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걸림돌을 만드는 이유
» 제2차세계대전 도중 바르샤바에서 유대인들을 체포하는 나치군인들. 사진 픽사베이
한자에서 오지 않은 순수한 우리 말 중에 ‘길’이 있습니다. 손으로 소통하는 길은 손길, 발로 소통하는 길은 발길, 물이 가는 길은 물길, 불이 가는 길은 불길이라 하지요. 참 아름다운 말들입니다. 길은 이렇게 서로를 잇기 위해 생겼을테지만, 남의 땅을 정복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해 온 것 같습니다. 이런 길 위에 뜻하지 않게 놓여있는 것이 걸림돌입니다.
평탄한 듯 하던 길에도 걸림돌은 언제라도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 삶인 것 같습니다. 오로지 나쁘기만 한 것도, 오로지 좋기만 한 것도 없듯이, 걸림돌도 우리를 곤혹하게만 하는게 아니라,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잊고 싶은 것을 기억시켜 주기도 합니다.
독일의 동넷길에는 일부러 만들어 놓은 작은 걸림돌들이 있습니다. 1993년 부터 군터 뎀니히라는 한 예술가는 독일의 나치 체제하에서 추방, 고문, 자살, 학살당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독일인들 자신에 대한 경고로서 ‘걸림돌 (슈톨퍼 슈타인)’이라 이름 붙인 추모비를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가로 세로10 cm가 채 안되는 놋쇠로 된 이 작은 ‘돌’들은, 그들이 게슈타포에 체포될 때까지 살았던 주택 앞 길 보도블럭의 사이에 박혀 있습니다.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게 아니라, 돌 혹은 시멘트와 놋쇠라는 서로 다른 재료와 크기 때문에 오는 시각적인 걸림돌입니다. 돌 하나에 한 사람! 이름과 생년, 체포된 날과, 언제, 어디에서 ‘살해’되었는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이 많이 살았던 동네에는 한 집 앞에도 수많은 걸림돌이 박혀 있는데, 이름과 생년으로 3대가 몰살 당했음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탐사와 성금으로 주문제작 되는 이 돌들은, 공공의 보도에 설치되기 때문에 시의 허락을 받아, 작고 큰 추모식을 통해 안장됩니다. .생존 유대인들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행인들에 의해 밟혀진다고 반대하기도 했고, 나치독일이 계속 기억되는 불쾌함을 반대하는 독일인들도 많았고, 실제 700 여개의 돌들은 파헤쳐져 도난되었거나 시커멓게 페인트칠 되었기도 하지만, 유럽 전역과 아르헨티나까지 퍼져나가고 있어 2018년 현재 7만여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개나리 조차 볼 수 없이 더디기만 한 봄을 재촉이라도 할 양으로 오랫만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산책하러 나갔다가, 유난히도 많은 ‘걸림돌’들이 있는 거리에 들어섰습니다. 거대한 추모비들과 달리 누구나가 사는 동넷길에 있는 이 걸림돌에는 이렇듯 무심코 걷다가 걸려버립니다. 또 다시 돌 하나 하나에 새겨진 지극히 요약된 그 누군가의 생애에 마주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았던 집을 쳐다봅니다. 우리 곁에서 살던 한 사람, 한 이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추상적인 역사로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한 사람의 삶이기에 마음으로 바로 뚫고 들어옵니다. 숙연한 마음으로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나, 모든 아픈 마음이 치유되길 기원합니다.
천년 제국을 꿈꾸던 나치는 10여년 만에 멸망해 버렸지만, 그 체제가 입힌 상처는 70년이 넘도록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이것은 독일에만 국한되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치유는, 얼마가 걸리던 간에 아픔을 알아주고, 함께 나누며, 잊지 않을 때에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불쾌한 것,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상기시키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치유는 더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할겁니다. 제발, ‘이젠 그만 됐다’고 먼저 말하지 마세요. 그말은 상처 입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에겐 그래서 걸림돌이 필요합니다. 간사한 마음이 잊어버리고 싶을 때, 다시 일깨워줄 수 있는 걸림돌 말이지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