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 승인 2021.02.12 09:37
한겨레 21~27기 현장 취재기자 41명이 1월26일 “법조 기사가 데스크 주로 정권 편향적으로 작성되고 있다”는 취지의 성명을 냈고 이틀 뒤 사회부장과 법조팀장이 보직 사퇴했다. 편집국장은 내부에 사과 입장을 밝혔으며 성명에서 언급된 보도와 관련해 지면에서 사과했다. 이후 한겨레 편집국은 3일 소통을 주제로 2시간가량 토론했다. 건조한 두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복잡한 사건은 결말이 난 걸까.
한겨레 성명사태는 언론계 관심사였다. 몇몇 보수신문은 내부 문제에 성명하나 낼 수 없는 자신들의 부끄러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그저 성명을 정파적으로 소비했다. 그저 언론사 내 ‘친문’과 ‘반문’의 갈등이었을까. 한겨레 바깥의 진보성향 언론사에게 이번 사태는 ‘남 일’이 아니었다. 이번 사태는 진보성향 언론사 내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분화’다. 시작점은 조국 사태다. ‘문재인 정부는 어떤 권력인가.’ 지금 권력을 어떤 권력으로 이해하느냐의 차이가 한겨레 성명사태, 나아가 진보성향 언론사 내 갈등의 핵심이다.
여기 한 기자집단이 있다. 이들에게 문재인정부는 행정부 장악은 물론 174석 거대 여당으로 의회까지 움켜쥔 ‘권력’이다. 현 정부 핵심인 운동권 출신의 ‘내로남불’ 기득권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통해 낱낱이 드러났다. 이명박·박근혜정부와 동일잣대로 감시·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기자집단이 있다. 이들에겐 ‘선출직 권력’인 문재인정부보다 강한 ‘항구적 권력’이 있다. 검찰, 삼성, 조선일보다. 이에 대한 자각 없이는 이명박·박근혜정부 9년의 ‘퇴행’을 되풀이할 수 있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같은 비극은 반복할 수 없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당시 기자였던 지금의 진보성향 언론사 간부들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다. 이 트라우마는 ‘같은 상황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일종의 자기 주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데, 당시 검찰발 기사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들은 야만에 가까웠던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검찰개혁 필요성을 절감한다. 세상을 ‘혁명’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으며 한때 자신들을 ‘지사형 언론인’으로 인식했을 진보언론의 오래된 세대는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한 것처럼, 현 정부를 이해하고 있을 수 있다.
한겨레를 포함한 진보언론 내부에는 조국 전 장관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조중동과 보수 야당의 폐해가 더 심하니 ‘밀리면 안 된다’는 인식도 있었는데, 이는 진영논리로 치부하기엔 꽤 절박한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학생들이었던 진보언론의 젊은 세대에게 ‘밀리면 안 된다’는 인식은 보수 정부를 자신들과 동일시한 보수신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더욱이 ‘후배 권력’을 거론하는 몇몇 선배들의 태도와, 정당한 비판기사마저 ‘한겨레가 한겨레했다’며 냉소하는 ‘군중검열’은 현장기자들의 반감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모두 한겨레를 소중하게 생각하지만…가치판단 자체가 다르다”
2019년 9월5일 ‘우병우 데자뷰 조국, 문 정부 5년사에 어떻게 기록될까’란 제목의 ‘강희철의 법조외전’ 기사가 출고 4분 만에 삭제됐다. “한겨레 논조와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당시 기자들이 성명을 내고 “언론자유를 억누르겠다면 떠나라. 앞선 선배들처럼 청와대로, 여당으로 가라”고 주장했다. 김의겸 한겨레 선임기자가 청와대 대변인으로, 여현호 한겨레 논설위원이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으로 간 것을 빗대어 간부급 선배들을 비판한 대목이다.
그리고 41명의 기자들은 이번 성명에서 “한겨레는 2019년 9월 ‘조국 보도 참사’ 성명을 발표할 때와 견주어 달라진 게 없다. 조국 사태 이후 ‘권력’을 검증하고 비판하는 데 점점 무뎌지고 있다. 한겨레는 문재인 정권의 법무부에 유독 관대했다”고 주장하며 “데스크에서 구체적인 정황이나 물증 없이 ‘한쪽 편을 드는 기사’를 현장에 요구하며 설명하는 게 소통이 아니다. 더는 ‘법무부 기관지’, ‘추미애 나팔수’라는 비아냥을 듣고 싶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학의 출국 금지, 절차 흠결과 실체적 정의 함께 봐야’라는 제목의 사설에 대해선 “‘실체적 정의’를 위해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았던 상황을 옹호하는 논리로 쓰였다. 조국 사태 때부터 지적된 편 들기 식 보도가 이런 사설과 보도를 낳은 본질”이라며 “현재 법조 기사들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쓰여지고 있다. 그에 따른 부끄러움과 책임은 온전히 현장 기자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성명 직후 한겨레 노조 게시판에 올라온 익명의 글은 성명에 대한 또 다른 ‘기자집단’의 분노를 상징했다. 해당 게시글은 “거시적이고 신중한 고려가 없는 ‘성역 없는 비판의 칼날’은 어떤 경우엔 망나니의 미친 칼날이 될 수 있다”며 “여러분이 말한 것처럼 ‘특정 정파·좌우 진영 가릴 것 없이 공정한 잣대로 보도하는 것’은 절반만 좋은 저널리즘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게시글은 “한겨레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을 지지하지 않지만, 특정한 가치와 방향을 추구한다. 여러분이 가치와 방향에 대해서도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싶다면 한겨레에서 일하기보다 한국일보처럼 중도적인 성향의 매체로 옮기기를 권한다”고 쏘아붙였다. 이어 “젊은 기자들은 법조 보도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않으면 자칫 검사나 판사의 정교하지만 편협한 논리에 휩쓸려 ‘친검’, ‘친법조’ 기자가 되기 쉽다”고 주장했다. “여러분의 성명이 나오자마자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매체들은 신이 나서 기사를 쓰고 있다”고도 했다.
