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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8일 금요일

BBC 김복동 할머니 일대기 ‘절규하며 죽었다!’

‘우리의 영웅’, ‘우리의 엄마’, ‘우리의 희망’
뉴스프로 | 2019-02-08 12:24:47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BBC 김복동 할머니 일대기 ‘절규하며 죽었다!’
-일본에 강한 분노, 끝내 사과 받지 못해
-‘우리의 영웅’, ‘우리의 엄마’, ‘우리의 희망’
BBC가 장문의 부고 기사로 김복동 할머니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유명한 정치인도 아닌, 유명한 과학자도 아닌 저 한반도 남쪽의 90세가 넘은 노인의 죽음에 대해 BBC가 그의 일생을 따라가며 되짚어내고 그의 죽음의 의미를 온 세계에 상기시킨 것이다.
그의 죽음과 삶을 되살리며 BBC는 일본의 전쟁 범죄와 사과하지 않는 파렴치함에 대해 전 세계에 알렸다. BBC는 그 가해자 일본에 대해 김복동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까지 강한 분노를 표시하며 ‘절규하며 죽었다!’고 전했다.
BBC는 3일 ‘Obituary: Kim Bok-dong, the South Korean ‘comfort woman’-부고: 한국의 ‘위안부’ 김복동 할머니‘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고 김복동 할머니의 참혹했던 일본군 성노예 실태, 해방 후 귀국, 어머니의 고통스런 죽음, 자신의 과거를 알리고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싸움에 나선 치열한 삶, 그 후 인권운동가로서의 삶과 끝내 사과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분노에 대해 끝까지 싸울 것을 당부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다루었다.
BBC는 ‘한국의 활동가 김복동 할머니가 향년 92세로 세상을 뜨셨다’로 기사를 시작하며 ‘할머니의 관은 서울에 주재한 일본 대사관 앞을 지나갔으며, 이 마지막 행렬에는 많은 조문객들이 현수막과 노란 나비들을 들고 함께했다. “일본은 사과해야 한다”라는 울부짖음이 군중들 위로 크게 울리기도 했고 또 다른 이들은 조용히 훌쩍였다’고 장례식 풍경을 전했다.
BBC는 이 장례 행렬에 대해 ‘이것은 일반적인 장례 행렬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복동 할머니는 일반적인 여성이 아니었고 이 장례 행렬은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훔쳐간 한 국가에 저항하는 이분의 마지막 행동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하며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여전히 불의에 맞서 싸우며, 그녀가 누릴 수도 있었던, 누렸어야 마땅한 자신의 삶을 낚아챈 일본에 대해 여전히 분노한 채로 월요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고 그의 죽음의 분노를 설명했다.
BBC는 ▲’I had to comply‘ ‘나는 복종해야 했다’ ▲First known footage of ‘comfort women’ ‘위안부’에 대해 알려진 첫 번째 영상 ▲’How could I tell anyone?’ “어떻게 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It’s not about money’ “돈이 문제가 아니다”로 나누어 김복동 할머니의 굳센 삶의 여정을 따라가며 조명했다.
특히 BBC는 김복동 할머니의 여성 인권운동에도 초점을 맞추며 “콩고민주공화국과 우간다에서 분쟁 중 성폭력을 당한 피해생존자들은 김복동 할머니를… ‘우리의 영웅’, ‘우리의 엄마’, ‘우리의 희망’이라고 부른다”는 정대협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 기사는 김복동 할머니가 2016년 일본의 10억 엔을 지불하기로 한 2015년 한일 협정을 비웃었다며 김복동 할머니가 원했던 것, 할머니가 이제껏 싸워온 것은 상대가 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BBC는 ‘김복동 할머니의 유산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며 “할머님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롤모델이시다”라는 장례식 참석 군중의 말로 김복동 할머니의 유지가 이어져 나갈 것임을 시사했다. (글, 이하로)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BBC 기사 전문이다.
번역 감수: 임옥
기사 바로가기: https://bbc.in/2Ts0OOL
Obituary: Kim Bok-dong, the South Korean ‘comfort woman’
부고: 한국의 ‘위안부’ 김복동 할머니
By Flora Drury BBC News
South Korean campaigner Kim Bok-dong has died at the age of 92
한국의 활동가 김복동 할머니가 향년 92세로 세상을 뜨셨다
The coffin passed the Japanese embassy in Seoul, accompanied on its final journey by mourners waving banners and holding yellow butterflies.
할머니의 관은 서울에 주재한 일본 대사관 앞을 지나갔으며, 이 마지막 행렬에는 많은 조문객들이 현수막과 노란 나비들을 들고 함께했다.
