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건호의 연금개혁 완전정복] 부과 방식 전환의 역설
2019.02.03 10:32:31
<1회> 문재인 정부 연금안 평가 : 재정 개혁 방기<2회> 국민연금 재정 계산 : 70년 계산 믿을 수 없다?<3회> 국민연금의 특징 : 미래 재정 불안정
<4회> 국민연금의 재정 목표 : 재정 균형<5회> 외국에서 연금 재정이 안정적인 이유<6회> 국민연금의 부과방식 전환, 가능한가?<7회> 국민연금의 역설 : 재분배 vs. 역진성<8회> 기초연금의 강점 : 사각지대 없는 노인 기본소득<9회> 퇴직연금의 잠재성 : 중상위계층 노후 소득 보장<10회> 연금 개혁 대안 : 한국형 다층 연금 체계
연금 개혁의 방안을 살펴보자. 물론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국민연금은 재정불균형이 크고 향후 인구 환경도 우호적이지 않다. 시민들뿐만 아니라 전문가 사이에서도 백가쟁명식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이다. 그런 만큼 국민연금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각 개혁안의 타당성을 엄격히 검증해야 한다.
국민연금 미래 재정구조의 방향은?
이번 글의 주제는 국민연금 논의에서 긍극의 해법으로 등장하는 '부과 방식 전환'이다. 연금 재정 구조는 크게 적립 방식과 부과 방식으로 구분된다. 적립 방식은 퇴직연금처럼 가입자가 나중에 받을 연금액을 미리 보험료로 적립해두는 재정 구조이다. 받을 만큼 쌓아두기에 기금운용에서 큰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재정은 안정적이다. 사적 연금은 당연히 적립 방식으로 제도를 운영한다.
부과 방식은 그해 필요한 지출을 그해 가입자(혹은 시민)에게 부과하는 재정 구조이다. 그때마다 재정을 조달하니 굳이 적립금을 보유할 필요가 없다. 예비비 성격으로 몇 년치 지출분만 지니고 있으면 대체로 부과 방식으로 불릴 수 있다.
서구 공적 연금은 대부분 부과 방식 재정구조로 운영된다. 대표적으로 독일 소득비례연금은 현재 보유한 기금은 한 달치 지출분에 불과하다. 이 기금은 현금 유동성을 조정하는 역할에 그치고 수급자에게 지급하는 연금 재정은 매달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로 충당한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어디에 속할까? 미래 받을 연금을 대비해 보험료를 쌓아두니 일단 부과 방식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래 받을 연금액만큼을 모두 적립하지 않는다. 평균 소득 가입자의 평균 수익비, 즉 급여/기여 배율이 2.1배이기에(기금수익률 할인, 40년 가입 기준), 급여 대비 절반만 보험료로 내고, 나머지 절반은 미래 세대에게 의지하는 구조이다. 언젠가는 기금이 소진되겠지만, 현재는 연금의 역사가 짧아 가입자가 많기에 기금이 상당히 쌓여 있다. 이에 연금학계에서는 국민연금을 '부분 적립 혹은 수정 적립' 재정 구조라고 부른다.
이러다 보니 국민연금 재정 구조의 미래 전망을 두고 논란이 생긴다. 계속 지금처럼 부분 적립 방식으로 갈지, 기금이 소진된 후 부과 방식으로 전환할지, 혹은 받을 만큼 보험료를 모두 내 완전 적립 방식으로 갈지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국민연금의 미래 재정 구조의 방향에 대해 본격적인 토론이 진행된 적은 없다. 부과 방식 전환 역시 서구 사례가 소개될 뿐, 한국 국민연금의 이행 경로가 구체적으로 제시된 경우는 없다. 이렇게 연금 개혁 대안을 막연한 기대 수준에서만 되풀이하는 건 생산적이지 못하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지금의 과제를 뒤로 미루는 효과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부과 방식 전환'의 의미와 타당성을 엄격히 살펴봐야 할 때이다.
부과 방식, 아름다운 세대 간 연대
나는 공적 연금에서 '부과 방식' 제도들을 볼 때마다 감동을 느낀다. 인류가 만든 여러 제도 중에서 부과 방식 연금은 세대 간 연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수십년에 걸쳐 부과 방식을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 그 시민들을 존경한다.
