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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6일 목요일

생사의 갈림길을 지난후 장일순

생사의 갈림길을 지난후 장일순

휴심정 2018. 09. 06
조회수 492 추천수 0
*(이 글은 지난 7월14일 서울 옥인동 길담서원에서 무위당 서화전을 연 무위당사람들 구법모 이사가 무위당 장일순과 관련된 어르신이나 무위당에 대해 더 알고싶은 관객들을 초청해 연 대화모임을 월간 <퀘스천>이 녹취해 실은 것입니다.)

무위당 사람들

장일순1-.JPG» 무위당 장일순(1928~1994)

길담서원 <한뼘 갤러리> 서울 옥인동에 있는 길담서원에 '무위당 사람들'이 모였다.  모처럼 서울에서 <무위당 서화전>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무위당 장일순(1924~1994)은 가톨릭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함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했고, 이후 '한살림'을 설립하며 생명평화운동을 개척했던 선구자였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원주에서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구법모  이사는  자신의 소장하고 있던 10여 점을 선보였다. 지난 7월  14일, 길담서원에서 있었던 '소장자와의 만남'을 지상중계한다.

구법모 : 존경하는, 장(張) 일(壹)자, 순(淳) 자 선생님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린다는 게 사실 어불성설입니다. 81년에 처음 찾아 뵙고, 그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저를 한 찰나도 피곤한 기색 없이 그렇게 해맑게 대해 주셔서 항상 감사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저 고등학교 때, 함석헌 선생님이 “일제 순사가 될 것이냐? 독립투사가 될 것이냐?”라고 물었을 때, 그 앞에서 눈을 부라리면서 “독립투사가 돼야지요.” 했던 말이 시발점이 돼서 오늘 이런 자리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선, 이 자리의 큰 어르신으로, 장일순 선생님과 함께 평생을 함께 해오신 김영주 회장님이 원주에서 오셨습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모두 : (박수)
구법모 : 한 말씀해 주셔야지요. 회장님!
김영주 : 원주서 제법 일찍 떠났습니다. 12시 전에 떠났는데 오다 보니까 토요일이고 해서 길이 막히고, 서울 시내 저 청계천 와서는 길을 잘못 들어서 거기서 한 시간 이상 헤맨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늦게 와서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무위당 선생님을 모시고 우리가 일할 때, 선생님께서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제가 옆에서 뵈니까, 그분이 엄청 마음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에요.
다른 사람 만날 땐 그런 티도 안 내시는데,
예를 들면 당신 댁에서 시내에 나올 때면 이렇게 논둑길을 한참 걸어 나오셔야 해요. 그분 말씀이,  아침에 논둑길 걸을 때 풀을 밟으면 풀이 쓰러질 거 아녜요. 그런데 저녁에 들어갈 때 보면 그게 다시 다 서 있더라는 겁니다. “아, 내가 풀만 못 하구나." 그분도 박정희 때, 전두환 때 어지간히 짓밟혔던 분 아닙니까! "나도 밟히며 살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일어서질 못했는데, 너는 아침에 짓밟혀 쓰러졌다가도 저녁이면 다시 딱 일어서니 내가 너를 따라갈 수가 없구나.”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또, 저녁에 봉산동 댁에 들어가면 뒤에 나무가 우거져 있거든요. 그 나무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요. 다른 사람들이 “벌레 운다.”고 그러면,  “저 벌레가 내 스승이다.” 그러셨어요. 왜냐? “저 벌레는 저렇게 자기 마음껏 자기 소리를 하고 있는데, 나는 내 소리를 못 내고 있으니 저 눔이 내 선생이 아니냐!"고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절 보고 웃으셔요. 그렇게 마음을 달래셨던 분이지요. 그런 분 밑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저도 어떻게 그분을 좀 닮아갈까,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영 그게 안 되더라고요. 하하하.
모두 : 하하하.

만남-.jpg» 서울 종로구 옥인동 길담서원에서 열린 무위당사람들 구법모 이사와의 대화 모임

김영주 : 그분이니까 그렇게 사셨던 거지요. 오늘 모처럼 여, 서울서도 그동안 두어 차례 무위당 선생님 작품 전시회를 했어요. 오늘 세 번째 무위당 선생님 모시고 여러분과 한 자리에 같이 하게 됐습니다. 정말 반갑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여러분과 무위당 작품을 놓고 같이 얘기하고 얼굴을 맞 대는 게 마음이 참 흐뭇합니다. 그런 마음 계속 오래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오랫동안 사귀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이 자리를 준비해 주신 길담서원의 우리 박성준 선생님, 고생 많이 하시고, 그동안에 애 많이 쓰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저는 뵙기는 오늘 처음 봬요. 말씀만 많이 들었지 정말 이렇게 뵙게 되어 존경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 오늘 여러분들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저희 원주에서 제가 이사장님을 모시고 왔어요. 뒤에서 무위당 일을 이렇게 하시는 이사장님이 여러분한테 좋은 말씀을 해주실 테지요.
모두 : (박수).
성낙철 : 부끄럽습니다. 저는 〈무위당 사람들〉 이사장을 맡고 있는 성낙철입니다. 이런 기회에 여러분들을 만나 반갑고요. 선생님 생전에 서화전을 다섯 번인가 여섯 번 하셨는데, 한번도 당신 작품을 자랑하거나 특별하게 얘기하신 적도 없으셨지요.
후학들이, 또는 주변에 어려운 분들이, 어떤 일을 할 때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선생님이 작품을 써주셨지요. 선생님도 가지신 게 없으니까 돈 가진 분들 끌어내서 우리가 하는 일에 도움을 줄 생각으로 대여섯 번 전시회를 하셨던 거지요.
돌아가신 후에 유작전도 이번까지 하면, 서울, 대전, 광주 다해서 아마 이번이 스무 번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지역 주변 분들이 우리한테 요청이 와서 그렇게 했고요. 지금 제주도까지는 아직 못 갔습니다. 올해 아마 준비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고요.
작품을 통해서 선생님의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좀 더 공유할 수 있을까. 김영주 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언감생심 무위당 선생님처럼 살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나마 따라갈 수 있도록, 생각이나마 그렇게 하고 있는데, 오늘 <길담서원>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고맙고, 구법모 우리 이사님이 많이 애쓰신 거 같은데, 작품 보시면서 무위당 선생님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혹여 그 향을 좀 맡고 가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인사를 드리고요. 오늘 만나 뵙게 되어서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 (박수)

