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기고➀ 극우파시즘과 음모론
- 김내훈 작가(‘프로보커터’, ‘급진의 20대’ 저자)
- 발행 2025-03-03 17:56:10
편집자주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에 따른 내란 사태는 1월 19일 서부지법 폭동을 거치며 극우파시즘의 발호를 안팎에 과시했습니다. 수면 아래에 있던 극우세력의 음모론적 주장과 폭력적 양태가 거리를 채우고, 보수여당마저 끌려가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극우파시즘이라는 낯선 현상에 많은 이들이 당황하고 걱정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의 억압적 통치와 달리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중국타도와 부정선거를 외치는 오늘의 극우파시즘은 낯설고 당혹스럽습니다.
윤석열이 탄핵되고, 여당의 재집권이 저지돼도 극우파시즘의 폭주가 제어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극우파시즘이라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깊이 파악하는 것이겠습니다.
그간 여러 방면에서 관련 문제를 다뤄온 연구자, 전문가들의 기고를 몇 차례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극우 파시즘을 넘어 더 진보하고 진화하는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나에게 수개월째 지속되는 증상이 하나 있다. 휴대전화를 켰을 때 카카오톡 메신저 아이콘에 100을 넘기는 숫자가 떠 있는 것을 보면 늘 가슴이 철렁거린다. 애플리케이션 아이콘에 떠 있는 숫자가 많으면 괜히 거슬리고 불편해지는 강박 같은 건 아니다. 누군가의 중요한 연락을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아니다.
나를 철렁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학창 시절에 만나서 지금까지도 자주 교류하는 절친한 친구들과 함께 만들고 십여 년째 지속하고 있는 단톡방(단체대화방)이다. 애초부터 ‘출근하기 싫다’, ‘너무 춥다’와 같은 별 의미 없는 말들을 숨 쉬듯이 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단톡방이기 때문에, 잠시만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금세 안 읽은 메시지가 수백 개가 되는 건 예사로운 일이었고 이에 반응을 안 한다고 해도 뭐라 하는 친구는 없었다. 그렇게 편하고 좋은 친구들이지만, 그런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내가 안 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까 노심초사하기 시작한 것은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부터다.
휴대전화를 잠시 안 보고 있던 사이에 ‘헌법재판관 임명에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는데 야당이 대통령 권한대행마저 탄핵하는 건 야당의 폭정이고 독재 아니냐’, ‘야당이 시민들 카카오톡을 검열하고 이재명 욕하면 처벌하는 법을 만든다는 게 사실이냐’, ‘민주당은 왜 간첩법 개정에 반대하냐’, ‘문형배 헌재소장 대행이 음란물을 공유했다더라’ 따위의 이야기를 나누며 야당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뒤늦게나마 사실관계를 정정해준다. 그러면 일부는 이를테면 ‘오마이뉴스는 좀...’이라는 식으로 말끝을 흐리며 팩트체크 기사의 출처의 신뢰도를 의심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를 여전히 존중하고 있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이야기했던 것이 ‘가짜뉴스’였음을 인정한다.

다행인 것은, 팩트체크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당 세력과 극우 혹은 내란 옹호 세력의 흑색선전, 음모론, 내전 및 내란 선동, 혐오적 극언 등을 포함한 일체의 가짜뉴스를 인용 보도만 하고 사실관계의 정정이나 맥락 설명은 일절 없는 언론을 우리는 비판하지만, 언론의 본령을 다하는 언론사는 없지 않고, 많다. 적어도 내란 사태와 탄핵 심판 관련한 사안에 있어서는 그때그때 기민하게 가짜뉴스에 반박하고 전후 상황을 잘 정리하는 기사는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쉬운 일, 가짜뉴스로부터 키워드 두 개만 추출해서 검색창에 입력하면 곧바로 팩트체크 기사를 찾을 수 있는 10초도 걸리지 않는 일을 직접 능동적으로 해낼 의지를 그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단톡방을 주시하며 친구들에게 언제든 팩트체크 기사를 떠다 먹여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날 이후 가짜뉴스를 공유하는 친구들에게
수시로 팩트체크를 한다
나는 친구들에게 배달 음식 시킬 때 고민하는 시간의 십분의 일만큼이라도 써서 신문 기사를 읽으라고 권한다. 그럴 때마다 ‘바빠서 어쩔 수 없다’, ‘도대체 뭘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일하느라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 여기저기서 온갖 정보가 쏟아지는 바람에 무엇을 걸러내고 수용해야 할지 알지 못하여 극심한 피로감과 환멸을 느끼고 결국에는 일체의 정치 뉴스에 대한 관심을 끊게 된다(그러면서도 가짜뉴스의 선정적인 헤드라인에는 반응한다). 최종적으로, ‘진실’이라는 것 자체를 불신하고 냉소하게 되며 무미건조한 ‘팩트’마저 당파성의 산물이라는 의심을 품게 된다.
