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통일이여 걸어서 오라, 한 걸음 한 걸음 뒤따라오라
소설가 박민규
입력 : 2018.04.26 22:02:00 수정 : 2018.04.27 00:01:49
ㆍ27일, 남북 정상 11년 만의 동행
그저 날씨나 좋았으면 좋겠다. 화창하고 눈부신 날이면 고맙겠지만 아니어도 나는 족하다. 겨우 근근이 봄이구나, 싶은 하늘이면 또 어떠한가. 설사 날이 궂더라도 오는 이의 표정을, 또 맞이하는 이의 기다림을 서로가 알아볼 정도라면 나는 좋겠다. 오래전부터 당신은 손님이었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이산가족인 나 같은 사람에겐 더더욱 그러하다. 1974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될 당시 조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의 얼굴에 서린 당신의 이름을 나는 또박또박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글씨를 못 읽는 꼬마였고 조부는 남하한 함경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조합이란 이유만으로 나는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끝내 오지 않는 손님이었다.
이제 당신이 오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오늘 모두가 그 광경을 지켜보겠지만, 거기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실망할 일도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미 지난 세기의 염원이고 이름이다. 어서어서 당신이 오기를 바랐던 이들은 대부분 눈을 감았고, 어서 당신이 오기를 재촉했던 이들도 미련을 접은 지 벌써 오래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는 세대들이 이미 자랐고, 그들에게 당신은 딱히 간절하거나 그리운 이름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당신 없이도 그런대로 살아왔다. 당신이 머물러 있을 그 길가에 희망이란 이름의 꽃들이 아직 피었나 모르겠지만, 풀 한 포기 없는 길이라도 누굴 원망할 처지가 아님을 우선 나부터가 잘 알고 있다. 불쑥, 어서 올 생각 아예 말아라. 어서어서 서두르다 넘어지지 말고 그러니 통일이여, 걸어서 오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오라. 어떠한 부담과 희망… 원망 없이 통일이여, 걸어서 오라.
우선은 그저 서로의 ‘실익’을 얘기하자. 하나의 겨레였느니 그딴 소리 접어두고 이익과 생존을 목표로 한 ‘각자’와 ‘각자’로 서로를 존중하자. 한 걸음 한 걸음 끝까지 너는 너를 위하고 끝까지 나는 나를 위하자.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나를 위한 일이 너를 위한 일이었음을, 그래서 너가 나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각성하자. 그토록 서로가 떠들던 통일이란 말이 그래서 지난 세기의 철지난 단어임을 자각하자. 한바탕 굿판처럼 돌아갈 카메라들, 침 발린 소리들도 이내 바로 잊어버리자. 분단이 만든 괴물들이 여전히 서로의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자각하고, 분단을 부추긴 괴물들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잊지 말자. 그러니 살자, 같이 살자. 그리고 같이 걸어가자. 동행하자. 역사라는 수레를 끄는 두 개의 바퀴처럼, 나란히 동행하자. 그래서 나는 그저 날씨나 좋았으면 좋겠다. 허튼 이념 허튼 소리 오지도 않을 손님 더 이상 떠들지 않고 실익과 생존을 위해 남북이 동행하는 첫날이 오늘이기 때문이다. 껴안지 않아도 좋고 손잡지 않아도 나는 족하다. 그저 동행하기 좋은 봄날이라 그게 기쁘고, 나란히 이어질 두 개의 궤적을 따라 비로소 누군가가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여 그저 걸어가자. 동행하자. 통일은 염원이나 소원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족적이고, 동행하는 우리의 기나긴 그림자에 다름 아니다. 기다리지 않고 우리는 간다, 가겠다. 그러니 통일이여, 걸어서 오라. 한 걸음 한 걸음 뒤따라오라. 그저 봄날일 뿐이고 동행할 뿐인데 근근이 봄이구나, 싶은 이 하늘에도 왜 이리 족한지는 알 길이 없다. 그저 나란히 걷는 이 봄길이 왜 이리 부시고 아름다운지도 나는 모르겠다. 동행(同行)이 곧 통일이다. 걷고, 또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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