Cries of “Japan must apologise” rang out above the crowd, while others quietly sobbed.
“일본은 사과해야 한다”라는 울부짖음이 군중들 위로 크게 울리기도 했고 또 다른 이들은 조용히 훌쩍였다.
It was not your usual funeral procession. But then, Kim Bok-dong was not your usual woman, and this was her final act of resistance against a country which had stolen so much from her.
이것은 일반적인 장례 행렬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복동 할머니는 일반적인 여성이 아니었고 이 장례 행렬은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훔쳐간 한 국가에 저항하는 이분의 마지막 행동이었다.
Kim was one of thousands of so-called “comfort women” rounded up by the Japanese army and forced to work as sex slaves for years on end.
김 할머니는 일본군에 의해 붙잡혀 수년간 강제 성노예로 일하게 된 수천 명의 일명 “위안부” 여성들 중 한 명이었다.
She died on Monday, at the age of 92, without ever receiving the apology she wanted; still railing against the injustice; still angry with Japan for taking the life she could and should have had.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월요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여전히 불의에 맞서 싸우며, 그녀가 누릴 수도 있었던, 누렸어야 마땅한 자신의 삶을 낚아챈 일본에 대해 여전히 분노한 채로 말이다.
“I was born a woman,” she said, “but I never lived as a woman.”
“나는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여성으로서 살아 본 적이 없다.”
‘I had to comply’
‘나는 복종해야 했다’
It took Kim Bok-dong almost 40 years to find the strength to tell her story.
김복동 할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용기를 내기까지 거의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She was just 14 when the Japanese soldiers arrived at her family’s home in Yangsan, South Gyeongsang. They said she was needed to work in a factory. If she did not come, they warned her mother, the family would suffer.
할머니가 고작 14세였을 때, 일본군은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할머니 가족이 살던 집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할머니가 공장에서 일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했다. 만일 할머니가 따라오지 않으면 가족들이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할머니의 어머니에게 경고했다.
But Kim was not taken to work in a factory. Instead, the teenager found herself transported to one of hundreds of “comfort stations” set up 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across the territory it had seized.
그러나 김 할머니는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징집된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이 십대 소녀는 일본제국 군대가 점령한 영토 전반에 걸쳐 설치된 수백 개의 “위안소” 중 한 곳으로 실려가게 되었다.
First known footage of ‘comfort women’
‘위안부’에 대해 알려진 첫 번째 영상
These “stations” were, in reality, brothels where some estimate as many as 200,000 women were forced to work as sex slaves.
사실 이 “위안소”들은 추정상 약 20만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강제 성노예로 일하도록 만들어진 매춘굴이었다.
Kim, who should still have been in school, was among them.
아직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의 김 할머니는 그들 중 하나였다.
Her young age did not go unnoticed after she arrived in China.
중국에 도착한 후 그녀가 어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When they found out I was only 14, they talked among themselves saying ‘Isn’t she too young?’,” she told YouTube channel Asian Boss during an interview in October 2018.
“내가 14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렸을 때, 그들은 자신들끼리 말하길 ‘이 여자 아이는 너무 어리지 않나?’라고 했다”고 김 할머니는 유튜브 채널인 아시안 보스와의 인터뷰에서 2018년 10월 말했다.
Apparently, it was not a problem. She was sent to start work.
그것이 문제가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성노예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The first time, I got dragged into one of the rooms and beaten up a bit,” she recalled. “So I had to comply.”
“처음에 나는 여러 방들 중 한 방으로 끌려들어가 두드려 맞았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그래서 나는 복종해야만 했다.”
Afterwards, she said, the bed sheets were covered in blood. It was too much to bear, and she decided there was only one way out.
이후, 그녀는 말하길, 침대 시트는 피범벅이 되었다. 그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고, 그녀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뿐이라고 믿었다.
These Korean women were found by US Marines at a “comfort station” in China in April 1945
이 한국 여성들은 미 해군에 의해 1945년 4월 중국의 한 “위안소”에서 발견되었다.
Using the little money she had been given by her mother, she and two others convinced a cleaner to buy them a bottle of the strongest alcohol they could find.
어머니가 주신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그녀와 두 명의 다른 여성들은 청소부를 설득하여 구할 수 있는 가장 독한 술 한 병을 샀다.
They drank until they passed out, but it wasn’t enough. The three girls were found, and their stomachs were pumped.
그들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으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세 명의 소녀들은 발견된 뒤 위 세척을 받았다.
When Kim finally woke up, she made a choice – no matter what happened, she would live to tell the tale.
마침내 깨어났을 때 김 할머니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 이 이야기를 알려야겠다고.
