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훈 기자 qa@vop.co.kr
국민의힘은 애초 ‘작년 4.15 총선에서 부정이 발생했고, 김 대법원장이 이와 관련해 넘겨진 재판을 고의적으로 지연시키고 있다’는 주장에 기초해 김 대법원장 탄핵 및 사퇴론을 폈다. 하지만 부정선거 프레임이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탄핵 심판대에 오른 임 부장판사를 발판 삼은 공세로 전환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4일 오전 비대위 회의에서 “김 대법원장은 취임 후 정권 하수인 노릇을 하며 무려 100명 넘는 판사를 검찰 조사로 넘겼고, 안타깝게도 80여명 판사들이 법복을 벗었다”며 “이후에도 김 대법원장은 정권의 판사 길들이기에 비겁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임 부장판사의 사표 수리를 하지 않으며 후배를 탄핵의 골로 떠미는 모습까지 보였다”고 말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도 이날 오후 임 부장판사 탄핵안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의사진행 발언에서 “김 대법원장은 ‘사표를 수리하면 국회에서 탄핵 논의를 할 수 없게 돼 비난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며 “임 판사를 국회 탄핵소추에 희생 제물로 넘겨주기로 ‘탄핵거래’를 한 것이라는 논란에 휩싸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의힘 논리는 임 부장판사 탄핵안에 대한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의 모호한 태도나 김 대법원장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벌어진 사법농단 문제와 관련해 보여온 보수적이고 조직중심주의적 행보, 임 부장판사와의 대화에서 탄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 것에 비춰봤을 때 상황 인식이 결여된 ‘무지한’ 주장에 가깝다.
정부는 무대응 원칙에 여당 지도부는 당론 채택도 못했는데 ‘탄핵 거래’라니
우선 민주당 지도부는 이탄희 의원 등의 탄핵 주장에 다소 회의적인 입장이었고, 문재인 정부 역시 탄핵과 관련한 별도의 공식 입장을 내놓은 적이 없다.
정부가 판사 탄핵과 관련해 입장을 보이지 않은 건 삼권분립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원론적인 기조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애초 문제의 시발점이었던 사법농단 사태를 대한 태도와도 동일하다.
‘탄핵소추’를 제기할 권한이 있는 민주당의 경우, 오히려 지도부가 탄핵안에 회의적이었다. 이는 사법농단 사태에서 드러난 고법 부장판사 등 고참판사 중심 법관 사회 전반의 조직보신주의적 태도 등을 고려했을 때 자칫 사법부와의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검찰개혁과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지휘권 발동에 대한 윤석열 검찰총장의 저항 국면에서 추 전 장관과 윤 총장을 필두로 한 검찰 조직 간 갈등 과정에 대중들이 피로감을 느꼈던 선례를 교훈 삼아,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굳이 갈등 이슈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중이었다. 결국 민주당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임 부장판사 탄핵을 ‘당론’으로 채택하지 않고 ‘탄핵 추진을 허용한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거리두기’를 했다.
‘탄핵 반대론자’가 탄핵 추진을 왜 하나?
김 대법원장은 오히려 탄핵 반대론자에 가까우며, 사법농단 문제에 대한 모호하고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해 결과적으로 사법부 수장이 사법농단 연루자들을 비호하는 듯한 효과를 초래했다. 그는 ‘양승태 사법농단’이 표면화됐을 때부터 조직주의에 기반해 문제를 키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뤄진 무더기 영장 기각 등 판사들이 사실상 조직적이고 전방위적으로 수사를 틀어막는 행위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김 대법원장의 지시로 이뤄진 법원의 자체조사에서는 ‘문제는 있지만 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식으로 사법농단의 위헌성이 축소됐고, 김 대법원장 역시 검찰 수사에 협조한다고 밝혀놓고 “특별조사단이 확보한 인적·물적 자료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공할 것”이라며 사실상 ‘조사단이 조사한 사안에 한해서만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자체조사 범위를 벗어난 수사나 이와 관련한 압수수색 등이 이뤄질 경우 ‘사법부 독립 훼손’을 명목으로 수사를 거부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기도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영장 판사들의 무더기 영장 기각과 판사들의 집단적 수사 저항 사태로 이어졌다.
