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장난감의 매력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고도 아무런 잔소리도 뒤끝도 없다. ‘어른의 아버지’인 통찰력 있는 아이들은 그걸 재빨리 알아차리고 공룡, 자동차, 레고, 인형을 가까이한다. 어른이 되고서도 장난감 하나 장만하면 좋다. 아무런 군말 없이 항상 나를 기다리는 책도 참 그윽한 장난감이다. 노후를 대비하여 옥편과 국어사전을 곁에 두기로 했다. 노안으로 흐릿해진 전방처럼 그동안 너무 대충 알고 너무나 대강 말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의 주말. 심술궂은 날씨의 훼방으로 집에서 뒹굴게 되었다. 소파, 텔레비전, 식탁 등 똑똑하다는 명사들의 세계에 머무는 동안 몸도 물건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느낌이다. 오후가 되자 머리는 두부처럼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국립국어원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어 어휘는 대략 44만개라고 한다. 이 중 명사는 34만개, 동사는 7만개이다. 명사가 많은 사회는 딱딱하게 굳은 사회다. 명사가 소유를 대변한다면 동사는 존재를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다. 명사보다는 동사를 많이 사용할수록 세상은 넓어진다. 움직일수록 몸이 부드러워지고 건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입시 공부에 짓눌렸던 고등학교 시절, 그 어디로 떠나는 시외버스를 보면 무조건 집어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느 날 부산 북부터미널을 지나칠 때, 나중에 어른이 되면 우리나라의 모든 읍 이상에서 일박을 해보자는 퍽 희한한 결심을 하기도 했었다. 그 이후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 어른을 지나 노인이 되어 간다. 점점 동사의 세계에서 명사의 시간으로 옮긴다. 헤아려 보니 우리나라의 시와 읍은 무려 300개에 육박한다고 한다. 고작 삼 백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여러 약속과 억압에 시리는 몸이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푸릇한 시절의 소박했던 그 꿈을 잊은 적은 없지만 이제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제자리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았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우리말을 한번씩이라도 호명하자는 것이다. 저 옛날 초등학교 교실의 분단처럼 열맞춰 앉아 있는 단어들을 손가락으로 쓰거나 입술에 올려놓고 불러주는 것, 기역부터 히읗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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