월입송성-.jpg 

구법모 : 이부영 의원님, 한 말씀 해주시죠.
이부영 : 하하하. 이 자리에서 전혀 얘기할 이런… 당황스럽게 저 사람은 상의도 안 하고.
모두 : 하하하.
이부영 : 뭐, 영주 형님 우선 이렇게 오랜만에 뵙게 돼서 좋고요. 저는 그저 장일순 선생님 살아계실 때 70년대부터 가끔 찾아 뵐 일이 있으면 가서 뵙고 그랬지요. 그런데 별 말씀도 안 하세요. 늘 숭늉 마시는 거 같은 그런 얼굴이시고, 막걸리나 한 잔씩……그런데 뭘 똑 부러지게 얘기를 안 하세요. 그 절이 어디죠?
누군가 : 구룡사!
이부영 : 구룡사 계곡에 가서 이제 1970년대 초에 꽉 막혀서 힘들 때입니다. 우린 그냥 속이 막 타들어가고 그럴 땐데, “뭘 걱정해. 곧 열릴 텐데.” 그렇게 위로하시더라고요. 또, 최열이 하고 우리 감옥 나와서 얼마 안 됐을 때에도, “걱정 마. 이게 다 전두환 같은 사람이 세상 잘 되게 하려고, 그런 일을 저지른 거거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속이 막 이상해지는데, 막걸리  따라 주시면서 막 먹이시더라고요. 하하하. 그 물이 참 좋았잖아요. 거기 발 담그고 앉아서 저희들이 더워하니까 물도 끼얹어 주시고 참! 민주화 성지 원주 같은 데 와서 저런 큰 어른한테 술도 받고, 수건 이렇게 뒤집어쓰고 물도 같이 맞고, 하하하, 그런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 나이가, 추모 사업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고요.
제가 경복궁역에서부터 더운데 이렇게 걸어올라오면서 곰곰이 이 양반 생각을 했어요. 며칠 전에도 경남 통영에 가서 윤이상 선생님, 박경리 선생님, 제정구 선생님 생각하면서 비가 막 쏟아지는데 걷는 일을 하면서, 원주에는 이 어른이 계시단 말예요. 부산에 가면 요산 김정한 선생님 계시고, 하나같이 그 일제 강점기, 또 한국동란 때 다 곡절을 겪으신 분들이에요.
윤이상 선생은 얼마 전에 화장해 모셔가지고 와서 그 음악당 통영 바다 보이는 데 모시려고 했는데, 그렇게도 그악스럽게 반대를 하는 거예요. 돌아간 분들 어렵게 고향에 모셔 와서 묘 쓰려고 하는데, 박경리 선생도 생전에 통영 고향 통영에 한 번도 안 가셨지요. 그쪽에서 애초에 그 남편분이 서대문 감옥에서 실종된 거 아시잖아요. 6·25 나던 그때 그런 곡절 다 묻어두고 사셨던 분들이란 말예요. 요산 선생이 어떻게 곤경을 치른 건 아시죠? 김정한 선생은 수장당할 뻔 했어요. 수장할 때,  마침 어떻게 그 현장에 있던 제자가 꺼내준 거란 말예요. 그 바다 주변에 수장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그때.
요즘 그런 분들 생각하면서 지역에 가서 이렇게 순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그 지역에 우리 좋은 후배들이 있고, 그들이 생각하고 따르는 그런 분들은 그런 곡절이 있는 모양이에요. 일제 때 감옥 갔거나 물론 그런 어른들을 마음에 두고, 모시고 하는 그런 젊은이들은 뭐 이념 관계없이, 종교 관계없이 모여있는 걸 보면 참 마음이 쏠립니다. 요새 그런 분들 찾아 다니면서 살고 있는데, 진해에 이효재 선생한테도 갔었죠. 올해 아흔 다섯이신데, 가서 절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다니면서 그러고 나면 마음이 참 좋아요.
오늘도 여러분들이랑 장 선생님 글 그림 이렇게 보면서 이런 향기를 함께 좀 맡아보려고 합니다. 저도 집에 보면 요만한 거 하나 받아 놓은 게 있더라고요. 그거 가지고 부족할 거 같아서 오늘 여기 나와서……하하하.
모두 : 하하하.

종타방-.jpg 

구법모 : 저보다도 오랫동안 선생님을 모셔왔던 어르신들이 참 많이 계십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선생님에 대해 논할 수는 없지만, 81년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저한테 해주셨던 이야기들도 함께 나누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이 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서울에서 자란 구 이사는 고교 1학년 때부터 흥사단에서 함석헌 등의 강의를 들었다. 재수를 거쳐 1981년 연세대 원주캠퍼스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원주지역 민주인사들의 단골식당이던 ‘천하태평’에서 장일순,·이창복,·김지하,·김민기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세례를 받았다. 가톨릭 모태신앙인 그는 가톨릭원주교구대학생연합회를 조직했고, 1984년 첫 직선제 총학생회장으로 뽑혀 학내 시위를 주동했다. 물론 감옥행을 각오한 투신이었지만 그때마다 지 주교와 장 선생이 방패막이가 돼 주었다. "
- 한겨레 신문기사 중에서

