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상대방을 인정하는 자세에 대하여윤수현 기자 승인 2020.06.05 09:06
[미디어스=윤수현 기자] 대북 전단과 관련해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노동신문을 통해 “악의에 찬 행위들이 방치된다면 남조선 당국은 머지않아 최악의 국면까지 내다보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국내 다수 언론은 이 소식을 주요하게 전했다.
한겨레 이제훈 선임기자는 <김여정 “반공화국 삐라 조처 않으면 군사합의 파기 각오해야”> 기사에서 ‘북한’ 대신 ‘북쪽’이라고 표기했다. 왕선택 YTN 통일외교 전문기자는 4일 방송에서 ‘북쪽’이라는 단어와 ‘북한’이라는 단어를 함께 썼다. 한겨레를 제외한 대부분 언론은 ‘북한’이라고 표기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손을 맞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 |
이처럼 국내 언론에선 다양하게 표기하고 있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북쪽 지역’이라는 뜻으로, 사전적으로 “남북으로 분단된 대한민국의 휴전선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반도를 ‘대한민국’이라고 전제한 것이다. ‘남조선’ 역시 마찬가지다. 남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쪽 지역’이라는 뜻이다. 모두 남북 분단을 염두에 둔 말이다. 반면 북쪽·북측에 쓰이는 쪽·측은 방향을 뜻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북측·북녘이라는 단어를 상황에 따라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국내에서 있었던 ‘남북평화 협력 기원 남측예술단 초청 오찬 연설문’, ‘2차 남북정상회담 결과 대국민 보고’, ‘북미 정상회담 결과 관련 메시지’에서 “북한”이라고 말했다. 반면 문 대통령은 ‘북한 방문’ 연설에서 ‘북한’ 대신 ‘북측, 북, 북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2000년 언론계에서 ‘북한을 북측으로 통일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노컷뉴스 보도에 따르면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당시 기자협회·PD연합회는 남과 북을 공식 지칭할 때 '남측' '북측'을 쓰기로 합의했다. 김진향 통일부 산하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은 2018년 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남북 관계가 안 좋아지면서 언론 역시 합의를 잊었는지, 지난(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기조를 따라간 측면이 크다”면서 “남과 북을 동시에 지칭해야 할 시점에서 서로가 '남측' '북측'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대를 인정하는 자세로서 대화의 첫 출발”이라고 밝혔다.
지칭하는 단어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박정희 정부는 ‘북괴’(북한 괴뢰)라고 불렀다. 괴뢰는 ‘다른 특정 나라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는 국가를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1972년 문화공보부는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후 “종래의 북괴를 북한으로 호칭하고 김일성과 그 체제에 대한 중상비방을 삼가라”는 공보지침을 하달했다.
박정희 정부가 ‘북괴’를 ‘북한’으로 바꾼 지 반세기 가까이 흘렀다. 그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국제사회는 북측을 별개의 나라로 인정했다. 하지만 지칭과 관련된 언론사 규정은 없어 보인다. ‘북측’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합의한 기자협회는 <국가안보 위기 시 군 취재·보도 기준>(2012년 제정)에서 ‘북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한겨레 역시 기자에 따라 ‘북한’과 ‘북쪽’을 혼용하고 있다. 단어 선택은 언론사와 기자의 몫이다. 하지만 관행적으로 ‘북한’이라는 단어를 쓰는 대신 의미와 뜻을 고민해봐야 한다. 기사에 쓰이는 단어는 언론사의 가치관이 담겨 있으며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윤수현 기자 melancholy@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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