거친 단어의 공방에서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 “한쪽은 선배들이 여당 편향이라 하고, 한쪽은 후배들이 창간 정신을 모른다는 식이다. 합의는 안 되더라도 인식을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지금은 서로 경원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설에 대한 비판은 도식적인 것 같다. 선배들도 창간 정신만으로 후배를 설득할 수 없다. 모두 한겨레를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각자 그 이유가 다르고 가치판단 자체가 다르다. 새로운 가치에 대한 전반적 컨센서스 재검토가 필요하다.” 진보성향의 타 언론사 고위인사의 평가다.
“한겨레가 친정부적? 그런 기사 발견하기 어려웠다” 의미는
이번 성명에 이름을 올렸던 한겨레 기자는 “정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386과 동일시하지 않는 밀레니엄 간의 갈등이다. 세대 간 갈등과 각자 다른 신념에 따른 갈등이 맞물렸다”고 전하며 “조국 사태 때 성명을 냈는데 아무것도 안 바뀌었다. 오히려 되풀이되면서 누적된 분노가 터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역시 성명에 이름을 올렸던 또 다른 한겨레 기자는 “출입처 주의·복제 보도 관행에서 한겨레가 차별화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과 자기 일을 안 하는 데스크 문제 등이 맞물려 안 좋은 결과물이 나오고 있는 건데 성명만 보면 데스크가 민주당 이해관계에 복무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지시한 것처럼 보여 우려스러웠다”고 말했다.
성명에 이름을 올린 기자 중에서도 성명에 이견이 있는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미정 언론인권센터 정책위원은 1월29일 KBS라디오 ‘열린토론’에서 “논쟁적 이슈를 두고 격렬하게 싸우는 건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기자들이 주장하는 사례로 든 기사가 잘못됐다는 것은 동의한다. 하지만 밖에서 볼 때 한겨레가 친정부적이었다? 그런 기사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한겨레가 중심 못 잡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사를 많이 썼다고 생각한다. 편향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을 가지고 한겨레 정체성을 지키는 기사를 얼마나 잘 썼는가에 대한 반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타사 일간지 법조 출입 기자는 “한겨레 법조팀은 퍼포먼스가 하나도 없다. 요즘 한겨레 기사 중 눈에 띄는 건 삼성 말고 없다. 가끔 정부 편드는 기사를 쓴다는 생각은 하지만 추미애 기관지 정도로 폄훼하는 분위기는 못 느꼈다”고 했다. 한겨레 기자 성명 내용을 기사화한 미디어오늘 보도에 독자 이희용씨는 페이스북 댓글에서 “일방적인 검찰 주장을 옹호하는 기사를 작성한 것은 조중동을 포함해 한겨레도 예외는 아닌데. 데스크에 이의를 제기하기 전에 스스로의 기사에 대해 깊은 성찰은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적었다.
진보언론 독자들은 한겨레에 보수언론과 ‘다른 방식의’ 법조기사 취재 과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 지점에 대해선 한겨레 기자들이 답해야 한다. 진보성향의 타 언론사 고위인사는 “자사 법조 기사의 문제만큼이나 젊은 기자들이 근본적인 법조 취재 시스템의 변화를 국장·부장단에 요청하는 건 어땠을까. 검찰에 무게를 둔 현 출입처 제도보다 한겨레가 앞장서서 법원 중심 취재 시스템 개편을 동시에 요구했으면 어땠을까. 지금 검찰 중심의 법조 취재 시스템에 묶이면 부장단과의 간극이 고착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교수는 1월29일 KBS ‘열린토론’에서 “착한 권력이 있고 나쁜 권력이 있는 게 아니라, 권력을 나쁘게 쓰는 경우가 있고 잘 쓰는 경우가 있는 것일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나쁜 정부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정부가 쓴 권력이 제대로 쓴 것이냐 그렇지않느냐의 문제다”라고 전제한 뒤 “한겨레 기자들이 2019년에도 반발이 있었고 그때 정리가 잘 안 됐다. (청취자들은) 남의 집 불난 것을 이용하는 보도로 이 사안을 판단하지 말라. (성명 낸) 이 기자들도 이해당사자다. 데스크 목소리도 찾아 균형있게 봐야 한다. 이왕이면 이들이 쓴 기사도 찾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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