저는 원래 사고뭉치입니다. 고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께서 빨갱이 활동한다고 아버지를 불러다가 야단하시고, 학교 가면 또 왕따를 당합니다. 교무실에 가면 학교 친구들하고 이야기도 못하게 하고, 혹여 이야기를 하면 이야기 한 내용을 그 학생들 통해서 다 듣습니다. 그렇게 저를 감시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교 갈 생각을 아예 안 했어요. 일찌감치 그랬는데, 여기 앉아계신 정준원 선생님, 우리 <흥사단> 지도를 해주셨던 선생님이 계십니다. 오늘 오셨습니다. 정준원 선생님 때문에 제가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어요. 하하하, 아마 한 말씀해 주실 겁니다. 저를 보다듬어 주신 선생님이십니다.
모두 : (박수)
구법모 : 하하하. 서울 문리대 지리학과 나오셨고, 제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셨습니다.
정진원 : 벌써 40여 년 전 일이네요. 성남고등학교에 선생으로 있었던, 선생이라고 그러죠. 구법모 이사의 선생님입니다. 지금 와선 그냥 생물학적으로 선생이죠. 먼저 태어난 거뿐이지, 지금은 뭐 생각하는 거나 멘탈이 그야말로 ‘구법모 이사가 내 선생’이다, 그런 얘기합니다.
그때 고등학교 때 ‘흥사단 아카데미’라고 클럽 활동하는 게 있었는데, 그 지도 교사로 있으면서 구 이사를 처음 만나게 됐어요. 어느 날인가 그 수업에 들어가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춘원 이광수 얘기를 제가 했던 거 같아요. 그 ‘민족 개조론’ ,  그분이 쓰신 걸 얘기했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내 얘기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손을 들고 얘기하더라고요. ‘아, 그래? 좀 남다른 구법모다’ 하하하. 하여튼 어릴 때서부터 조금 가치 지향적이고, 이념 지향적인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구법모가 아니었나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하여튼 제자를 통해서 이렇게 좋은 자리에 제가 올 수 있게 됐고, 또 훌륭한 분들을 알게 되고 그래서 아주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모두 : (박수)
구법모 : 그리고 이제 81년도에 제가 또 귀중한 한 분을 뵙니다. 학교는 가되 학교 강의실은 못 들어갔습니다. 매일이 바빴습니다. 시위 주도 하느라고. 그럴 때 저한테 이렇게 말씀해 주신 분입니다. “데모를 할 때는 운동화 끈을 잘 매라.”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평소에도 늘 드러나지 않게 저를 보살펴 주시고 학교도 졸업시켜주신 장본인이십니다. 제 4년간 성적에 A 학점 받은 것도 그 과목이 처음입니다. 우리 안삼환 교수님, 말씀 좀 해주세요. 교수님.
안삼환 : 예. 선생님들. 제가 잘못 온 거 같습니다. 이런 데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전 독일어 선생이올시다. 제가 연대에 있을 때 원주 분교에 출강한 적이 있는데 저 학생이 학점을 달라고 찾아왔어요.
모두 : 하하하.
안삼환 : 제가 그때는 너무나 깐깐한 사람이고, 공부를 정상적으로 해도 학점을 잘 안 주는 선생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운동권에서 무슨 학생회장 같은 걸 하는 거 같았고, 데모한다는 걸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면서 ‘학점을 내놔라’ 그랬어요. 하하하. 그래서 내가 정말 이런 이야기하기 죄송한데, 저 자신도 사실 학교 다닐 때 데모를 하다 죽을 뻔 한 일이 있거든요.
그런 적도 있고, 또 그 당시 독일 갔다가 아주 발달된 민주적인 사회를 보고 한국에 돌아온 때인데, 보니까 참 엉망이에요. 그래서 제가 “학점을 주마. 그런데 그냥 줄 수는 없고, 뭐 좀 써 오너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하여튼 사전을 찾든 해석을 해갖고 한 페이지만 해오너라.” 그렇게 해서 제가 이 학생이 앞으로 뭣이 될지 모르지만, 기왕이면 A학점을 줘야 되겠다. 뭔가 깨달았으면 좋겠다, 해서 그런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런 말씀을……하하하,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두 : 하하하.
구법모 : 안삼환 교수님은 우리 연대에 계시다가 서울대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 중에 독문과 친구가 있는데 졸업을 못 해요. 그래서 제가 “아니 너 왜 졸업을 못하니?” 물으니까 “아! 독문과 필수과목을 F 받아서 졸업은 못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바로 그냥 교수님한테 끌고 가서 “얘가 제 친굽니다. 졸업 좀 시켜 주십시오.” 하하하. “아, 그래? 그런데 말이야……” 안 교수님은 그런 분이셨지요.
모두 : (박수)

