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6.15 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첫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이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살펴보자
◆ 김정일 국방위원장 신드롬이 불다
2000년 6월 13일, 평양순안비행장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등장했다. 우리 국민들이 북 지도자를 처음 보게 된 순간이다.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 남북 정상회담에서 우리 국민들은 북측 지도자의 육성을 처음 들었고, 행동을 보게 되었다.
당시 KBS는 앵커는 이렇게 말했다.
“알고 보니 너무나 달랐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을 사흘간 지켜본 시민들의 반응입니다. 거침없는 대화, 또 자연스러운 유머가 돋보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언행은 우리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또 당혹감마저 주었습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끝나고 한 포털 사이트에 ‘김정일 팬클럽’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당시 이 클럽을 만든 사람은 “북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캐릭터가 연예인처럼 멋져 팬클럽을 조직하게 됐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0년 6월 15일 경향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카리스마가 있는 실권자’ ‘화통하고 여유 있는 통치자’ ‘예의 바른 대장부‘….남북 정상회담을 지켜보는 남녘 사람들의 술자리에서나 대화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단연 최대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그에 대한 치열한 토론까지 벌어지고 있어 ‘김정일 신드롬‘까지 엿보이고 있다. ”아직 미덥지 못하다”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이 없지는 않지만 부정일변도의 기존 시각을 벗고 ‘호감을 갖고’ 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호감은 다양한 이벤트 행사로도 표현되기도 했다.
어느 결혼정보회사는 두 정상의 닮은꼴 얼굴을 찾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이 미팅에서 만난 커플이 결혼할 경우 ‘금강산 여행권’을 선물로 주는 행사였다. 또 어느 한의원은 정상회담 기간 “양측 정상과 가장 닮은 사람이나 흉내를 똑같이 내는 사람을 뽑아 완치할 때까지 돈을 받지 않고 치료를 해주는” 이벤트를 열었다.
2000년 광주의 조선대학교 축제에서는 시민들과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 닮은 사람 찾기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고수머리에 선글라스 착용, 인민복(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입었던 옷)과 비슷한 색깔과 디자인 옷을 입고 나오기도 했다.
인터넷에서는 남북 정상이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도록 추천 서명을 하자는 운동이 일기도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호감은 설문조사에서도 나타났다.
당시 한국방송진흥원이 13세 이상 전국 성인남녀 6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남북 정상회담 방송 보도 관련 전화 수용자 조사 결과에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긍정 평가는 크게 증가했다. “지도력에서 긍정 평가가 20.2%이던 것이 정상회담 후 53.7%로 급상승”했으며 “신뢰도 평가에서도 긍정 평가가 15.1%에 불과 했지만 회담 후에는 51.2%로 크게 올라갔다.” 김대중 대통령 또한 “지도력에 있어서 정상회담 전에는 긍정적인 평가가 60.7%이던 것이 정상회담 후에는 83.3%로 증가했다. 신뢰도 평가에서도 긍정 평가가 57.4%에서 82.3%로 상승했다.”
또 한국일보가 의뢰해 조사한 여론조사에서는 “95.7%(’대단히’50.4%, ’대체로’45.3%)가 남북 정상회담 성과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정적 이미지가 많이 개선됐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42.3%”로 집계되기도 했다.
분단으로 인해 국민들은 북의 지도자에 대해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2박 3일은 분단 역사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북 지도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없애기는 충분하였다. 그만큼 TV를 통해서 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은 강렬했던 것이다.
◆ 정부, 민간 모든 분야에서 교류협력 진행돼
6.15 공동선언 4항은 교류협력의 내용이 담겨 있다. 6.15 공동선언이 채택된 후에는 남북 사이에서 다방면적으로 교류협력이 진행되었다. 정부 사이의 각종 회담을 비롯해 민간급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 매우 폭넓게 진행되었다.
남북 정부 당국자 회담은 남북 적십자 회담, 남북 장관급 회담, 남북 국방장관급 회담, 남북 군사실무회담, 남북 경제협력을 위한 실무회담 등을 진행했다. 그 외에도 남북전력협력 실무협의회, 남북임진강수해방지 실무협의회, 남북임남댐공동조사 실무접촉, 남북철도·도로연결 실무협의회, 남북해운협력 실무접촉 등등이 진행되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비롯한 주요 국제대회에서 남북은 공동으로 입장을 했다. 그리고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북측의 선수단과 응원단이 남측을 찾았다.
