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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6일 토요일

오늘 대일본 첫 승전 100년... 그날의 재구성

20.06.07 11:16l최종 업데이트 20.06.07 11:16l
 봉오동 전적지 들머리에 '봉오골 반일전적지' 기념비.
▲  봉오동 전적지 들머리에 "봉오골 반일전적지" 기념비.
ⓒ 박도


1920년 6월 7일

2020년 6월 7일은 우리나라 최초 독립전쟁인 봉오동전투가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00년 전인 1920년 6월 7일, 항일 명장 홍범도(洪範圖)를 사령으로 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연합부대)가,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월강추격대대' (越江追擊大隊)를 참패시킨,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 대일전 승첩의 날이다. 이 봉오동전투는 사흘 전인 1920년 6월 4일에 있었던, 화룡현 삼둔자(三屯子)전투에서 시작됐다. 그날 새벽 30여 명의 우리 독립군 소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으로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으로 가서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일본군 2개 중대는 이를 보복하려고 우리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렀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조선인 양민들을 무차별 살육했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 독립군은 삼둔자 산기슭에 잠복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타격했다. 이에 함북 종성군 나남 일본군 제19사단은 독사처럼 약이 바짝 올랐다. 그들은 삼둔자 전투 참패를 설욕하고, 조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추격대대'를 임시로 편성했다.

이들 월강추격대대는 야스가와 소좌의 인솔로 1920년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을 건너 이튿날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이런 낌새를 알아 차린 홍범도 장군은 그들과 교전에 앞서 주민들을 산중으로 미리 대피시켜 마을을 비우게 했다. 그러고는 봉오동 상동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해 놓았다. 그런 다음 월강추격대대를 이곳으로 유인해 포위망 속에 가둬두고 일망타진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1개분대를 월강추격대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으로 내보낸 뒤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후퇴하게 하여 그들 전 부대를 유인했다.

6월 7일 아침 8시 30분 무렵에 월강추격대 첨병이 독립군 분대의 뒤를 쫓아 봉오동 들머리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온 월강추격대 첨병은 독립군 분대를 놓치고는 봉오동 하동을 정찰한 결과 독립군이 이미 겁을 먹고 죄다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여겼다.
 
 봉오동전투 격전지인 봉오동을 품고 있는 초모정자산
▲  봉오동전투 격전지인 봉오동을 품고 있는 초모정자산
ⓒ 박도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봉오동전투

그들은 본대를 불러 봉오동 하동 마을을 뒤지면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뒤 그날 정오 무렵에 다시 대오를 정돈하여 봉오동 중동, 상동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날 오후 1시 무렵에는 월강추격대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인 봉오동 상동 남쪽 300m 지점까지 진출하여 완전히 독립군 포위망 속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곧장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주력부대가 들어오길 묵묵히 더 기다렸다.  
잠시 후 전위부대에 이어 주력부대도 기관총을 앞세우고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제야 홍범도 장군은 공격 신호탄을 발사했다. 이에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던 독립군은 일제히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뜻밖에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돌격해 왔다.

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월강추격대는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포위망 속에서 3시간 이상 끈질기게 버텼으나 이미 작전상 허를 찔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의 전투는 무모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리고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 월강 추격대를 혼비백산케 했다. 통쾌한 대일 승전이었다.

당시 중국 〈상해시보〉에 따르면,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추격대를 150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 게릴라 전의 개척자로 알려진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  우리나라 게릴라 전의 개척자로 알려진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 자료사진

  
홍범도 장군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 평양 서문안 문렬사 부근에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조선 순조 때 농민의 난을 일으킨 홍경래(洪景來)와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는 홍경래 난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일가친척이 화를 입게 되자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와서 장사를 하며 살았다.

홍범도 아버지 홍윤식은 할아버지 생전에 남긴 빚을 갚고자 머슴살이를 했다. 홍범도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그는 인물이 남달리 뛰어나 관기로 뽑혀갈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자 외가어른들이 서둘러 홍윤식과 혼인시켰다.