‘How could I tell anyone?’
“어떻게 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The Japanese Imperial Army first introduced the idea of “comfort stations” in the early 1930s. It was supposed to stop their soldiers going on “raping sprees”, and keep them free of sexually transmitted diseases.
제국주의 일본군은 1930년대 초 “위안소”의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이는 일본군이 “무분별하게 강간하는 것”을 방지하고 성병을 옮기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In the beginning, it is thought they used prostitutes. But as Japan’s military grew, so did demand. Eventually, they turned to slavery.
초기에 일본군은 창녀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 군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수요도 늘었다. 결국 그들은 노예를 찾고자 했다.
The men, Kim Bok-dong later recalled, would line up outside, waiting their turn.
후에 김복동 할머니는 남자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고 기억했다.
Weekends were particularly dreadful. On Saturdays, she would work for six hours, the men arriving one after the other. On Sundays, it was nine hours.
특히 주말은 끔찍했다. 토요일이면 김복동 할머니는 6시간을 일해야 했고 남자들은 쉬지 않고 들어왔다. 일요일에는 9시간이었다.
Sometimes she would see almost 50 men in a day. Some days, she lost count. By the time her “shift” ended, she could barely stand up or walk.
어느 때는 하루에 거의 50명 가량을 상대해야 했다. 어느 날은 수를 세다가 잊어버리기도 했다. 하루의 “근무시간”이 끝날 때면 할머니는 거의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Kim was moved from station to station, and in 1945 she found herself in Singapore. The Japanese began to move Kim and the other comfort women out of the brothels. Kim found herself working as a nurse, still waiting for rescue.
김 할머니는 여러 위안소를 전전했고 1945년에는 싱가포르에 있었다. 일본군은 김 할머니와 다른 위안부 여성들을 위안소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는 간호사로 일하며 구조되기를 기다렸다.
After first telling her story in 1992, she became a dedicated justice campaigner
1992년 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한 후로 김 할머니는 열성적인 정의 활동가가 되었다.
It was 1947 when she was finally brought home to South Korea. She didn’t know how long she had been gone; she also didn’t know how to find the words to explain what had happened to her.
김복동 할머니가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7년이었다. 김 할머니는 자신이 얼마 동안 떠나 있었는지 알지 못했고 또한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How could I have told them about my experiences?” she asked. “I had things done to me that were unfathomable.”
그녀는 “내가 경험한 것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나?”라고 물으며,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많은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She wasn’t alone in her silence, as the University of Connecticut’s Alexis Dudden explains.
커네티컷 대학의 알렉시스 더든 교수가 설명하듯 할머니는 침묵을 지켰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I think her history following her return to Korea is a really good explanation of the double victimization of those who survived,” the history professor said. “There was not space in this society for the women to go public.”
더든 역사학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할머니에게 있었던 일은 생존한 위안부들이 겪어야 했던 이중 희생화의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이 사회에서 그 여성들이 대중 앞에 나설 곳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Kim did find her voice though, a few years after her return. Her mother wanted her to marry, and she felt she had to explain why she would not.
하지만 김복동 할머니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귀국한 후 몇 년이 지나서였다. 어머니는 그녀가 결혼하기를 원했고, 할머니는 자신이 왜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I confessed that, given all the abuse done to my body, I didn’t want to screw up another man’s life,” she told Asian Boss.
김복동 할머니는 “내 몸에 가해진 온갖 학대를 생각하면 다른 남자의 인생을 꼬이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고 아시안 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Her mother, she said, became distressed. Unable to share her daughter’s secret, she died shortly afterwards of a heart attack. Kim believed it was the pain of the secret which killed her.
김복동 할머니는 어머니가 많이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딸의 비밀을 감당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김 할머니는 어머니를 죽인 것은 바로 그 비밀의 고통이었다고 믿었다.
‘It’s not about money’
“돈이 문제가 아니다”
It would take decades for Kim Bok-dong to talk again about what happened to her. She moved to Busan, where she ran a successful fish restaurant.
김복동 할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기 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김 할머니는 부산으로 옮겨가 생선 음식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And then Kim Hak-sun came forward, sharing her own story of being imprisoned as a “comfort woman” by the Japanese in China – the first South Korean victim to break her silence so publicly. It was 1991. By March 1992, Kim Bok-dong had come forward to tell the world her account.
그러던 중 김학순 할머니가 중국에서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붙잡혀 있었던 본인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말했다. 김학선 할머니는 침묵을 깨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최초의 한국인 피해자였다. 그게 1991년이었다. 1992년 3월, 김복동 할머니는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She had incredible strength – she was a survivor,” says Prof Dudden, who first met her more than two decades ago. “She came forward to tell her truth. That is when she makes her mark on the page.”