가짜뉴스의 범람으로 인한 담론 오염의 가장 심각한 폐해가 바로 이것이다. 가짜뉴스를 비롯한 일체의 선동이 문제인 이유는 그것을 믿는 사람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미국의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Lee McIntyre)는 [누가 진실을 전복하려 하는가]라는 책에서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포함한 탈진실 시대의 정보 공작을 ‘역정보(disinformation)’라는 더 넓은 개념으로 범주화한다. 그에 따르면 역정보의 핵심은 진실을 은폐하거나 없앨 수 없으면 개소리로 둘러싸고 거짓을 쏟아내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데 있다. 그렇게 사기가 꺾이면 진실을 파악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며, 이러한 형국이 지속되면 거짓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마저 결국에는 진실이라 일컬어지는 모든 것이 당파성에 종속된 것이라는 불신과 적대감을 가지게 된다고 매킨타이어는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공작을 ‘disinformation’라고 명명한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본래 냉전기 첩보전의 정보 교란을 일컫는 말로 쓰였지만, ‘dis’라는 접두사가 무언가를 부정, 반대하거나 해체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상기하면 도대체 뭐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극도의 사회적 혼란과 좌절마저 초래하는 교란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더없이 탁월하다.
따라서 가짜뉴스는 오늘날 역정보의 폐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역정보로 인한 과학 부정과 역사 부정이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는 인지능력의 저하 및 인지의 편향의 출발점에는 이른바 ‘바이든 날리면’ 사건이 있다. 전 국민에게 듣기평가 시험을 치르게 한 이 희대의 사건은 생생하게 들리는 육성마저 당파성, 지지하는 정당, 이념에 따라 해석에 열린 무언가로 바꿔버렸다. 뉴스토마토가 미디어토마토에 의뢰해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윤석열의 문제의 발언에서 ‘바이든’을 들었다고 한 응답이 58.7%, ‘날리면’으로 들었다고 한 응답이 29.0%, ‘모름’은 12.4%로 집계되었다.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는 65.0%가 ‘날리면’으로 들었다고 응답했다. 대통령과 정부 및 여당은 언론을 압박하며 현실마저 자기 마음대로 조작한 것이며, 일부 무시 못 할 규모의 대중은 그 농간에 기꺼이 놀아났다. 객관적인 것을 눈앞에(혹은 귀 앞에) 두고 그것을 A로 인식하냐 B로 인식하냐에 따라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유추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진실이라는 것이 저기 어딘가에 있어서 언제가 되었든 결국에는 발견되고 드러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짜뉴스 등의 역정보에 휘둘리지 않는 혹은 휘둘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체크와 정정만 하면, 혹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자연스레 해결되리라 안일하게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진실이란 언젠가 발굴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투쟁의 대상이자 산물이며 적극적으로 구성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에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수십 편의 논문으로도 모자랄 터이지만, 쉬운 이해를 위해 예를 들면 ‘야당이 탄핵을 남발했다’라는 주장은 백번 양보해서 ‘사실’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정부와 여당은 이 주장을 밀어붙여 ‘야당이 탄핵 남발로 국정을 마비시켰다’라는 주장을 내놓는데 이것은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 이에 대응하려면 사실관계를 정정하는 것을 넘어서 과거로부터 여러 사례와 사실들을 적극적으로 길어 올려서 하나의 새로운 형상을 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진실이 상대주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의 구성 요소로서 사실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공통된 인지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성장한 문화권에 따라, 교육의 여하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으로서 타고난 생태적 조건,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공유된 인지 체계는 의사소통의 최소 조건이며 이것이 있어야만 기초적인 사실 판별이 가능하다. 이것은 일종의 게임의 규칙과 같으며, 진실을 둘러싼 투쟁은 게임의 규칙을 따르면서 경합하는 과정이다. 