따라서 김종인 위원장이 “김 대법원장은 취임 후 정권 하수인 노릇을 하며 무려 100명 넘는 판사를 검찰 조사로 넘겼다”고 한 말과, 국민의힘 법제사법위원회 위원들이 지난 3일 낸 성명 입장문에서 “김 대법원장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한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사건과 관계없는 법관들이 조사를 받고 억울한 기소와 연이은 무죄 판결로 법원을 들쑤시게 하며 내부 갈등을 조장했다”고 한 것은 사실상 틀린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 대법원장은 ‘사법농단의 진원지인 법원이 사법농단 재판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촉발된 특별재판부 도입 주장도 배척했다. 민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특별재판부 도입 법안이 논의되자 대법원은 국회에 의견서를 내 위헌론을 폈고, 결국 해당 법안 도입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또한 2018년 11월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우여곡절 끝에 사법농단에 대해 “징계 절차 외에 탄핵소추 절차까지 함께 검토돼야 할 중대한 헌법 위반 행위”라는 의결 사항을 김 대법원장에 전달했으나, 이를 국회에 전달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사법부 내 회의체에서 나온 ‘판사 탄핵이 필요하다’는 사상 초유의 의결 내용은 ‘일부 젊은 판사들의 의견’ 정도로 남게 됐다.
김 대법원장이 작년 5월 사표를 수리해달라고 요청한 임 부장판사와 나눈 대화 녹취록을 근거로 김 대법원장이 정권 차원의 탄핵 추진에 협조하려고 임 부장판사의 사표를 반려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오히려 해당 녹취록에는 김 대법원장이 ‘탄핵’ 자체에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툭 까놓고 얘기하면 지금 뭐 탄핵하자고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 수리했다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냐 말이야.”
“탄핵이라는 제도 있지. 나도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탄핵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데, 오늘 그냥 수리해버리면 탄핵 얘기를 못하잖아.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은 굉장히 적절하지 않아.”
이상은 녹취록에서 김 대법원장이 임 부장판사에게 ‘탄핵’을 언급한 대목이다. “탄핵하자고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라는 표현이 탄핵을 거래하고자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일까? 오히려 탄핵이 거론되는 데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에 가깝다. 심지어 “탄핵이 현실성 없고, 탄핵돼야 한다고 생각 안 한다”며 탄핵 논의 자체에 부정적인 인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결국 이 녹취록에서 드러난 문제의 본질은 김 대법원장이 임 부장판사 탄핵 논의에 동조하는 게 아니라, 사표를 수리했을 때 받을 법원 조직의 도덕성 훼손을 우려하는 조직보신주의적 태도다.
김명수는 정권과 친할 수 없는 인물
종합하면 김 대법원장은 정권이나 여당과 유별나게 친하게 지내거나 무언가를 결탁하는 게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간 김 대법원장과 정부 및 여당 지도부가 사법농단 문제에서 보여준 스탠스 등 맥락을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정권과 여당이 김 대법원장과 합작해 임 부장판사를 탄핵으로 이끈다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김 대법원장은 여권 핵심 인물이자 미래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김경수 경남지사의 ‘드루킹 사건’ 1심 유죄 판결을 내린 성창호 부장판사를 겨냥한 여권의 비판이 이어지자 “재판독립의 원칙이나 법치주의 원칙에 비춰 적절하지 않다”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법원 내부에서 발생했던 중대한 헌법 위반 사안들을 두고 지나칠 정도로 말을 아껴왔던 모습과 비교했을 때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수위의 발언이었다.
성 부장판사는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정운호 게이트 사건 영장 검토 시 취득한 수사기밀을 신광렬 판사에게 누설해 결국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보고되도록 했다는 의혹을 받던 사법농단 연루자로 재판을 받고 있다.
강경훈 기자
사회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