민주화의 성지 원주에서 만난 무위당
민주화 묻자 ‘전두환 사랑하라’ 선문답

구법모 : 저는 스승님 복이 많았던 거 같습니다. 장 선생님은 말씀해 주실 때 큰 말씀을 해 주세요. 항상 “저 뜻이 뭘까? 뭘까?”
제가 81년도부터 항상 제 마음에 가지고 있는 화두가 있어요.  “전두환을 사랑하라” 제가 민주화에 대해 묻자 해주신 말씀이에요. “아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사랑을 합니까?”, “네가 전두환이었다면 어떻게 하겠니?” 그 말씀에 제가 무너졌습니다.
아, 그리고 어느 날은 『선가귀감』을 저한테 주시면서 꼭 읽어 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읽고 갔더니 "그럼, 이야기를 해봐라" 선생님은 굉장히 겉으로는 이렇게 하신 거 같아도 되게 철저하십니다. 책을 주시면 정확하게 독후감을 말씀을 드려야 돼요.
우리가 뭐든 언어화시키려고 하죠. 그럼 제대로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근본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거죠. 우리가 장 선생님에 대해서도 뭐 동학이다 뭐다 선생님을 절단합니다. 우리 스타일대로, 그건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리 우리가 어떤 용어를 가지고 어떤 컨셉을 가지고 선생님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선생님일 수 없습니다.
제가 스무 살 때 원주엘 갔거든요. 얼마나 개구쟁이였겠어요. 얼마나 제가 못 됐냐 하면 아무 때나 찾아가요. 저녁에도 가요. 그때 어떤 분이 왜 그렇게 선생님 댁에 드나드느냐고 저를 혼내는 분도 계셨어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 들으면 신이 나니까 저녁에도 가고 아침에도 가고 그냥 항상 가는 겁니다. 봉산동 댁에.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한 번도 불편해 하신 게 없어요. 아니 그게 느껴졌으면 저도 한참 민감할 때니까 자제를 했겠죠.
그런데 단 한 순간도 “왔니”, “앉아라” 늘, 제가 한겨레신문 인터뷰한 내용도 그거지만, “거울 앞에서 죽도록 뛰어 봐라.”,“니 얼굴이 제대로 보이니?”, “아니요”, “세상이 그렇다. 뛰면, 뛰는 상태에선 아무것도 안 보여.” 화두죠 화두!
그리고 한참 지났어요. “밑으로 기어라, 평생 기어야 한다.” 우리 선생님 그 말씀 많이 들었잖아요. 우리 저 남철이 형도, 우리 항상 하하하…
그 긴다는 게 단순하게 기는 게 아니에요.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절절해져요. 저는. 지난번 한겨레 인터뷰 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선생님을 감히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지만,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풍우기능롱청향(風雨豈能籠淸香)'이란 것은 선생님께서 저한테 써주신 결혼식 할 때 써주신 말씀이십니다. 제가 항상 생각을 합니다.
'풍우와 향' … 비바람이 어찌 향을 막을 수 있나. 결론은 비바람에 우리 운동권은 너무 익숙해있지 않습니까. 즉 향이 없는 비바람… 그런데 『신심명』이라고 하는 책을 보면 우리가 ‘시비선악유무’에서 시에, 비에, 선에, 악에, 유에, 생에, 무에 취해있는 것도 편견입니다. 동시에 부정을 해야 되는 거지요. 시는 시야니라, 비는 비야니라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선생님의 말씀이… 바라보는 관점이 틀리지요. 관조를 하지요. 거 관조할 수 있는 거는 뭐냐.
선생님도 그런 말씀 많이 하셨어요.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내가 그때 그러지 않았어야 되는데” “그 있잖어” 그런 말씀 하세요. 그건 뭐냐? 한 찰나에도 선생님이 머뭄이 없으신 거 같다. 끊임없이 들여다보시고. 그게 생명이 갖고 있는 힘이라는 겁니다. 선생님은 평생을 그걸 하신 거예요.
제가 유일하게 어디 가서나 우리 저 〈몽양 사업회〉 거기 가서도 우리 이부영님께서 저를 이사로다가 추천을 해주셔서 제가 읊은 시가 바로 그겁니다. 서산대사의 시인데 ,

만고의 도성은 개미집이요
천하의 호걸은 하루살이다
밝은 달 베개 삼아 고요히 누었으니
부는 솔바람 갖은 곡조 아뢰네

여기에 풍미는 부는 솔바람 이 역사를 보면 얼마나 시비극이 많습니까. 시비극이 아니라 사실은 극만 있는 거죠.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 역사가 현대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충 선생님에 대한 개괄적인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또한 제가 갖고 있는 제 편견일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럼 이제 같이 이야기하면서 진행을 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굉장히 아름다운 자립니다. 여기 돈 있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돈이 있으면 선생님 말씀이 절대 안 들어옵니다. 권력이 있으면 절대 선생님 말씀이 안 들어옵니다. ‘왜?’ 그렇게 세상은 철저하게 엮여있습니다. 제 주변에 천억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제가 항상 가서 밥을 사고 커피를 삽니다. ‘왜?’ 생각하는 게 항상 1조래요. 1조, 1조만 생각한대요. 인생이 그런 거 같아요. 강박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 돈이라는 것도 선생님께서 그 말씀 해주셨어요. 저한테, “법모야 내가 6·25 때, 아무 것도 소용이 없더라. 물질이라는 건, 전쟁이 일어나니까 아무 의미 없더라.” 
제 얘기는 조금 미루고,  혹시 궁금하신 점 먼저 질문을 받겠습니다.

채근목과-.jpg 

5·16 쿠데타 비판, 사회안전법에 걸려
평생 원주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

