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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8일 월요일

‘말모이’, 그 감춰진 이야기

‘말모이’, 그 감춰진 이야기<칼럼>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김동환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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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8  0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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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로 출발해 『큰사전』으로 결실맺다
‘말모이’란 영화가 세간의 화제다. 일제 말기 조선어학회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팩션(faction)이다. 작가의 기발한 구상에다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로 그 줄거리의 진위를 떠나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생소한 말모이란 단어도 새삼 회자되고 있다.
말모이란 보통명사와 고유명사로 이해할 수 있다. 보통명사로는 사전(辭典)에 대한 순우리말 표현으로, ‘말’이라는 명사에 ‘모이’가 붙어 만들어진 합성어다. ‘모이’는 ‘모(으)다’의 어근인 ‘모’에 명사파생접사 ‘이’가 붙어 형성된 말이다. 따라서 ‘말모이’란 ‘우리말을 모아 놓은 것’ 혹은 ‘우리말을 모아 놓은 책’ 정도로 그 의미를 새길 수 있다. 후일 최현배가 사용한 ‘말광(말을 모아놓은 곳간)’이라는 순우리말 역시 이와 유사한 단어다.
고유명사로서의 『말모이』는 1910년대 조선광문회(이하 광문회라 칭함)가 주도한 ‘현대적인 국어사전’의 제목을 뜻한다. 『말모이』 사전 편찬의 출발은 1911년 광문회를 중심으로,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인 김두봉·권덕규·이규영이 민족주의적 각성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주시경의 죽음(1914)과 김두봉의 망명(1919), 연이은 이규영의 죽음(1920)으로 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그 원고가 계명구락부로 이어지고 조선어학회로 계승되면서 편찬 작업이 이어졌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당시 압수된 원고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3일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면서 1947년 『조선말큰사전』(1권)으로, 이후 1957년 『큰사전』(6권)이란 이름으로 완간되었다. 『말모이』(1911)로 출발하여 『큰사전』(1957)으로 결실을 맺었다.
국문연구회로 출발해 한글학회까지 이어지다
영화 ‘말모이’로 대유(代喩)되는 조선어학회의 맹아는 국문연구회(혹은 국어연구회, 1907년 1월)로부터 출발한다. 주시경이 연구원 겸 제술원으로 참여한 이 단체는 지석영이 대한의학교내에 설치한 최초의 우리말 연구회였다.
이후 1907년 7월 우리말 연구의 필요성에 의해 마련된 기관인 국문연구소가 등장한다. 이 기관은 대한제국 학부 안에 설치한 한글연구기관으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정음청(正音廳) 설치 이후 한글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연구기관이었다. 주시경은 국문연구소의 주임위원(奏任委員)과 후일 전임위원(專任委員)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뿌리는 1908년 주시경에 의해 조직된 국어연구학회다. 이 학회의 주축은 하기국어강습소의 졸업생 및 유지들이었다. 이 강습소는 주시경이 1907년 국어·국문을 강습하여 자국사상(自國思想)을 장려할 목적으로 상동청년학원 안에 개설한 강습기관이었다.
국어연구학회는 1909년 국어강습소(후일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를 정식으로 부설하고 이후 수많은 수강생들을 배출하였다. 1917년까지 중등과가 6회에 걸쳐 총 265명, 고등과가 5회에 걸쳐 110명, 초등과는 1914년 1회 졸업생 8명을 길러냈다.
주시경의 후계학자 대부분이 이 곳 출신으로 후일 조선어학회의 주축을 이뤘다. 김두봉·이규영·권덕규·신명균·최현배·이병기·정열모 등을 위시하여 윤복영(尹福榮)‧송창희(宋昌禧)‧박승두(朴勝斗)‧김두종(金斗鍾)‧이세정(李世楨)과 같은 인물들이 모두 이곳 출신들이다.
그러나 국가가 망하면 국어도 없어진다. 일제의 병탄 이후인 1911년 9월 국어연구학회를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로 바꾸게 된 배경이다. 국어강습소 역시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하였다. 주권을 빼앗겼던 시기, 일제의 강압에 의해 우리의 국어를 국어라 못하고 조선어라는 명칭으로 타자화 시킨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국어로 자리 잡은 것이 일본어다. ‘나’를 ‘나’라 못하고 ‘그’라고 칭하게 된 역사적 아픔이다.
