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원 이슈&탐사팀장
입력 : 2023-08-09 04:08
구속영장은 왜 ‘친다’고 하는 것일까. 애초 명랑할 리 없는 상황에 ‘친다’는 말까지 더해질 때면 어두운 조사실에서 종이뭉치가 던져지기라도 하는가 하는 상상이 일었다. 서류가 뭔가를 때리는 용도일 리 없고 ‘친다’는 말은 법문 어디에도 없는 술어(述語)건만, 수사를 하는 쪽도 받는 쪽도 유독 영장을 친다고들 입말을 했다. 궁금해 물으면 영장을 치는 이들도 말의 연원을 잘 몰랐다. 혹자는 범죄사실을 탁탁 쳐 기재하던 타자기 시절 굳어진 말이 아니겠냐 짐작했다. 일견 그럴듯하다 여기면서도, 공소장은 또 ‘친다’ 하질 않으니 속시원하지가 않았다.
판결은 또 왜 ‘난다’는 것일까. “결국 무죄가 났다”거나 “유죄가 나지 않았느냐”고 두런대는 말을 들으면, 엉뚱하게도 촉촉한 땅에 푸성귀 따위가 비죽 솟아오른 장면이 떠올랐다. 없던 것이 생겼다는 뜻일까, 콩 심은 데 콩 나듯 뿌린 그대로 됐단 의미일까. ‘판가름 나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표현이 영 이상하지야 않았다. 그럼에도 ‘난다’는 말은 뭔가 분석을 초월한 종합적 의미가 담긴 느낌을 줬다. 수학 문제 정답을 얻는 과정 같은 것이었다면 ‘풀었다’나 ‘찾았다’가 따라붙지 않았을까 싶었다.
한 변호사는 소송을 ‘건다’는 말이 오묘하다고 했었다. 누군가를 걸고넘어질 때의 ‘건다’는 의미가 일단 떠오르고, ‘비상을 건다’고 할 때처럼 긴급한 요청의 뜻도 있는 듯한데, 한편으론 ‘운명을 건다’거나 ‘시동을 건다’고 할 때의 행위들도 약간씩 통하지 않더냐는 풀이였다. 똑같이 법원 주변에서 거는 일이더라도 소송을 ‘걸다’와 공탁을 ‘걸다’와 압류를 ‘걸다’가 조금씩 달랐다. 국어사전 속 모든 ‘걸다’를 아무리 잘 직역해도 외국인에게 소송 제기나 공탁 신청을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번역을 통과할 때 잃어버리는 부분이 거꾸로 문학의 핵심이라 했던가, 유독 특별하게 호응하는 서술어는 생활사적 함축이었다. 은어 같은 그 말들을 알아듣거나 구사하지 못하면 기자가 현실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집값과 주가는 빠지고, 정책은 ‘메이드’하고, 연습량과 자세는 가져가는 것이었다. 얘기는 물고, 의혹은 파고, 마감은 짓고, 기사는 올리거나 내려야 했다. 사건은 왜 잘 포장되거나 배달되지 않고 알 수 없는 곳에서 터지기만 하는 것일까, 혼비백산한 틈에도 “말 그대로 터졌구나” 공감하곤 했다.
이웃하는 말 자체에 칭찬과 비난을 깃들게 하는 힘센 술어도 있었다. 술어가 주어나 목적어의 자아까지 간편히 규정할 때, 억울한 쪽은 입말에 갇힌 개별적 존재들이다. 한 검사는 세상이 이제 조서를 ‘꾸민다’고 말하는 게 일반화됐다며 염증을 냈다.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에 있던 한 교사는 “‘가르친다’고 하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고 했다. 이제 누가 누군가를 향해 그 말을 할 때는 감사와 존경은커녕 비아냥의 의미가 크다. ‘노력한다’ ‘희생한다’ 같은 건 어느덧 함부로 건넬 수 없는 말이 돼 있다. 잘 봐 주더라도 칭찬이 아니라 미련을 탓하는 말이다.
받아썼다거나, 싸질렀다거나, 딴에는 애쓴 것들을 향해 이런저런 술어가 다가와 부딪히는 데에도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말뜻이 파생되고 사전이 길어지는 건 언어가 사유의 집이므로 자연스러울 것이다. 다만 이 변화는 옳고 그름, 있고 없음보다 좋고 싫음이 우선인 세계를 말해주기도 한다. C.S.루이스는 “사람들이 사실을 기술하기보다 호불호를 표현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때” 단어가 욕설이 되고 이윽고 죽어간다고 했다. 진실을 ‘원한다’는 말에도, 어쩌면 원하는 진실이 따로 있다는 진실이 서서히 스며들지 않을까.
이경원 이슈&탐사팀장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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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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