역정보는 이러한 규칙을 붕괴시키며, 최종적으로 의사소통의 최소 조건을 붕괴시킨다. 역정보로 인해 진실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극으로 치닫는 형편에서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도 서로 전혀 다른 것을 보고 듣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언론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형편에서 다수 언론은 항상 쉬운 길을 택한다. 가짜뉴스나 음모론, 극언 등을 말하는 정치인이나 유명인을 단순히 인용 보도만 한다거나, 그가 하는 이야기를 더 들어보겠다는 이유로 방송에 출연시키거나 하는 것은 의도 및 취지와는 무관하게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진실 도살자’ 혹은 적어도 ‘방관자’다. 더불어서 편파적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양쪽 진영’의 입장을 기계적으로 양분하여 보도하는 것 역시 진실 도살에 일조한다. ‘바이든’을 ‘날리면’으로 들은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 부정선거 음모론, 선관위에서 중국인 간첩 99명이 체포되었다는 보도를 믿은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을 균형 있게 다루는 것은 최악의 방법이며, 양 진영이 마치 해석이나 선택, 신념의 문제인 것처럼 만든다. 다시 말해, 그러한 음모론이나 가짜뉴스를 믿지 않는 것 또한 어떤 편향의 결과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로써 추가로 전달되는 암시는 진실이 양쪽 의견 사이 중간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이 어딘가에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안일하게 믿고 있는 동안 진실은 점점 더 갈수록 빠르게 극우로 기울게 된다.

중립을 자처하며 양비론에 선 많은 이들이
극우화 물결에 합류할 것을 우려한다
친구들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친구들이 부정선거 음모론이나 중국인 간첩 관련한 음모론, 가짜뉴스를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석열의 계엄선포와 내란 행위를 옹호하지도 않고 탄핵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왜 이 친구들은 역정보가 담긴 기사를 단톡방에 공유하는 걸까? 이들은 중립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탄핵 찬성’과 ‘탄핵 반대’ 사이에 중립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양쪽 의견이 각자 편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이들이 자처하는 중립은 구색만 갖춘 양비론이자 정치혐오다. 이러한 탓에 내란을 일으킨 자 및 그를 옹호하는 세력과, 위험을 무릅쓰고 국회의사당 담을 넘어 계엄 해제를 가결시킨 세력을 둘 다 똑같이 나쁘다고 하는 ‘거짓 등가성’의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탄핵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탄핵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소동과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탄핵의 당위와 정당성에 시비가 걸리는 상황에 아주 쉽게 동요하게 된다. 말하자면, 말이 안 된다고 느끼겠지만, 이들은 윤석열과 그를 옹호하는 여당을 매우 싫어하며, 윤석열이 탄핵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되 탄핵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는 않지만 탄핵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조기대선이 치러져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내 친구들에 한한 이야기를 섣부르게 일반화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마저도 중립이나 중도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어떤 심리나 논리의 단초는 내 친구들의 사례로부터 얻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부에서는 소위 ‘2030 남성’이 극우화되었다며 우려를 표하고, 다른 일부에서는 여전히 ‘2030 남성’의 탄핵 찬성률이 높게 집계된다며 안도를 표하지만, 위와 같은 ‘~이기도 하고 ~이 아니기도 한’ 상태는 여론조사만으로는 결코 파악이 안 된다. 이 상태를 안일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 뭇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2030 남성’뿐만 아니라, 중도를 자처하며 양비론을 채택하고 있고 진실을 향한 열정을 결여한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여론조사의 ‘탄핵 찬성 측’에 암약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엄청난 극우화의 물결을 일으킬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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