어떤 분 : 자제분이……장 선생님 자제분이 있잖아요.
구법모 : 삼형제십니다.
어떤 분 : 근황이 어떠신지.
구법모 : 다들 잘 살고 계십니다.
모두 : 하하하.
구법모 : 아들이 셋입니다. 큰 아들이 사업하시고요. 둘째 아들도 직장 잘 다니시고, 셋째 아들은 학교 교수님이시고.
어떤 분 : 한 분과 좀 인연이 있는데.
구법모 : 네네.
어떤 분 : 그리고 또 하나 질문은 장 선생님이 ‘대북관’이나 ‘통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으셔요?
구법모 : 있으시죠.
어떤 분 : 요즘 상황에 비춰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구법모 : 원래 선생님께서는 ‘평화주의자’이십니다.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시기 때문에 뭐든지 다 인정을 해주시죠. 그게 맞지 않습니까? 각자 살아온 삶의 형태들이 다 다른데……
어떤 분 : 그 부분은 조금 제가 설명을 드릴까요. 선생님이 1962년도인가 3년도에 ‘중립국 강화론’을 말씀을 하셨죠. 이를테면 미국과 소련, 자유나 공산 진영이 아닌 대한민국도 중립국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마 그때 아인슈타인하고도 그 서신을 교환하시면서 대한민국은 중립국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셨죠. 그때부터 이제 박정희 씨한테 미움을 받기 시작했고, ‘사회 안전법’에 걸렸었죠. 그래서 당신이 세상 밖을 다니시는데 편안하지 못했고요. ‘사회 안전법’ 다 아시죠? 어디 다니려면 원주에 기거하시는데 서울 가시려면 “서울 어디 구법모를 만나러 간다.” 이런 거까지 경찰서 정보과에다 신고를 하고 다녀야 했었죠.
요즘 문 대통령이 ‘중립국’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하는 거 같은데, 선생님은 62년도인가 3년도에 그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 대한민국이 살 수 있는 길은 중립국으로 가야 한다.” 그 얘기를 하셔서 선생님이 그때부터 핍박을 받기 시작한 걸로 제가 들었습니다.
구법모 : 저도 잘 모르지만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과정신학’으로 유명한 철학자인데, 현상을 보고 현상에 고집을 하는 순간 그건 제대로 못 본다는 거죠. 그 현상 또한 큰 프로세스라는 거죠.  우리 동양 사상하고 굉장히 잘 맞습니다.
……전 근본적으로 낙천주의자입니다. 선생님도 낙천주의자셨는데, 눈물을 많이 흘리셨죠. 그렇지만 그 눈물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우르면서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었어요.
여기 많은 분들이 아시지만, 선생님을 가장 괴롭게 하셨던 분들… 병상에 오셨을 때 도리어 위로해 주셨잖습니까. 선생님을 좌익으로 몰았던 그런 사람이죠. 친구인데. 그래도 뭐 학교도 같이 가고 그런 분이 오셨는데, 선생님께서 “자네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 평생 누구한테나 그랬던 분입니다.
그런데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느냐” 이거는 바라보는 견지가 틀립니다. 우리 불교에 유식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 보면 프로이트 같은 경우 칠식(七識)을 봤다면, 노자는 팔식(八識)을 봤다고 그래요. 선생님께서 하신 그 말씀은 팔식 단계죠. 선생님은 암이 왔을 때도 “암도 한 생명체인데, 암도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이 경지는 다르죠. 일반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과는.
어떤 분 : 저……
구법모 : 예, 말씀 하세요.
어떤 분 : 무위당 선생님 책이, 성인들처럼 당대에는 책을 안 쓰시고, 후대에 책이 몇 권 나왔잖습니까?
구법모 : 네네.
어떤 분 : 그런데 얼마 전에 탄허선사의 시종 되시는 분이 『탄허 전집』에서 무위당 선생님을 거론하셨어요. 탄허대사는 <화엄경>을 번역하신 당대의 선지식 아닙니까? 무위당 선생님 역시 관련 책들을 보면 불교뿐만이 아니라 천도교, 그리고 성경에 대한 해석도 탁월하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리영희 선생님 책에도 언급된 걸 봤는데, 무위당 선생님은 어느 한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심지어는 서양 철학까지 사상적인 부분에 있어서 타고난 분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단지 드문드문 발견되는, 물론 남다른 인식에 있어서 굉장히 공감을 하게 되는 그런 부분들이 있지만, 어떻게 후대에 책 한 권이 없으니까. 당신의 사상 전체를 집대성한 이런 책이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전혀 그게 없고, 그래서 좀 아쉬움이 있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도 좀 알고 싶고요. 또 그걸 계승하신 분도 별로 없는 거 같더라고요. 사상적으로.
구법모 : 제가 아는 대로 부연 설명을 드리면요. 아까 얘기 나온 ‘중립국 강화론’ 을 주장하시면서 ‘사회 안전법’에 걸려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으셨잖아요. 그래서 어딜 가시기보다 찾아오는 후학들이 많고 그랬는데 그때 말씀해 주셨던 것들이죠. 당신이 무슨 글을 하나 쓰면 그 당시는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박정희 시대 때는 온 문장을 전체 안 보고 문구 하나로 걸어서 사람을 징역 보내고 죽이고 그랬었잖아요. 그래서 당신의 주장을 글로 남길 수가 없었고요. 저희들이 지금 가장 어려운 부분이 뭐냐 하면 지금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어디서 무슨 책을 보니까 무위당 선생님 말씀이 나오고, 참 귀한 생각인데 싶어서 막 찾아 보다 보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참고할 부분이… 리영희 선생님 글 봐도 나오고, 여기저기 글에서 다 튀어 나오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그거를 찾아보려면. 당신이 두 가지 걱정을 하신 거예요. 자기 안위는 차치하고, 내가 글을 남기면 젊은 후학들이 이 글을 보고 또 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 거 때문에 고의적으로 글을 안 남기시고, 그러시고 후학들이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으면 뭐 장자에 나오는 한 구절, 노자에 나오는 한 구절, 선생님 생각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셨던 거죠. 그래서 지금 선생님 그 책에도 당신의 작품으로 나오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전국에서 1년에 한 4천 명 가량이 개인 또는 단체로 원주 <무위당 기념관>에 찾아오시는데, 저희들이 제일 어려운 게 바로 그런 거예요. 선생님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는 책 한 권이 별로 없고, 이를테면 이현주 목사님이 쓴 『노자 이야기』라든가 뭐 『좁쌀 한알』 이라든가 요런 짜깁기 형식으로 밖에 지금 나온 게 없습니다.
지금 여기 보시면, 선생님한테 작품 받은 작품들입니다. 선생님 작품 소장하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 책으로, 서화집으로도 만들어졌는데요, 일본에도 있고 약 1,200점이 모아졌습니다. 아직도 ‘나한테도 있다’ 이렇게 해서 내오시는 분들이 지금도 1년에 한 70~80점, 100점씩 들어오거든요.
그런 분 중에는 당시 선생님을 감시했던 정보과 경찰, 자기가 늘 지켜보기에도 너무나 훌륭한 분이니까 “저도 작품 하나만 써주세요.” 이렇게 해서 갖고 계신 분도 있고, 그때는 그걸 어디다 내놓지도 못했죠. 자기 목숨이 위태로우니까. 이젠 세월이 지나고, 그때그때 작품 받은 분들을 통해서 선생님이 어떤 생각이셨는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정리하고 있습니다.
또, 지금 최정연 작가라고 선생님 평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 연말쯤이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아마 평전이 나오면 여러분들이 궁금해 했던 사항들을 조금 더 아실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나라는 것은 찌꺼기일세,
맑은 물같이 그렇게

