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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1일 일요일

[창간20주년 특별기획] 코로나 이후,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성 윤리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㉛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발행 2020-06-21 18:01:30
수정 2020-06-21 22:2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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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 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년 상반기 한국 사회를 뒤흔든 두 개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코로나19’와 ‘텔레그램 n번방’이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관계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 어디가 어떻게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상호 의존의 필요가 높아진 감염병의 시대
이번 코로나의 집단 발생지는 여성전용 근로자임대아파트, 종교집회, 콜센터, 노래방, 택배물류센터, 학교, 병원, 클럽 등이었다. 밀집과 밀폐라는 특성을 가진 이 장소들이 감염병에 취약한 건 당연하다.
이 장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는 그동안 집단 감염병에 매우 취약할 수 밖에 없는 도시집중형 집단거주라는 생활양식을 발전시켜왔다. 백신을 통해 집단 면역을 만들어두는 일은 점점 더 개인의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한 의무가 되었고, 백신을 불신하는 일은 개인의 (불확실한) 신념을 지키겠다고 타인에게 역학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악덕의 극치로 취급되었다. 백신이 만들어지지 않은 신종 감염병인 코로나19의 경우에는 무엇이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무엇을 반드시 해야하는지에 대한 규칙이 아직 정리된 바 없어, 사람들은 그때 그때마다 선별적으로 확진자의 행동을 비난하며 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다.
불볕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16일 서울 강서구 강서보건소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들이 고등학생 검사를 하고 있다.  2020.06.16
불볕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16일 서울 강서구 강서보건소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들이 고등학생 검사를 하고 있다. 2020.06.16ⓒ김철수 기자
인류는 감염병에 ‘백신’과 ‘집단 면역’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해왔다. 기본적으로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위기는 나의 마스크가 당신을 지키고 당신의 마스크가 나를 지켜주는 일종의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통해 그나마 대응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후변화 같은 변수, 인간 생활방식의 획일화 같은 상황과 맞물리면서 시간은 더 이상 인간의 편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여기에 한 가지 변수가 더 있다. ‘디지털 기술’ 말이다. 비대면이 현재까지 나온 거의 유일한 효과적인 대응인데, 비대면을 가능하게 해주는 디지털 기술은 인간을 연결해주기는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성을 변화시킨다. 한나 아렌트는 “기계와 그 과정의 자동적 운동이 세계와 사물을 지배하고 심지어 파괴한다”며, 기술매개사회는 서로에게 상호의존하는 인간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그 결과 공공선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를 한 바 있다.
17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텔레그램 '박사방'에서 운영자 조주빈을 도와 대화방 운영·관리에 관여한 공범 '부따' 강훈이 검찰에 송치됐다. 강훈이 차량에 실려 경찰서를 나서자 시민들이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2020.04.17
17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텔레그램 '박사방'에서 운영자 조주빈을 도와 대화방 운영·관리에 관여한 공범 '부따' 강훈이 검찰에 송치됐다. 강훈이 차량에 실려 경찰서를 나서자 시민들이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2020.04.17ⓒ민중의소리
디지털 시대 인간성 파괴의 징후적 사건, 텔레그램 N번방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게 된 상황에서 타자를 나와 공존하는 총체적 인격으로 감각하도록 하는 능력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 텔레그램 N번방은 그 능력이 완전히 손상되었음을 알리는 징후적 사건이다.
세계 최대의 아동성착취 사이트 웰컴투비디오와 노예방을 운영하며 21세기형 인신매매를 자행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가해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해악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식의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도록 ‘설계’했다. 디지털 기술이라는 매개는 이들에게 피해당사자와의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했다.
이들은 마치 게임하듯 원격으로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했다. 인터넷의 특성상 한 번 유출 혹은 유포의 피해를 입으면 완전한 삭제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피해자가 입는 피해의 강도는 더욱 격심해졌다. 반면 기술의 힘을 빌어 자신의 신원을 능숙하게 감추었다고 믿는 가해자들은 유포된 사진을 기다리는 관전자들의 ‘요구’에 부응했을 뿐이라며, 그나마의 가해자 의식마저 지운다. 심지어 이들은 가까이에 있는 지인과 친족을 범행 대상으로 고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가해자들이 상대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범죄는 현실 세계에서는 문제가 되지만, 디지털 기술이란 매개를 경유하여 만들어 낸 완전히 다른 세계에선 거침없고 영웅적인 행동이 된다. 인간다움을 만드는 선(線)이 완전히 무너진 세계가 병존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성폭력의 근본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모인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이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재판부의 부실 판결을 규탄했다. 2020.04.20
디지털 성폭력의 근본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모인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이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재판부의 부실 판결을 규탄했다. 2020.04.20ⓒ김철수 기자
“이것이 인간인가” 묻게 되는 이 때,
디지털 시대 새로운 성윤리 고민해야
1994년이었다. 이제 막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우연히 미국의 대표적 여성단체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of Women·NOW)가 몇 년전에 사용했던 슬로건을 듣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믿음입니다” 이 문장은 그때까지 긴가민가하던 마음의 추를 순식간에 옮겨놓았다. 동시대 미국에서도 여성이 인간이라는 게 ‘급진적’ 주장이라는데 망설일 이유가 있나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1986년 전미여성기구의 브루클린 지부 활동가였던 마리 시어(Marie Shear)가 쓴 문장이었다. 당시의 급진적 제2물결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단어사전]을 만들어 상대의 폐부를 찌르는 유머감각을 선보였다. 이 사전 시리즈는 이런 식이다. 남자란? “화장실에서 휴지가 그냥 자라난다고 생각하는 사람”. ‘포켓 엔비’(pocket envy)란 단어의 뜻은 이렇다. “실용적인 옷을 원하는 여성들의 채워지지 않는 갈망” 주머니가 없는 여성복의 불편함을 고발하는 의미와 프로이트(Freud)가 여성들이 남근을 선망(penis envy)한다고 하는 주장을 비꼬는 언어유희였다. 이 단어사전 시리즈에 등장한 페미니즘의 정의가 바로 이 문장이었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민중의소리
페미니즘에 대한 숱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대응한 페미니즘 단어사전 시리즈에서 나온 말이 어째서 몇 년 후 웃음기를 싹 거두고 비장한 슬로건이 된걸까. 여성을 인간이 아니라 남성의 부속물로 취급하는 남성우월주의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현실 앞에, 이 문장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990년대까지의 페미니즘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고 외쳐왔다면, 지금은 어떨까.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 프리모 레비(Primo Levi) 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들을 복기하며 이것이 인간인지, 인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되었던 것인지를 물었다. 버닝썬 사태와 전 법무부 차관 김학의 사건, 웰컴 투 비디오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연속해서 겪으면서, 나 역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지금은 여자‘도’ 인간이라고 주장할 때가 아니라, 남자가 인간인지를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약물 강간을 하고 불법촬영물을 공유하고 노예방을 운영하고 아동성착취물을 제작하도록 시키는 이들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 사회가 과연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디지털 시대 새로운 성윤리를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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