그 배경은 이렇다. 조선언문회로 바꾸기 한 달 전인 1911년 8월,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조선교육령」을 발포한다. 제5조는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기능을 전수하고 특히 국민다운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일본어-필자 주)를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우리말이 나그네의 언어인 조선어로 몰락하고, 일본어가 국어의 자리를 차지하여 주인 행세를 하게 됨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지금은 비록 한글학회로 자리 잡았지마는, 조선어학회란 명칭 역시 그 아픔의 연장이었다.
국어를 국어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에서, 조선언문회라는 명칭은 주시경에게도 뼈아픈 충격이었다. 조선언문회를 순우리말 ‘배달말글모듬’으로 바꾼 이유다. 1913년 ‘배달말글모듬’을 ‘한글모’로 다시 개칭하고 1914년에는 조선어강습원도 ‘한글배곧’으로 바꿔 불렀다.
1914년 7월 주시경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제자 김두봉과 신명균 등이 중심이 되어 ‘한글모’와 ‘한글배곧’을 이끌었다. 광문회로부터 시작된 『말모이』를 조정하여 사전으로 개편하기 시작한 때도 이 무렵이다.
1916년 스승 주시경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말본』을 출판한 김두봉이 1919년 상해로 망명했다. 또한 1920년에는 조선언문회통사(朝鮮言文會通史)인 『한글모죽보기』를 기록한 이규영마저 사망하고 만다.
신명균‧권덕규‧장지영‧김윤경‧이병기 등은 새로운 재충전의 길을 모색하였다. 1921년 휘문의숙에 모여 조선언문회(한글모)를 조선어연구회로 재창립한 배경이다. 이들은 조선어강습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가갸날’(1926, 1928년에 한글날로 개칭)을 제정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에 적극 앞장섰다. 그리고 1927년에는 기관지로 『한글』을 창간하여 한글 보급에 더욱 매진한다. 이 조선어연구회가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편되었고 해방 이후인 1949년 지금의 한글학회로 이어진 것이다.
감춰진 이야기, 대종교
‘말모이’에서 감춰진 부분도 지나칠 수 없다. 가장 꼽아야 할 이야기가 대종교와의 연관성이다. 흔히 원초주의(原初主義) 입장에서 민족을 이해할 때 중시되는 요소로 종교와 언어를 꼽는다. 이 두 요소는 집단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데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정체성은 중차대한 위기의 시기였다.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에 의한 대종교 말살과 일본어 국어정책에 의한 우리말의 탄압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에 대한 대종교의 저항 역시 총체적 방면에서 이루어진다. 언어적 저항도 대종교 항일투쟁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역사적으로도 훈민정음 등장 이후 구한말까지, 우리의 말과 글은 국어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저 언문(諺文)이나 ‘암클’ 정도로 업수이 여김이 전부였다. 그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중화적 사회구조와 밀접하다. 까닭에 우리글의 의미를 민족문화의 반열 위에 내세운다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틀과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의미와도 상통했다.
정신적으로는 유교적 사대모화사상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며, 구조적으로는 기득권 지식층의 한문어(漢文語)를 청산하고 우리글의 민중 보급을 조직적으로 도모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말모이’ 시대의 한글운동은 중화적 가치의 청산과 함께 일본어 국어정책에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이중투쟁이었다.
대종교와 ‘말모이’는 표리 관계다. 『말모이』 편찬을 주도한 단체나 연관 인물들의 그 불가분성에서도 살필 수 있다. 『말모이』는 광문회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어학회로 연결된다. 최남선이 주도한 광문회는 대종교의 정신으로 국학의 재건을 도모했던 모임이다. 또한 우리의 고전들을 수집‧간행‧보급하여 우리 민족 역사와 전통의 우수성을 일깨우려 단체였다.
당시 직접 참여한 인사로서는 최남선‧김교헌‧박은식‧류근‧주시경‧김두봉‧이규영‧권덕규‧이인승‧남기원 등을 꼽을 수 있다. 김교헌‧박은식‧류근 등은 최남선의 실질적 스승이었다. 또한 주시경‧김두봉‧이규영‧권덕규 등은 『말모이』를 주도한 핵심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가 대종교의 중심인물들이었다는 점이다.
『말모이』의 1차적 성과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간행(1936년)한 조선어학회 역시 대종교의 국내비밀결사였다. 당시 대종교의 핵심이었던 이극로를 비롯하여 최현배‧신명균‧권덕규‧이병기‧이윤재‧한징‧정인보‧안재홍 등이 그 중심인물들이다,
조선어학회사건도 대종교와의 연관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당시 교주였던 윤세복이 만주 동경성에서 이극로에게 보낸 ‘대종교 노래 가사[檀君聖歌]’와 연결된다. 그 가사가 조선어학회 이극로의 책상 위에서 일경(日警)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조선어학회사건의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다.