다들 아시겠지만, 선생님 작품은 깊으면서도 쉽습니다. ‘눈물겨운 아픔을 선생이 되게 하라’든지, ‘나라는 것은 찌꺼기일세, 맑은 물같이 그렇게’라든지, ‘한 사람이 한 입씩, 그것이 곧 삶이다’라든지 ‘어머니는 끝이 없네’라든지 뜻은 깊지만,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조주선사에게 어떤 학승이 물었습니다. 깊을 현(玄)자 현중현(玄中玄), “깊은 가운데 또 깊음이 뭡니까?”라고 질문하죠. 그러니까 조주가 아무 소리 안 해요. 여러분 보세요. 깊을 현 하나면 됐지 거기다가 가운데 중, 또 깊을 현 자를 써요. 조주선사가 한참 있다가 뭐라고 하냐면 “하나, 둘, 셋, 넷” 그럽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바로 그러신 분이세요.
뭐, 노자 같은 경우도 원래는 아무것도 안 쓰고 조용히 산으로 변방을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변방을 지키는 병사한테 걸려서 쓴 글이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으로 시작하는 그거지 않습니까.
또, 달마대사도 38대죠. 그 당시 수양제가 얼마나 많은 불사를 했습니까. 수양제가 많은 스님들을 불러놓고 자기 자랑을 열심히 하면서 달마에게 진리를 좀 얘기해 달라고 청해요.
그러니까 ‘무성(無聖)’이라고, 없을 무 자에 성스러울 성 자를 썼어요. 성스러운 게 없다. 수양제가 화가 나서 “도대체 말하는 너는 누구냐?”고 묻자 “나도 모르겠다.” 하하하. 저는 선생님께서 그거 다 보셨을 거라고 봐요. 그렇지 않고서는 선생님 작품에 그런 말씀들이 나올 수가 없어요. 다 보셨을 거예요.
탄허스님 말씀하셨는데, 제가 88년도 12월 달에 변각성 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했습니다. 주역하고 화엄경, 능엄경 너무 좋아서 능엄경 한 질을 선생님께 갖다 드렸더니 “이 귀한 걸 어떻게” 하시면서 즐거워하시더라고요. 그런 것을 보면 이미 다 그쪽에 회통을 하셨다고 봐요. 말씀은 안 하시지만 그래서 그렇게 큰 그런 것이고요. 그리고 선생님 말씀의 위대함이랄지 소중함은 어떤 사상, 어떤 학문 이것이 아니라 “각자가 살아서 한살림을 각자 해라”라고 하는 지금 우리 〈한살림〉이 있지 않습니까?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한살림〉 구조가 아니라, ‘에브리바디’가 다 한살림이다.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살지 말고 일원론적 세계관, 불교식으로 말하면 정등각(正等覺)해서 하나로서 삶을 살아라.
선생님께서 저한테는 어떤 말씀을 해 주셨냐면, “이제 독재는 간다” 그때가 81년도인데, “니가 밥을 어떻게 먹고 살 것이냐?”그러셨어요. 저는 생각도 못했어요. 이게 무슨 말이지?
그러다 84년도에 학생회장에 나서게 됐습니다. 그때는 학생회장 다 ‘국가보안법’입니다. 나가지 말아야 하는데, 안 나가면 제가 배신자 낙인이 찍힙니다. 배신자가 될 수는 없잖습니까. 한참 있다가 저를 부르시더니, “주교님과 다 얘기해 놨다. 제적으로만 얘기해 놨다. 감옥은 안 간다. 그렇게 알아라.” 그리고는 어느 날 또 부르시더니, 빨라 사북으로 가라고, 차가 들이닥칠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 하숙집에 있는 이상한 책들을 다 옮기고, 곧바로 사북 성당으로 갔어요. 아마 그때 치안본부로 끌려갔다면 제 승질에 아마 저도 지레 갈 수도 있었지요. 이렇게 선생님 보살핌을 제가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절절합니다.
여기 저 조카도 있지만, 세 분의 아드님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저보고 ‘니가 진정한 아들이다’ 그럽니다. 자기들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깊은 얘기를 못 나눴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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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해 주시죠. 우리 저기 박성준 교수님, 한 말씀도 안 하셨는데, 한 말씀 좀 해주시죠.
박성준 : 아닙니다. 그냥 잘 듣고 있습니다.
구법모 : 네, 하하하. 선생님께서는 항상 자애로우십니다. 제가 말투가 이렇게 못 됐습니다. 도전적입니다.  이렇게 도발적으로 질문을 해도 항상 웃으시면서 ‘그래, 그래’ 그러셨지요. 아이고 회장님 오셨네요. 우리 저 한기호 회장님, 제가 전화를 여러 번 드렸는데.
누군가 : 제가 한 마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았고, 요즘 아시다시피 이제 장수시대니까 열심히 경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거는 이렇습니다. 제가 본래 와이프 덕택에 무위당 선생님 책을 한 세 권 정도 독파했습니다. 그때까지 무위당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고요. 그렇지만 부끄럽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제가 다른 방면에서 살았기 때문에 몰랐다, 물론 이렇게 자기 방어적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자연과학, 공학을 했습니다. 공학을 해서인지 바른 건 바르고 틀린 건 틀리다 하는 주관적인 잣대가 아주 강합니다. 옛날에 저 EBS ‘정의란 무엇인가’ 이런 것도 싫어합니다. 두루뭉술하니까요. 저는 이게 맞느냐 틀리냐는 게 제 주관입니다. 그러니까 X+Y가 5면 3+2다 이겁니다. 4+1도 좋다. 딱 나와 있는 거를 이야기해야지 다른 쓰잘데기 없는 거는 사기꾼이다. 와이프한테 물어 보십시오 제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모두 : 하하하.
누군가 : 그런데 제가 볼 때 무위당 선생님은 정말 좋은 말씀 많이 하셨지만 조금 ‘희미하다’ 이겁니다. 제가 듣기에는 희미해요.
구법모 : 선생님 말씀이 희미하다?