2016년에 유럽 나라들의 노인 비중은 평균 20%이다(한국은 2017년 노인 비중 14%, 2025년 20% 전망). 공적 연금이 부과 방식이라는 건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후를 위해 보험료를 쌓아두지 않고 지금 노인을 위해 모두 사용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면 지금 보험료를 내는 가입자의 노후는 누가 책임지지? 무엇을 믿고 보험료를 현재 노인을 위해 모두 사용해 버린다 말인가? 사회복지 분야에서 우문같지만 이는 무척이나 중요한 질문이다. 바로 '믿음'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늙었을 때 연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세대 간 믿음, 부과 방식 연금제도는 이렇게 그 사회의 신뢰와 연대를 보여준다.
어떻게 서구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물론 2차 대전 이후 경제, 인구 환경이 공적 연금이 성숙되기에 유리했다. 부과 방식으로 전환했던 경제가 순조롭게 성장하는 자본주의 황금기였고 노인의 기대 여명도 지금보다 짧았다. 그럼에도 내가 주목하는 이유는, 각 세대가 공적 연금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자신의 책임 몫을 성실히 다한 결과라는 점이다.
서구 나라들에서 공적 연금은 길게는 백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다. 처음 시작할 때는 대체로 대체율과 보험료율이 모두 낮았다. 이후 노후 보장의 중요성이 부상하면서 점차 '더 내고 더 받는' 연금 개혁을 추진하였고, 어느 시점이 되어선 대부분의 나라에서 굳이 보험료를 쌓아두지 않는 부과 방식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부과 방식 사례인 독일 공적 연금은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연금기금을 전시자금으로 전용해 소진하자 1957년부터 1967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재정 구조를 부과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 전환 기간 보험료율은 14% 수준이었고 이후 1980년까지 18%로 단계적으로 인상해 현재까지 18~20% 범위에서 운영되고 있다.
국민연금을 '부과 방식'으로 전환하자?
우리나라도 서구처럼 부과 방식으로 국민연금을 운영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미래에 국민연금기금이 소진되면 국민연금을 부과 방식으로 전환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부과 방식은 이미 연금 선진국에서 무난하게 운영되고 있고, 세대 간 연대를 잘 보여주는 제도이기에 귀를 솔깃하게 한다.
근래 등장한 부과 방식 관련 논의들을 살펴보자. 우선 2013년에 진행된 제3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에서 공식적으로 '부과 방식 전환'이 제시되었다. 당시 제도 개혁 방안을 담당한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는 국민연금 재정 개혁 방안으로 복수안을 내놓았다. <1안>은 '적립배율 2배 재정 목표'를 위해 보험료율을 12.9%로 인상하는 방안, <2안>은 기금 소진은 부과 방식 전환을 의미한다며 재정 목표를 '부과 방식으로의 연착륙'을 제안했다. <2안>에 의하면 기금수입이 지출보다 많은 2043년까지는 국민연금 재정이 최소한 위기라고 볼 수 없기에 당장은 보험료율 인상이 불필요하다.
- 기본 방향: 기금 과다 적립 및 기금의 급격한 소진을 피하면서 부과 방식으로 연착륙(soft landing)- 개선 방안: 현행 보험료율은 유지하되, 보험료율을 장기적으로 안정화시키는 포괄적 대책 집중 강구
이번 4차 재정계산에 따른 연금 개혁 논의에서 참여연대도 비슷한 내용을 펼친다. 애초 국민연금은 기금이 소진되도록 설계했기에 점진적으로 기금을 줄여 부과 방식으로 전환해 가자는 취지이다.
"국민연금은 도입 당시에 본래 기금이 소진되는 것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국민연금제도가 성숙하면서 지나치게 많이 쌓인 기금이 점차 줄어들고, 매년 걷는 보험료와 세금으로 연금을 지급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참여연대, '적정 노후소득보장을 위해 국민연금이 나아가야 할 방향 : 참여연대 연금개혁안', 2018년 12월 31일)
한편 작년 12월에 보건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제4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을 바탕으로 한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에도 부과 방식을 시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정부는 4개의 연금개혁안을 제안한 후에 "장기적인 공적 연금 개혁 방향"을 다루면서 사실상 '부과 방식 전환'을 의미하는 미래 국민연금 재정 곡선을 제시한다.
<그림 1>은 현행 국민연금기금이 소진되기 얼마 전부터 연금 개혁이 진행돼 매우 작은 적립금을 유지하는 '장기 개혁 방향'이다. 연금 재정 구조에서 작은 적립금은 예비비 성격을 지니기에 <그림 1>은 사실상 부과 방식 재정 구조로 평가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순 없지만, 아직 부과 방식 전환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미래 연금 개혁 방향으로 부과 방식 그래프를 제시한 건 다소 파격적이다.
처음부터 국민연금은 부과 방식을 전망하고 설계했다?
