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세계적 비판 속 서안지구 합병 밀어붙이기
설마 그렇게까지 되랴 싶었는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합병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크네셋(Kneset)이라 일컬어지는 이스라엘 의회는 서안지구 합병안을 7월초에 표결에 부칠 참이다. 이스라엘이 1967년 이른바 '6일전쟁'(제3차 중동전쟁)에서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는 지중해변의 가자지구와 더불어 중동의 주요 분쟁지역 가운데 하나다.
불법 점령지를 이스라엘 영토로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점령은 국제법상 불법이다. 1967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안보리 결의안 242),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하고 군사통치를 펼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미국의 일방적 친이스라엘 지원에 기대어 서안지구의 30%쯤 되는 넓은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에 합병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서안지구 정착촌엔 45만 명 가량의 유대인 정착민들이 살고 있다(동예루살렘 일대에 불법적으로 건설된 이른바 뉴타운에 살면서 서예루살렘 쪽으로 날마다 출퇴근하는 유대인 20만을 합치면 65만 명). 서안지구 요르단 강변 서쪽에 자리 잡은 유대인 정착촌은 모두 132개에 이른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요르단 강의 물줄기를 독점하고 농장을 경영하면서 부를 일궈왔다. 현지 취재 때 가보니, 주변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농작물이 말라비틀어질 때도 정착촌의 스프링클러는 빙빙 잘 돌아갔다.
유대인 정착촌은 (지금은 실종된 것이나 다름없는) 중동평화의 '암초'라 일컬어졌다. 정착촌이 불법이기에 철수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정착민들은 못 들은척이었고, 걸핏하면 주변 팔레스타인 원주민들과 부딪쳐 왔다. 합병안이 통과된다면? 유대인 정착민들은 만세를 부를 것이고, 그 일대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은 다시금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0
이스라엘이 점령지를 불법 병합하려는 움직임은 전에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1980년 동예루살렘을, 1981년에는 시리아 골란고원을 자국 영토에 병합한다고 선언했다. 동서로 나뉜 예루살렘은 국제사회로부터 어느 누구의 영토가 아닌 국제사회의 공유지 성격을 지녔다. 골란고원은 1967년 전쟁에서 시리아로부터 빼앗은 전략요충지다. 이스라엘의 그런 일방적 합병 선언은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은커녕 거센 비난을 불렀다. 그런데 이젠 한술 더 떠 서안지구의 약 30%쯤 되는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에 합치겠다고 나서는 상황이다.
네타냐후-간츠의 야합 산물
지난 5월 강경우파인 베냐민 네타냐후(리쿠드 당)와 중도파인 베니 간츠(청백당)의 야합으로 연립내각이 출범한 뒤로 서안지구 합병안은 줄곧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온 주제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이례적으로 3차례에 걸쳐 치러졌던 이스라엘 총선 과정에서 네타냐후는 강경우파 유권자들의 표를 얻어낼 요량으로 "요르단강 서안의 정착촌들과 전략적 요충지 요르단계곡에 이스라엘 주권을 적용하겠다"고 말해왔다.
문제는 네타냐후의 연립내각에서 국방장관을 맡은 간츠의 변절이다. 총선 때 네타냐후가 서안지구 정착촌 합병 얘길 꺼낼 때마다 간츠는 이를 비판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태도가 바뀐 모습이다. 간츠는 중도파로서 국내문제에선 유연한 입장이지만, 이스라엘 안보 문제에 관한 한 네타냐후와 큰 차별성이 없음이 이번에 확실히 드러난 셈이다. 네타냐후와 간츠는 서안지구 합병 법안을 7월 1일이라도 표결에 넘겨 통과시킬 수 있도록 합의안을 다듬어왔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국제법 위반이다"
수순은 이렇다. 서안지구 합병안을 통과시키되 초기 단계의 실행은 정착촌에 한정한다는 것이다. 국제시회의 비판을 누그러뜨리고 현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반발을 의식해서다. 단계적인 합병을 꾀하려는 모습이다. 중동사태 악화를 은근히 걱정하는 미국쪽의 주문이기도 하다.
