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국가들에 ‘우월함’ 강조 반어적 표현, 주주중심 한계 극복 위해 노동이사제 병행해야
이 나라의 보수세력은 “빨갱이다!” 한마디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무슨 일만 나면 “빨갱이다, 저 빨갱이들을 몰아내자!”를 외친다.
17일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행사권, 즉 스튜어드십 코드 방안에 대한 초안이 공개됐다. 애초 기대했던 것에 비해 매우 약화된 방안이었는데, 보수세력은 이걸 보고도 “빨갱이다!”를 외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너무 대놓고 “빨갱이다!”라고 외치기에는 좀 쑥스러웠는지 어디서 주워들은 ‘연금사회주의’라는 용어를 들고 나왔다. 벌써 용어가 고급져 보이니까 보수세력도 이 용어를 이용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색깔론으로 공격하고 나선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강화’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원론적으로 주식회사의 의사결정은 주주총회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주주총회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자는 주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이 바로 이런 기관이다. 한국 재벌들의 주식 보유 양이 워낙 적기 때문에 국민연금은 수많은 기업들의 주요주주, 혹은 최대주주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민연금은 ‘대주주의 파워’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국민연금의 이런 행태를 바꾸겠다는 정책이다. 스튜어드는 대저택에서 일하는 집사나 청지기라는 뜻이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재산을 관리하는 국민의 청지기이므로, 국민들의 돈을 자기 돈처럼 여기고 불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주총회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재인 정부는 오래 전부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할 의지를 밝혔다. 반면 보수세력은 6개월 동안 줄기차게 색깔론을 이용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공격했다. 국가가 연금을 통해 기업을 지배하는 사회주의를 추진하고 있다는 거다.
중앙일보 6월 1일자 사설의 제목은 ‘국민연금 악용하면 연금사회주의로 변질된다’였고 조선일보 7월 12자 기사 제목은 ‘국민 노후자금, 연금사회주의 볼모로 잡혔다’였다. 그리고 동아일보 6월 7일자 사설 제목은 ‘국민연금 주주권, 연금사회주의 도구로 전락 안 돼’였다.
연금사회주의 어원은 알고 떠드시는지?
무식한 조중동은 연금사회주의를 빨갱이 때려잡는 용어쯤으로 이해하는 듯한데, 원래 이 용어는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의 작품이다, 드러커는 철저히 경영의 관점에서 기업을 바라본 사람으로 자본 편에 훨씬 가까웠던 인물이다.
드러커가 연금사회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76년에 출간한 책 ‘보이지 않는 혁명:어떻게 연금사회주의는 미국에서 일어났나’라는 책에서였다. 그렇다면 드러커는 왜 이 용어를 만들었을까? 조중동이 하는 짓처럼 “연기금이 빨갱이 짓 하고 있다!”는 색깔론을 위해서였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드러커는 오히려 연금사회주의라는 말을 미국의 경제시스템을 자랑하기 위해 만들었다.
드러커의 말이 이렇다. “사회주의를 노동자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로 정의한다면 미국은 최초의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퇴직연금이 미국 주요기업의 지배적 주주가 됐기 때문이다. 연기금은 노동자들이 맡긴 돈이다. 따라서 미국 기업의 실질적 소유주는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다.”
즉 드러커는 연금사회주의라는 용어를 미국과 대립했던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했다. “소련 같은 나라들은 말로만 사회주의지 노동자가 기업을 소유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 미국을 봐라. 연기금을 통해 사실상 노동자들이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약 오르지? 우리가 훨씬 우수한 시스템이고 친노동자적인 시스템이다” 뭐 대충 이런 뉘앙스였던 것이다.
자기네 편의 대부는 연금사회주의를 자본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 썼는데, 무식한 조중동은 그게 빨갱이 때려잡는데 쓰는 말인 줄 안다. 조중동 이야기대로라면 지금 미국은 전형적인 연금사회주의 국가다. 그래서 좋냐?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여서 행복하냐고?
스튜어드십 코드는 완성품이 아니다
더 웃긴 대목이 있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겠다고 나선 때가 2016년 말이었다는 사실이다. 2016년은 박근혜 정부 때였다. 이 해에 기획재정부에서 2017년 새해 중요 정책 과제로 내세운 게 연기금과 보험사 등 기관투자가들의 스튜어드십 코드 시행이었다.
박근혜가 할 때에는 입 닥치고 있다가 왜 지금 와서 빨갱이 운운하며 난리신지 누가 설명 좀 해 달라. 아, 박근혜는 국민연금을 동원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도 찬성해 주는 아주 친 재벌적이고 아주 착한(응?) 스튜어드십 코드라서 괜찮았다고? 진짜 놀고들 계신 거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사회주의는커녕, 철저히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제도다. 그래서 주주자본주의가 발달한 영미권 국가에서는 아주 일상적인 제도로 정착됐다. 미국, 캐나다, 일본 등 20여 개 선진국이 이 제도를 시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각해보자. 국민연금의 최대 과제는 투자한 주식의 주가가 오르는 것이다. 그래야 국민들의 재산인 연금을 잘 보호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경영 능력이라고는 개뿔도 없는 조양호 일가나 박삼구 일가는 당연히 퇴출돼야 한다. 이건 사회주의적인 발상이 아니라 주주의 이익을 철저히 수호하는 매우 자본주의적인 발상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좋은 제도이지만 완성품이라고 볼 수 없다. 오로지 주주의 관점에서 기업 경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반드시 도입돼야 하는 제도가 노동이사제다.
국민연금은 주주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고, 노동이사는 이사회에 참여해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한다. 이렇게 이중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면 박삼구나 조양호 일가처럼 경영을 개판으로 하고도 가족들이 몇 대 째 기업을 세습해 말아먹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스튜어드십 코드는 절대로 사회주의적인 제도가 아니다. 정상적인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없는 재벌 중심의 ‘개판 자본주의’를 수정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여기에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한 노동이사제가 가입된다면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좋은 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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