내 주변을 보면, 친복지 경향의 사람일수록 '부과 방식 전환'을 선호하는 듯하다. 부과 방식이 지닌 '아름다운 연대'를 주목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부과 방식 전환을 둘러싼 논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정말 국민연금이 부과 방식 전환을 염두에 두고 도입했을까? 또 하나는 앞으로 부과 방식으로 전환하려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할까?
우선, 국민연금이 부과 방식을 전망하고 설계된 것인지 살펴보자. 1988년 국민연금이 시작되었다. 당시 설계도는 소득대체율 70%, 보험료율 9%였다(보험료율은 3%에서 시작해 1998년 9% 예정). 이는 수지 균형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후한 설계이다. 당시 소득대체율은 성숙 단계에 접어들어 높은 서구의 수준을 반영했지만, 보험료율은 급여 수준에 비해 무척 낮게 책정했다. 대체로 연금 도입 시점에는 가입자의 제도 순응성을 높이기 위해 보험료율을 낮게 설정한다 해도 국민연금의 경우는 그 격차가 컸다. 이러한 재정 불균형 구조에서는 언제가 기금이 소진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금 소진을 예상하고 미래 부과 방식 전환을 염두에 둔 설계라는 추측이 생길 수 있다.
당연히 '저부담 고급여' 구조에서 제도를 그대로 놔두면 언제가 기금이 소진될 것이다. 국민연금 설계자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이들은 향후 기금 소진 상황으로 가지 않도록 재정 안정화 조치를 동시에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 국민연금을 설계하고 도입에 큰 역할을 한 기관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이다. 국민연금 시행 2년 전인 1986년 발간된 KDI 보고서 <국민연금제도의 기본 구상과 경제사회 파급효과>를 보자. 보고서는 앞으로 도입되는 국민연금에서 기금이 2033년에 정점에 도달하고 2049년에 고갈될 것이라 전망했다. 실제 2003년 진행된 제1차 재정 계산 결과(2047년 기금 소진)와 거의 같은 예측이다. 또한 보고서는 기금이 소진되면 필요 보험료율이 21.5%이 되어야 하므로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2010년대에 보험료율을 12.5%로 인상하고 2020년대부터 15%로 올리는 방안을 검토했다. 1988년 한국인구보건연구원 국민연금연구팀이 낸 <국민연금 확대방안 연구> 보고서의 결론도 비슷하다.
국민연금이 시행된 이후에도 비슷한 보고가 계속되었다. 1992년에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국민연금관리공단이 함께 개최한 <국민연금 확대와 재정안정방안에 관한 세미나>는 2039년 기금 고갈을 예상하며 기금운용의 고수익률 추구, 수급연령의 65세 연장, 보험료율의 단계적 인상 등의 재정안정화 방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연구 내용을 보면, 국민연금 설계자들은 제도 도입 당시에 이미 미래 재정 불안, 기금 소진을 예견했고 또한 단계적인 재정 안정화 조치를 제안하고 있다. 이는 국민연금 기금이 소진된 후 부과 방식 전환을 지향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게다가 1998년 국민연금법 개정으로 '5년 주기 재정 계산과 재정안정화 조치'가 법제화되었다. 이는 사실상 기금이 소진되지 않도록 급여 수준에 부응하는 보험료율 개혁을 취하라는 의미이다. 결국 국민연금이 도입될 당시에도 그랬고, 현행 국민연금법 조항까지 감안하면, 국민연금이 부과 방식 전환을 염두에 둔 제도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부과 방식 전환을 위한 조건: 전환 앞뒤 가입자의 부담 형평성
물론 중요한 건 앞으로 우리의 의사결정이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국민연금을 부과 방식으로 전환하는 논의를 할 수 있다. 문제는 부과 방식 전환을 위한 조건이다. 아무리 부과 방식이 아름다운 제도이고, 다른 나라가 시행하고 있다 해도, 부과 방식 전환을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바로 전환 앞뒤 재정 부담의 형평성이다.
국민연금기금이 소진되는 2057년에 부과 방식으로 전환한다고 가정하자. 제4차 재정계산 결과에 따르면, 연금 지출을 모두 보험료로 충당하는 부과 방식 필요보험료율이 26.5%에 달한다. 당시 가입자들은 이전 가입자들과 비교해 동일한 소득대체율을 적용받으면서도 3배의 보험료를 내야 한다. 이들에게 이 보험료를 납부하라고 권할 수 있을까? 당신이 그 때 청년이라면 이 제도를 순순히 수용하겠는가?