가난한 부부는 결혼 이태 후 아들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산모가 해산한 뒤 하혈이 심하여 이레 만에 세상을 떴다. 홍윤식은 동네 아낙네들에게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어린 아들을 길렀다. 그러나 그도 아들이 아홉 살 되던 해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 부모를 여읜 홍범도는 머슴살이, 병정, 막일꾼 등으로 자라다가 나중에는 중이 되고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외금강 신계사 주지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하지만 한 해 남짓 만에 수도생활을 청산하고 하산했다. 그때 홍범도는 여승 옥녀와 정이 들어 뱃속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옥녀의 고향인 북천으로 가고자 봇짐을 지고 금강산을 떠났다. 하지만 원산 교외에서 불한당으로부터 변을 당해 홍범도는 옥녀와 생이별을 한 뒤 방랑객이 되었다.

그는 그때 세상에서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고 살아가자면,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 했기 때문에 무예를 닦는 길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홍범도는 강원도 회양에서 만난 포수로부터 사냥총 한 자루를 구입했다. 그 길로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사냥꾼으로 생업을 삼으면서 사격술과 검술을 닦았다. 뒷날 일본군들이 홍범도란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간담이 오싹했던 백발백중 사격술과 신묘한 검술은 그때 익힌 솜씨였다.

홍범도의 인생길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일제 깡패 무리들이 남의 왕궁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명성 황후를 난도질해 죽이고, 그 시신마저 장작더미에 던져 태워버렸다는 얘기를 듣자 홍범도의 울분은 하늘을 찔렀다.

그는 일제 침략자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수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그는 그때부터 항일 투지가 불탔다.

1895년 10월 홍범도는 강원도 단발령에서 만난 포수 김수협과 뜻이 맞아 항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한 뒤, 곧 무장한 일본군 12명을 통쾌하게 처치했다. 이를 시작으로 홍범도의 맹렬한 항일 무장투쟁이 펼쳐졌다.

일제 강압에 따른 정미7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7년 11월 홍범도와 차도선은 항일 의병대를 만들어 함경남도 후치령에서 일제 북청수비대를 섬멸하여 첫 개가를 올렸다. 그 뒤를 이어 의병대는 함경남도 삼수, 갑산에서 일제 군경과 수십 차례나 처절한 격전을 벌였다.
 
 카자흐스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 세워진 흉상.
▲  카자흐스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 세워진 흉상.
ⓒ 자료사진


우리 정부의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작업

1911년 봄 홍범도는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첫 국내 진격전을 감행하여 함북 경원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개가를 올렸다. 또 1919년 10월에는 평북 강계 만포진을 공략하여 일본군과 3일간 격전을 치르면서 70여 명을 살상했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 게릴라전의 개척자로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 독립전쟁사에 가장 빛나는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역시 홍범도 장군의 공이 컸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에게는 '날아다니는 장군'으로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우리 겨레에게는 독립운동의 전설적인 영웅, '백두산 호랑이'로 추앙 받았다. 장군의 발자취는 조국의 산과 계곡, 압록강 두만강 굽이굽이, 백두산 밀림과 만주 벌판에,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황야에까지 남겼다.

장군은 조국 광복을 이태 앞둔 1943년 10월 25일, 러시아 카자흐스탄의 크즐 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항일구국 생애를 마감했다.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신 지 40년 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는 장군의 반신 동상이 세워지고, 생전에 살았던 곳은 '홍범도 거리'로 명명되었다.

우리 정부는 올해 안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도 친일의 무리와 그 추종자들이 활개치는 세상에 홍범도 장군은 한 줄기 빛과 한 줌의 소금으로 겨레의 수호신 역할을 하리라 믿는 바이다.
 
 봉오동 전적지. 지금은 봉오동저수지로 물에 잠겨 있다.
▲  봉오동 전적지. 지금은 봉오동저수지로 물에 잠겨 있다.
ⓒ 박도

 
덧붙이는 글 | 기자는 1999년 8월에 이어 2005년 6월에도 현지를 답사하였습니다. 이 기사는 사학자 장세윤 박사 지음 <홍범도 장군>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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