일제가 “대종교는 조선 고유의 신도중심(神道中心)으로 단군문화를 다시 발전하는 표방 하에서 조선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 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 만큼 조선독립이 그 최후 목적”이라고 못 박은 것이나, “(조선어학회는) 어문운동의 방법을 취하여 그 이념으로써 지도이념을 삼아가지고, 겉으로는 문화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독립은 목적한 실력배양단체”로 지목한 것도 동일하다.
국내의 조선어학회사건과 만주의 임오교변(壬午敎變, 대종교지도자 일제구속사건)이 1942년 10월〜11월 사이 동시에 자행된 것도 이러한 배경과 연결된다. 우리 정체성의 중심인 정신(대종교)과 언어(조선어학회)를 일거에 붕괴시키기 위함이었다.
가슴에 새겨야 할 인물들, 주시경부터 한징까지
‘말모이’ 그 중심인물들의 삶 또한 굴곡이 컸다. 그 대표적 인물이 대종교적 언어민족주의의 선봉에 섰던 주시경이다. 배재학당 졸업 당시에 받은 예수교 세례를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무력침략보다 정신적 침략을 더 무서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1914년 7월 27일 39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한글을 통한 언어민족주의와 한글 대중화를 위해 오로지 헌신했다.
그는 국어학자인 동시에 국어를 통하여 민족혼을 불어넣은 사상가였다. 1908년에 이미 우리말에 대한 연원을 단군시대로부터 찾았으며, 그러한 우수한 언어와 문자에 대해 사천 년 동안 연구가 없어 어전(語典) 한 권도 갖추지 못했음을 개탄한 인물이다.
주시경은 1909년 대종교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대종교의 교리와 거의 동일한 주장으로 그의 논리를 펼쳤다. 그가 1909년 『국문연구』에서 주장한 단군의 신성한 정교(政敎)에 의해 그 언어는 고상하고 국문의 본원도 심원하다고 말한 것이나, 1910년 『국어문법』을 통해 드러낸 대동아주의적 역사관 및 우리 국어의 출현이 단군의 강림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특히 1909년에 저술한 『국문초학』에서는 단군의 출현 배경과 조선이라는 국호에 대해 설명하고, 단군신앙과 연관된 유적 소개와 함께, 단군시대의 광활한 영토와 강력한 국력을 찬양하고 있다.
주시경의 이러한 주장은 대종교 사관에 나타나는 ‘단군-부여 정통론’과 맞닿는 것이며, 단군시대의 신성한 역사에 대한 찬양 또한 대종교 사관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우리글의 명칭을 ‘한글’이라고 처음 명명한 인물도 주시경이었다.
광문회 시절부터 주시경과 함께 『말모이』 편찬을 주도한 김두봉·이규영·권덕규의 삶도 애환이 많다. 김두봉은 1914년 스승 주시경의 유지를 이어 『조선말본』을 저술하고, 이어 1916년에는 대종교 교주 홍암 나철의 구월산 순교(殉敎)를 시봉(侍奉)하였다. 1919년 상해로 망명한 이후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도 『깁더조선말본』(1922년)을 간행한다. ‘깁더’란 증보(增補)했다는 의미다. 해방 이후 북한을 택한 김두봉은 북조선의 국어 확립에 적극 기여하였으나, 종파주의자로 낙인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규영 역시 31세라는 짧은 삶을 살면서 우리말 바로잡기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인물이다. 그의 저술 『온갖것』(비망록), 『말듬』(기초문법서), 『한글모죽보기』(조선언문회연혁), 『한글적새』(국어연구서), 『읽어리가르침』(敎案) 등에 나타나는 우리말 갈고 닦음이 그 흔적들이다.
권덕규의 삶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김두봉의 망명과 이규영의 죽음 이후 『말모이』의 유업을 떠안다시피 한 그였다. 식민지라는 ‘술 권하는 사회’ 속에서 집 팔아 술로 채운 인물이 누가 있을까. 그가 바로 권덕규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병으로 인해 기소중지가 되고 해방 이후 쓸쓸하게 숨을 거둔다. 애틋한 것은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27년 『한글』 창간의 동인인 이병기·신명균·최현배·정열모 등의 자취도 더듬어 볼 일이 다. 이병기는 우리나라 현대시조의 개척자로,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직접 배웠다. 창씨개명의 거부와 일체의 친일적 내용이 담긴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은 대쪽 같은 애국자였다. 이러한 그의 정신적 배경 또한 대종교와 무관치 않다.