이에 대해 반론이 제기된다. 미래 국민연금 재정의 지속가능성과 후세대 부담의 적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지표는 보험료율 수준이 아니라 연금 지출 규모라는 주장이다. 미래 국민연금 지출 규모가 현재 유럽 나라들의 연금 지출 규모와 비슷하니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즉 "(지금 서구와 비슷한 규모의) 연금 지출이 미래 세대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어 미래 세대를 경제적 파국으로 이끌 것이라는 '세대 간 도덕질'이 설득력이 없다"는 비판이다.
나의 계산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한국의 공적연금 지출은 총 국내총생산(GDP)의 3.3%, 2060년 즈음에는 대략 GDP 12% 수준으로 추정된다(기초연금, 특수직역연금 포함), 국민연금만 보면, 2018년 지출은 GDP 1.3%에 불과하지만 2060년에는 8.9%에 이른다.
또한 지금 유럽 나라들은 미래 우리 수준의 연금 지출을 감당하고 있다. 2016년 기준 유럽나라들이 평균 공적 연금 지출이 GDP 12.3%에 달한다. 그리스(17.3%), 이탈리아(15.6%), 프랑스(15.0%) 등은 15%가 넘는다.
물론 한국의 미래 세대도 지금 서구만큼의 경제력을 지닐 수 있다. 그런데 미래 세대의 경제력과 이들의 제도 수용 여부는 사실 별개의 주제이다. 여기서는 경제력보다는 형평성이 논점이다.
물론 한국의 미래 세대도 지금 서구만큼의 경제력을 지닐 수 있다. 그런데 미래 세대의 경제력과 이들의 제도 수용 여부는 사실 별개의 주제이다. 여기서는 경제력보다는 형평성이 논점이다.
국민연금이 현행 방식에서 그대로 부과 방식으로 전환할 경우 세대별로 책임져야 할 재정 몫의 차이가 너무 크다. 부과 방식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 차이가 다음 세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여야 한다. 부과 방식 전환의 관건은 우리가 그러한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지금 그러한 방향으로 연금 개혁을 진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미래 연금 지출 규모 비교가 현재 우리의 책임을 면해주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부과 방식 연금의 도전, 인구구조의 초고령화
부과 방식 운영에 큰 영향을 주는 인구학적 조건도 만만치 않다. 부과 방식은 노인 비중이 높을수록 약속된 급여를 지급하기 위한 당시 세대의 보험료율이 높아지는 구조이다. 한국의 경우 서구나라가 부과 방식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비해 고령화 수준이 매우 높다. 미래 인구구조 전망에서도 한국은 서구에 비해 노인 비중이 높다고 전망된다. 2050년 노인부양비가 72.4%로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53.2%보다 높다(여기서 노인부양비는 2064세 인구 대비 65세 인구 비중이다).
이러한 인구 전망에서는 국민연금이 부과 방식 전환한 직후 필요 보험료율이 높게 나오고, 이로 인해 부과 방식 전환을 위한 앞뒷세대 보험료율 격차도 커진다. 서구와 비교하면, 현재 국민연금은 제도 내부의 수지 격차가 큰 문제와 함께 미래 인구 구조에서도 부과 방식 전환에 무척 불리한 조건에 있다. 지금의 인구구조의 개선이 필요하고, 동시에 미래 세대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일정한 적립금을 유지할 필요성이 오히려 제기되는 상황이다. 실제 서구 몇 나라에서는 이러한 취지에서 적립금을 일부 확보하는 방향으로 연금 개혁을 진행하기도 한다.
부과 방식 전환의 역설, '부과 방식으로 가려면 보험료율 인상해야'
다소 완화된 부과 방식 전환도 제안된다. 아무래도 기금 소진 시점까지 그대로 놔두는 건 곤란하니 기금이 최대로 오른 후 줄어드는 시점부터 보험료를 올리면서 서서히 부과 방식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이다. 앞의 주장에 비해 보험료 인상 시기를 앞당기니 나름 책임 있는 제안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막연하다. 기금 적자 시점부터 어느 정도 보험료를 올리자는 것인지 구체적 이행 경로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략의 참고를 위해서 제4차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에서 나온 재정안정화 '가'안을 살펴보자. '가'안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에서 45%로 인상하고 보험료율도 9%에서 11%로 올린다. 이 때 보험료율 인상분은 소득대체율 인상에 따른 것이므로 기존 국민연금 40%/9%의 재정불균형은 그대로 존재한다.