20여 년 전 김복동 할머니를 처음 만난 더든 교수는 “김 할머니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생존자였다”며, “김 할머니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 때가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Her story would not just impact her fellow survivors in South Korea, though. It would bring together survivors from around the world – including women in Vietnam who had been attacked by South Korean soldiers during the US war. In 2014, she set up The Butterfly Fund to support fellow victims.
하지만 할머니의 이야기가 한국에 있는 동료 생존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 각지의 생존자들을 결집하게 했으며 그 중에는 미국과의 전쟁 중에 한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베트남 여성들도 포함되었다. 2014년 김복동 할머니는 동료 희생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나비재단을 설립했다.
“The survivors of sexual violence in conflict from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and Uganda, address Kim Bok-dong… as ‘our hero’, ‘our mama’, and ‘our hope’,” a spokesman for The Korean Council for Justice and Remembrance for the Issues of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recalls.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대변인은 “콩고민주공화국과 우간다에서 분쟁 중 성폭력을 당한 피해생존자들은 김복동 할머니를… ‘우리의 영웅’, ‘우리의 엄마’, ‘우리의 희망’이라고 부른다”고 회상한다.
Supporters marched alongside her coffin as it made its final journey through Seoul
지지자들은 서울 시내를 지나는 김 할머니의 마지막 여정에 할머니의 관을 따라 행진했다.
Kim did not just share her story. When she had money, she gave it. In 2015, she started a scholarship for children in conflict regions with her own money. The fact her own education had been cut so short was a regret until the end of her life. When it became clear she was dying of cancer in 2018, she began to give away what little money remained.
김복동 할머니는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알린 것만은 아니었다. 김 할머니는 돈이 있으면 이를 나누었다. 2015년 김 할머니는 자신의 돈으로 분쟁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장학금 지급을 시작했다. 이른 나이에 교육을 중단한 것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할머니에게 후회로 남았다. 2018년 암으로 죽을 것이 확실해지자, 할머니는 남아 있는 약간의 돈마저도 기부하기 시작했다.
But through all this – speaking around the world, campaigning outside the Japanese embassy every Wednesday – she still did not get the apology she felt she and the other victims deserved.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 즉 전세계에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모든 행동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자신과 다른 희생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과를 아직 받아내지 못했다.
She was derisive of the 2015 deal between the Japanese and South Korea, which saw her former captors pay 1bn yen ($8.3m, £5.6m) to fund victims. 김 할머니는 자신의 납치범들이 피해자들에게 10억 엔(830만 달러, 560만 유로)을 지불하도록 한 2015년 한일 협정을 비웃었다.
What Kim wanted – what she was fighting for – was a full admission of guilt. Some still allege the women were not forced to work in the stations.
김복동 할머니가 원했던 것, 할머니가 이제껏 싸워온 것은 상대가 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 여성들이 매춘소에서 일하도록 강요 받은 것이 아니라고 아직도 주장한다.
“We won’t accept it even if Japan gives 10bn yen. It’s not about money. They’re still saying we went there because we wanted to,” Kim told lawmakers in 2016.
2016년 김복동 할머니는 국회의원들에게 “우리는 일본이 100억 엔을 준다 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곳에 가고 싶어해서 갔다고 아직도 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South Korea’s President Moon Jae-In has since said he will renegotiate the fund, focusing more on the victims.
문재인 한국 대통령은 그 이후 희생자들을 보다 초점을 맞춰 그 기금을 재협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But it came too late for Kim. As she lay taking her final breaths, she expressed “strong anger” towards Japan, her friend Yoon Mee-Hyang told reporters. As Prof Dudden puts it, she “died screaming”.
그러나 김복동 할머니에게는 너무 늦었다. 윤미향 씨는 기자들에게 할머니는 병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며 일본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현했다고 말했다. 더빈 교수의 말처럼 김복동 할머니는 “절규하며 죽었다.”
But her legacy will not be lost. In among the crowd at her funeral was Kim Sam, 27, who first met Kim “sitting up straight even in the rain as she spoke about her struggle”.
하지만 김복동 할머니의 유산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군중들 중에 27세의 김삼 씨는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할머님은 투쟁에 대해 말할 때 빗속에서조차도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앉으셨다”고 말했다.
“Upright, dignified – that’s how she always was, first as a victim and later as a human rights activist,” she recalled.
“고결하고 품위 있게, 김복동 할머님은 늘 그러셨다. 처음에는 희생자로서, 나중에는 인권운동가로서”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She’s a role model I respect the most.”
“할머님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롤모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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