누군가 : 노자 말씀도 하시고, 장자 말씀도 하시고, 공자 말씀도 하시고, 맹자 말씀도 하시고, 성경 말씀도 하시고… 저도 원불교를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열심히 다녀서 불교 쪽은 좀 압니다만, 제가 봤을 때 요즘 젊은이들이 무위당 선생님을 알겠느냐, 잘 모를 거라고 봅니다. 우리 저 SK 이사까지 하셨다고 들었는데.
구법모 : 죄송합니다.
누군가 : 요즘 젊은이들은 무위당 선생님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여기 모임에 계신 분들이 생각을 해보셔야 될 거 같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구법모 : 제가 맑스 공부를 했었는데 맑시스트 클라스의 개념이 뭡니까? 계급 이건 완전히 그냥 콘크리트 같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동양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누군가 : 제가 드리는 말씀은 이런 겁니다. 저 우리나라에 80% 이상은 좌니 우니 그런 거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자기 생활에 충실한 사람이 많아야 더 사회가 건전하다. 이렇게 보는 사람이거든요. 좌파니 우파니 관계없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아야 세상이 튼튼하게 움직인다. 이렇게 생각하고 저도 그렇게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무위당 선생님 책을 보면 아주 좋은데, 이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따라 갈 것인가. 특히 젊은 사람들 위해서 무위당 선생님의 생각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고민해 보시라는 거지요.
구법모 : 감사합니다.
모두 : (박수)
용을 : 저는 좀 잠깐 쉬어갈 겸, 저기 우리 따님들 계시나요? 우리 구 회장님 따님들?
구법모 : 네.
용을 : 저는 구 이사님을 형님으로 모시고 있는 후밴데요.
저 형님께서는 늘상 저런 당당함과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여기 연세 굉장히 많으신 선생님들도 있고, 아주 권력이 세셨던 분도 계신데, 항상 어디가도 당당하세요. 아주 거칠 게 없이 저러다가 다치는 게 아닌가… 하하하.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고요. 그다음에 우리 따님들 계시면 한번 앞으로 나오세요. 기왕에 왔으니까 우리 어른들한테 인사도 좀 드리고. 난 큰 딸 누구입니다. 둘째 딸 누구입니다. 정말 큰 스승님들이십니다. 그러니까 인사나 좀…
구법모 : 우리 저 큰 애구요. 둘째…
딸들 : 감사합니다.
모두 : (박수)
용을 : 바깥에서는 정말 당당하신데. 지금 댁에서는 우리 따님들한테 어떻게 하시나, 하하하.
딸들 : 하하하.
용을 : 저희 후배들한테는 굉장히 엄하거든요. 어떨 땐 막 때리기도 합니다. 하하하
모두 : 하하하
용을 : 우리 큰 따님 작은 따님 짧게…
큰딸 : 아, 저는 큰딸 구현경입니다. 저희 아빠는 집에서도 동일하게 하하하, 동일하게 당당하시고, 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 같은데 저희 어렸을 때는 되게 엄격하게 하셨어요.
용을 :그런 아빠가 괜찮으세요?
모두 : 하하하.
큰딸 : 부모님을 골라서 나오는 건 아니니까…
모두 : (폭소)
용을 : 작은 따님!
작은딸 : 안녕하세요? 저는 스물여섯 살 구화영입니다. 둘째딸이고요, 아빠는 음 … 아, 준비를 해올 걸… 하하하. 늘 같이 살아서 잘 모르겠어요. 하하하
모두 : 하하하.
작은딸 : 저도 그냥 언니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고요. 저희가 좀 크고 그러니까 오픈마인드가 되셨어요. 대화도 많이 하려고 하시고, 음, 좋은 아빠세요.
모두 : 하하하.
용을 : 아빠가 <무위당 사람들> 또, 도산 안창호 선생님 <흥사단>, 또 몽양 여운형 선생님 이런 데 다 관계하고 계신 건 알고 계셨나요? 큰딸
큰딸 : 아니요.
용을 : 그럼 장일순 선생님이나 이런 이야기를 따님들한테 안 해 주세요?
큰딸 :그냥 저희 집에 걸려있던 작품들 몇 개가 여기 지금 걸려 있는데요. 가끔 말씀해 주셨는데, 저희가 아마 듣고 잊어버렸던 거 같아요. 솔직히 저희가 그렇게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라서, 하하하.
모두 :하하하.
용을 : 아까 선생님께서 걱정하신 게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도 무위당 선생님의 뜻이 잘 전달이 됐으면 좋겠다 말씀하신 건데, 그래서 구 이사님한테 청합니다. 이제 앞으로는 자제분들에게 좋은 얘기 많이 해주시고 계속 지속적으로 힘써 주시기를, 감사합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모두 : (박수)
구법모 : 저기 한기호 회장님 늦게 오셨는데 선생님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시죠. 우리 다 같이 한 선생님에게……
한기호 : 아, 저는 시간 좀 맞춰서 오느라고 그랬는데 여기(청와대 옆 서촌)데모대가 많더라고요.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날 딱 붙들더라고. 보니까 아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가방부터 끌고 들어가는 거요. 그래 거기 가서 시간 좀 보내고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모두 : 하하하.
한기호 :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 시간에라도 맞춰서 오느라고 노력한 거는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 하하하.
구법모 : 제가 이렇게 장 선생님에 대해서 말씀 여쭙는다는 거 자체가 사실 결례라는 거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한테 비쳐진 상,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르신께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다른 또 질문 없으시면…