'가'안이 재정안정화 조치를 취하는 건 앞으로 15년 후인 2034년부터이다. 이때 보험료율을 11%에서 12.3%로 조금 인상하고 이후에는 재정 계산마다 '30년 적립배율 1배' 재정 목표에 따라 보험료율을 조정한다. '가'안의 논리에 따르면, 기금 소진시점을 2088년으로 늦추기 위해서는 보험료율이 2034년에 12.3%로 시작하지만 2048년에 20.2%, 2058년 23.9%로 급격히 올라야 한다. 국민연금기금이 적자로 돌아서기 이전부터 재정안정화 조치를 취하더라도 지금부터 15년 동안은 보험료율을 그대로 놔둔 까닭에 보험료율 인상 경로가 가파른 편이다. (보건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제4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을 바탕으로 한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 요약본" 18쪽에 '가'안이 소개돼 있다. 하지만 필요재정을 '보험료율 상한 18% + 기타 재정안정 수단' 으로 설명해 보험료율 기준 최종수치 23.9% 정보는 담겨 있지 않다. 보건복지부가 연금개혁에 필요한 수치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하지 않는 사례이다.)
결국 부과 방식 전환을 제안하면서 지금 보험료율 인상에 소극적으로 임할수록 향후 보험료율 인상 폭은 크고 가파르다. 부과 방식 전환을 주장하며 재정 안정화 개혁을 미룰수록 오히려 부과 방식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절벽은 높아지는 '한국식 부과 방식 전환의 역설'이다.
국민연금 부과 방식 전환, 21세기에 현실화 어려워
국민연금에서도 부과 방식 전환이 가능하다. 경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소득대체율 인하이다. 소득대체율 인하는 미래 필요 보험료율 수준을 낮추기에 부과 방식 전환 전후의 재정 부담의 차이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부과 방식 전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하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이 방안은 현재 논의의 대상이기 어렵다.
또 하나의 길은 현행 소득대체율을 유지하면서 지금부터 단계적으로 보험료율을 올려 부과 방식 필요 보험료율과 격차를 줄이는 방안이다. 이후 어느 시점에서 보험료률 차이가 미래 세대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라고 판단되면 그때부터 보험료율을 유지하거나 아주 조금씩만 올리면서 점진적으로 기금을 줄여나갈 수 있다.
나 역시 긍극적으로는 부과 방식에 매력을 느낀다. 미래 인구 환경을 감안해 적립금을 일부 지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연금 재정 구조에서는 부과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보험료율을 단계적으로 올려가야 한다. 부과 방식 대안이 현단계 연금 개혁을 회피하는 논리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정녕 부과 방식 국민연금을 원한다면 지금부터 우리 세대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 방식에서는 우선 보험료율이 오르므로 당분간 기금은 더 늘어난다. 결국 한국에서 부과 방식 전환은 21세기에는 현실화되기 어려운 프로젝트이다.
여기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이 부과 방식 전환에 주는 영향을 생각해 보자. 이 부과 방식 전환과 관련을 맺는다. 정부의 연금개혁안에는 보험료율 인상안도 존재한다. 이는 소득대체율 인상을 충당하는 보험료율 인상이다. 미래 재정안정화의 의미를 지니지 않기에 부과 방식 전환을 위한 보험료율 격차를 개선하지 못한다. 이렇게 보험료율 인상 몫을 소득대체율 인상을 위해 사용해 버리면 앞으로 부과 방식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보험료율 절벽은 더 높아져 버린다.
그래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연금 보장성 강화는 국민연금을 넘어 기초연금, 퇴직연금을 포괄하는 다층연금체계에서 모색하고, 국민연금 보험료율 카드는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활용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하는 이유이다.
이미 부과 방식 연금 존재한다 : 기초연금
정말 한국에서 내 생애 동안 부과 방식 연금을 접할 수 없는 걸까? 이미 우리 곁에 부과 방식 연금이 운영되고 있다. 바로 기초연금이다. 기초연금은 매해 노인에게 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부과 방식 연금이다. 2019년에 약 540만 명의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약 15조 원이 필요하다. 얼굴도 모르는 노인들을 시민들이 부양하는 아름다운 연대 제도이다. 또한 내가 늙었을 때도 이만큼의 기초연금을 받으리라는 기대도 점차 생기고 있다.
기초연금의 발전 속도도 빠르다. 2008년 이름으로 약 10만 원으로 시작한 기초연금은 10년만에 30만 원을 내다보고 있다. 서구 나라의 부과 방식 연금을 부러워하기만 할 이유가 없다.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앞으로 노인 수가 늘어나기에 기초연금 재정 규모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부과 방식 연금을 가진다면 기초연금 제도 하나를 운영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부과 방식을 통한 직접적인 세대 간 연대를 구현한다면 무엇보다 기초연금의 강화가 가장 적절한 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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