민간급 교류도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6월 15일과 8월 15 광복절을 기념해 서울, 평양, 금강산 등지에서 민간단위 행사를 연례적으로 열었으며 종교,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학생, 학술, 언론인 분야 등에서 남북의 민간교류가 진행되었다.
민간 분야에서는 ‘6.15공동선언 민족공동위원회’가 2005년 결성되었다. 6.15 민족공동위원회는 남북해외로 구성되었고, 지역별로 부문별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2005년에는 남측의 대규모 관광객이 대집단예술체조와 공연 ‘아리랑’을 관람하기 위해 방북했다. 관광객들은 아리랑을 관람하고 평양과 백두산 등을 방문했다.
2000년 6.15 선언 이후 정부, 민간 단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던 교류와 협력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 이산가족 상봉 상시로 이루어져
남북의 분단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바로 이산가족이라 할 수 있다.
첫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이었다. 1985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양측 각기 단장을 비롯하여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50명, 예술공연단 50명, 취재기자 30명, 지원 인원 20명 등 총 151명이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은 바로 중단되었으며,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될 때까지 15년 동안 당국 차원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은 진전이 없었다.
남북은 6.15 공동선언 3항에서 이산가족 문제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그해 8.15를 계기로 서울과 평양에서 1,170명의 이산가족이 만났다. 2000년 8월 1차 이산가족 상봉 이후 2007년 10월까지 16차에 걸쳐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산가족의 상당수가 고령이기에 장거리 이동이 여의치 않아 남북은 화상상봉을 2003년 합의했다. 화상상봉은 20005년 시작해 2007년까지 7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리고 남과 북은 2008년 7월 12일 이산가족이 상시로 만날 수 있도록 상설면회소를 준공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금강산관광을 중단한 뒤 재개되지 못하면서 실제 상시적인 이산가족 상봉은 진행되고 있지 않다.
◆ 경협의 상징 ‘개성공단’ 문을 열다
개성공단은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노동력을 결합해 남북 공동의 번영을 추구해보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2000년 8월 현대아산(주)와 북의 ‘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면서 개성공단은 시작되었다. 2002년 11월, 북에 개성공업지구법이 제정되었다. 법적으로 개성공단 건설 및 운영을 공고히 한 것이다.
2004년 12월 15일 개성공단 시범단지에서 ‘리빙 아트’ 스테인리스 냄비가 첫 남북경협 제품으로 생산됐다. 개성공단에서 만든 ‘리빙 아트’의 냄비를 서울 롯데백화점에서 판매했는데 냄비 1천 세트가 판매 이틀 만에 다 팔렸다. 당시 국민들이 개성공단에 대한 관심이 높았음을 엿볼 수 있다.
개성공단은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문을 열었다. 처음 입주 업체는 24개에 불과했다. 당시 기업들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남북교류에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통신이 연결되고 제품들의 반출이 시작되면서 개성공단은 급속히 성장한다. 1년 만에 1만여 명에 달하는 북측 노동자들이 일하는 대규모 공단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가동 2년도 안 되어 2007년 1월 개성공단 누계생산액이 1억 달러(1천억 원)를 돌파했다. 입주기업에 대한 2차 분양 결과 183개 기업이 분양을 받았다. 그만큼 기업들이 ‘들어가고 싶은 공단’이 되었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은 남북관계만이 아닌 민심과 정치, 경제, 사회생활에서 변화를 이끌어냈다.
20년 전 우리 국민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가 출발하는 순간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리며 평양에서 열린 첫 남북 정상회담을 보았다. 비록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우리는 같은 민족임을 다시 확인했고, 통일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 평양에서 통일의 노랫소리가 울렸으며, 금강산에서 북측 관광안내원과 함박웃음을 지며 통일을 이야기했다.
6.15 공동선언 20주년을 맞이하며 우리의 힘으로 한반도 평화, 번영, 통일의 희망을 다시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6.15 남북공동선언의 역사적 의의 http://www.jajusibo.com/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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