네타냐후의 서안지구 정착촌 합병 계획은 그동안 국제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와 강경파인 하마스(Hamas)는 물론이고, 유럽연합(EU)과 아랍권 국제기구 아랍연맹(AL)은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어겨선 안 된다"고 한결같이 비판하고 나섰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전쟁으로 점령한 땅에 세운) 이스라엘 정착촌을 합법화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법'의 출발은 1967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요구한 안보리 결의안 242이다.
"트럼프는 베스트 프렌드야!"
그럼에도 네타냐후가 서안지구 합병을 밀어붙이는 것은 트럼프라는 뒷심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는 기회 있을 때마다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럼프를 만나곤 했다. 백악관 기자회견 자리에서 네타냐후는 옆에 선 트럼프를 이렇게 칭찬했다. "You have been the greatest friend that Israel has ever had in the White House." 굳이 그 뜻을 옮기자면, 트럼프가 역대 미 대통령 가운데 이스라엘에게 가장 믿을만한 지원군이라는 얘기다. 그럴 만도 하다.
트럼프가 미 대통령에 오른 뒤 보여 온 파격적이다 못해 노골적인 친이스라엘 일방주의 정책들의 리스트는 길다. △2017년 10월 서안지구 헤브론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유네스코(UNESCO)가 이스라엘보다 팔레스타인 편을 든다고 탈퇴 선언했고(실제 탈퇴는 2019년 1월 1일) △국제사회의 세찬 비판을 무시하면서 미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고(201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 이래로 지금껏 점령중인 골란고원(국제법상 시리아 영토)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에 서명했다(2019년 3월 25일).
트럼프의 황당한 '중동평화 구상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눈에 트럼프가 악마로 비쳐진 또 다른 사례는 유대인 정착촌과 관련한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태도이다. 미 대통령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처럼 유대인 정착촌 확장을 막아서기는커녕, 오히려 네타냐후의 강공책에 박수를 쳐주었다.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던 유대인 정착민들은 얼마나 트럼프가 고마울까.
2020년 1월에 트럼프가 내놓은 이른바 '중동평화 구상안'도 문제다. 서안지구의 30%에 이르는 땅을 이스라엘 영토로 할당하는 황당한 내용을 담았다. 너무 터무니가 없어서 중동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많은 이들의 말문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네타냐후의 서안지구 합병안은 트럼프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는 결국 오는 11월 미 대선을 앞둔 트럼프 자신을 위한 정책이기도 하다. 2016년 미 대선에서 미국 유대인 유권자들은 29%만이 트럼프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민주당 클린턴 힐러리 후보의 득표율은 71%). 70 중반 나이에 대통령 재선을 꿈꾸는 트럼프에게는 보수적인 미 기독교 조직들과 더불어, 미-이스라엘 공공위원회(AIPAC)를 비롯해 이스라엘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 유대인 압력단체들이 중요한 정치 자산으로 꼽힌다.
트럼프의 친이스라엘 일방정책, 그리고 트럼프의 뒷심을 믿고 밀어붙이는 네타냐후의 강공 책으로 말미암아 안 그래도 휘발성 높은 중동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트럼프-네타냐후 동맹은 중동분쟁을 걱정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엔 귀를 막는 모습이다.
다시 중동에 피바람 부는가
해마다 봄이 오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사태가 터지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서안지구 합병 문제로 다시금 중동에 피바람이 불 조짐이 보인다. 코로나 걱정으로 대규모 집회를 삼가오던 팔레스타인 저항세력들도 "더 이상 참기 어렵다"고 행동에 나설 것이다. 이스라엘이 서안지구를 합병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더 이상 바라만 보기는 어렵다고 여기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매체인 <예루살렘포스트>는 6월 말 현재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합병안이 아직은 최종안이 확정되질 않았고, 따라서 7월 첫째 주에 크네셋(이스라엘 의회)에 합병안이 표결에 붙이진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분명한 사실은 네타냐후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한국과 이스라엘의 시간대는 6시간 차이로 한국이 빠르다. 7월 초 어느날 저녁을 먹는 한국 시민들은 서안지구 정착촌이 이스라엘 영토에 공식 합병됐다는 우울한 뉴스를 듣게 될 것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3017235848996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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