신명균의 삶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는 조선어연구회와 조선어학회에서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으로, 1933년 10월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을 선도한 인물이다. 그해 11월 『주시경선생유고』를 엮어 발행한 인물도 신명균이다. 그의 삶에서도 대종교는 정신적 버팀이었다. 1941년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개명에 반항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지막 자결 당시 그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도 스승 홍암 나철의 사진이었다.
‘한배나라’ 하면 최현배가 떠오른다. ‘조국(祖國)’을 그렇게 부른 최현배다. 그는 주시경‧김두봉의 영향으로 대종교에 입교한 후 한글공부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한배’ 역시 대종교적 용어다. 학창시절 그가 중시한 두 가지가 주시경에 의한 한글공부와 나철에 의한 대종교 참여였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최현배의 한글사랑과 나라사랑, 그리고 그것을 통해 보여준 일제에 대한 문화투쟁의 배경 역시 대종교였음을 알게 해 준다.
정열모는 김두봉‧이극로와 함께 잊혀진 한글학자다. 6‧25 당시 월북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대종교 정신을 배경으로 조선어사전편찬위원,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어 사정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한글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대종교의 주요 요직 활동은 물론 해방 후 대종교단에서 설립한 홍익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인물도 그였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도 있다. 치타(러시아)에서 상해까지 걸어와 이광수를 놀라게 했다던 이극로가 그다. 조선어학회의 동력은 사실상 이극로의 열정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사장으로 어학회를 사실상 이끌었던 그는 주시경의 제자인 김영숙(金永肅, 대종교명으로는 金振)을 통해 한글연구에 눈을 뜬다. 이후 윤세복, 신규식, 안희제로 연결되는 대종교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독일로 유학을 했다. 더욱이 이극로는 베를린대학에 조선어과를 설치해 전세계에 우리 국어‧국문 그리고 우리 문화를 최초로 선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은인이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사한 이윤재와 한징도 묻어둘 수 없다. 특이하게도 이윤재는 1920년대 초 중국 북경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귀국 후 흥사단 활동과 더불어 대종교에 적극 가담하면서, 1928년 대종교남도본사에서 창간한 『한빛』을 주간한다. 이윤재는 그의 한자 호인 ‘환산(桓山, 한뫼)’의 ‘환’을 대종교의 ‘환인‧환웅’에서 따올 정도로 대종교 신자로서의 역사 인식이 투철하였다.
한징은 1920년대 초 민족언론 창달에 심혈을 기울였던 기자 출신이다. 그 역시 1923년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민족적 저항의 지평을 크게 넓혀 갔다. 그 정신으로 언어민족주의에 눈을 뜨고 조선어학회에 적극 가입한다. 그리고 이윤재·이극로·신명균·최현배·이중화 등, 대종교 동지들과 조선어사전편찬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또다시 나라고 외쳐댈 이 누구 없는가
올 해는 3‧1독립선언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정부나 민간이나 그 의미를 새긴답시고 세상 시끄럽다. ‘말모이’ 영화 역시 그러한 시의성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 주제 설정이나 올 초에 개봉한 이유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말모이’는 그 영화에서 보여주는 현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살핀 바와 같이 그 본질은 숨겨진 정신 속에 있다. 영화 ‘말모이’가 던지는 메시지 역시 그 본질을 찾아가라는 암시일 듯하다.
모든 것이 타자화 된 지금이다. 나를 나라 하면 눈총을 받는다. 국수주의자, 배타주의자, 편협주의자로 낙인됨이 태반이다. 그러나 묻는다. 나 없는 세상에 너는 누구고 그는 또 누구냐. 그저 너 나 없이 아무개일 뿐이다. 나를 나라고 못하는 세상에서는 너도 없고 그도 없다.
이제 한힌샘도 가고 배못, 검돌, 한별도 갔다. 가람, 주산(珠山), 외솔, 백수(白水), 고루, 한뫼, 효창(曉蒼) 등등의 인물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말모이』를 도모하던 동아리 역시 흔적마저 희미하다. 그들이 찾고 만들고 버티고 지키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나다. 나의 정신을 통한 나의 언어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감춰진 부분을 지금껏 말하려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나를 위하여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그들이다. 나를 나라고 외치며 살고자 목숨까지 걸었던 그들이다. 시간이 가고 아무개들만 날뛰는 이 세상에서, 또다시 나라고 외쳐댈 이 누구 없는가.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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