이지만 한창훈 사무총장이 나보다 열배, 백배는 고생하고 있다. 우리가 재미있는 게, 내가 강원도 양양 사람이고 한 총장은 거문도 사람이다. 그리고 사무처장인 안현미 시인은 태백이다. 다 촌사람이 모인 거다. 촌이라는 게 좋다.
□ 4~5개월 됐지만, 이사장으로서 아직 1년 반 남았는데 앞으로 큰 변화와 함께 개인적으로도 단체도 크게 되길 바란다.
■ 작가회의는 권력 단체가 아니다. 권력 단체여서도 안 된다. 지역과 중앙이 동등해야 하고, 민주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문학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해방이다. 인간성을 얽매이는 어떤 것도 풀어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해방과 자유,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긍정, 문학은 이런 것들에 기여하는 제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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