이부영 : 우리 김영주 선배도 아직 한 말씀 안 하셔서… 여러분들 그 장 선생님이요. 여러분들 장일순 선생 그러면 뭐 이렇게 난치고 글 쓰고 그런 모습 생각하시잖아요.
참 편안해 보이시죠. 그런데 그 어른 청년 시절에 해방이 됐어요. 청년이라면 가장 시대적인 감각이 예민할 때 아닙니까. 그때 서울대 입학을 하고 나니까 국대안 파동(國大案波動, 군정기인 1946년 미 군정청 학무국이 일제시대의 여러 단과대학들을 통폐합하여 단일 종합대학인 국립 서울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안을 발표하자 1948년까지 2년간 통폐합 대상 학교들의 교수, 학생들이 격렬히 반대한 사건) 찬성, 반대 이런 게 막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깐 미군정에서 국립 서울대학으로 만들려던 것은 일제 때 경성대학 그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그런 거예요. 서울대를 남한 사회의 지배 엘리트를 양성해 내는 그런 기관으로, 이제 식민지를 벗어났으면 자유로운 지식인이 돼야 하는데, 또 거기에 국가 이데올로기를 집어넣으려 했던 거죠. 그래서 이것 때문에 좌우로 갈라져 찬반이 일었는데 사실은 좌우로 갈라서 생각할 일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 얘기를 김 선배 얘기 안하세요?
저는 상상해요. 몽양 여운형 같은 분들의 생각. 그리고 장 선생님은 제가 70년대, 80년대 원주 드나들면서 만나 뵈었을 때 그 어른은 극단적인 거를 추구하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 분은 어떠셨을까, 아직 신탁통치를 받고 있지만, 하나의 독립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 몽양 여운형이나 김규식 선생 같은 분들도 그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셨을 거라고 봐요.
여러분들 몇 년 전에 정연주 씨가 KBS 사장 했을 때 ‘1945년 서울’ 그런 KBS 드라마가 나온 적 있었죠. 그때 그 지식인들 방황하던 모습 그게 어느 정도 좀 그려졌었죠. 나라를 다시 세우는데 어떤 방향으로 세울 것이냐. 그러나 결국 6·25 전쟁이 터지면서 우리 동족끼리 그렇게 싸우고 죽이고 이러면서 우리가 이 짓 하자고 독립 운동한 거냐, 이러면서 그 중간에서 고민하던 사람들이 좌우 양쪽에서 다 당하고 사라집니다. 저는 그때 낙향하셨다고 봐요. 그리고 정말 용하게 살아 남으셨어요.
예? 그런 고민을 왜 몽양이나 장일순 선생이 화끈하게 얘기를 안 하느냐. 그분한테 누가 그런 얘길 해요. 그때는 이쪽으로 쓰러지고 저쪽으로 쓰러지고 다 죽게 돼 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중간에서 고민하던 시기예요.
제가 아까 윤이상 선생이나 박경리 선생이나 부산의 요산 김정한 선생이나 이런 분들 얘기드렸죠. 그분들이 꼭 우리 장일순 선생하고 비슷한 사고 체계예요.
제가 이런 얘길 했어요.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열사나 유관순 열사 이런 분들이 자기 목숨 바쳐서 독립운동을 했잖아요. 이건 좀 만약입니다만, 만약에 해방이 됐는데 민족이 서로 갈라져서 서로 죽이고 이런다면 그 독립운동 했겠어요? 아니잖아요.
결국 그 윤이상 선생님이나 박경리 선생님 뭐 요산 김정한 선생님 이런 분들 머릿속에는 3·8선이 없었던 거예요. 휴전선이 없었던 거예요. 이게 허깨비 같은 일이지. 왜 우리가 이렇게 싸우고 죽여야 되느냐.
아마 장일순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 말을 직접 선생님께 물어보진 못했어요. 70년대부터 장준하 선생님, 저 천관우 선생님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성명서 발표할 때 서명 받아오라고 해서 저는 그런 심부름하고 다녔어요. 신문기자는 제대로 안하고 그런 심부름이나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말씀 들어보면 그분들이 좌익이냐, 아니거든요. 38선이나 휴전선을 인정 안 하고 있는 거예요. 머릿속으로.
장일순 선생님 말씀도 그런 얘기죠. 우리 역사가 분명히 하나로 간다. 참고 가자, 인내해라. 그때 광주학살 난 다음에 펄펄 뛰고 못 견디고 할 때 다독거리시면서 참고 가라고, 맞아 죽지는 말라고, 뭐 이렇게 가르치신 거예요. 이제 저 같은 사람, 이렇게 증언하는 사람도 몇 명 남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말씀들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로도 남겨야 되겠고, 오늘 구법모 후배가 이런 좋은 자리를 만들어서 또 한 번 장일순 선생님을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고,
한기호 선배도 잘 아시는데 말씀 안 하시려고 하는데, 하하하.
모두 :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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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 요새 굉장한 더위에 여기까지 오신 데는 그 발심해 주신 것만 해도 대단하십니다.  한 선배 얘기 좀 해요. 하하하.
모두 : 하하하.
한기호 : 없습니다. 많이 하셨으니까 이제 됐습니다. 여기 김영주 선생님도 계시고 그러니까.
이부영 : 그럼, 영주 형이…
모두 : (박수)
김영주 : 얘기 자꾸 하라니까 일어서긴 했는데.
모두 : 하하하.
김영주 : 우리에게 무위당은 어떤 사람이냐! 예를 들면 그림으로 따져 봐요. 이런 사람이다. 이렇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보기에는… 또, 어떤 사람이 무위당 선생을 그렸다, 해도 그게 완전한 것이냐. 그게 절대 아녜요. 그거는 자기 의사를 표시해 놓은 거뿐이지, 완전하게 무위당 자체를 그린 것이다. 그건 나타날 수가 없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어요.
이런 자리에서 꼭 말씀드리고 싶은 실화가 있어요.
무위당이 문리대 3학년 재학 중에 6·25가 나가지고 피난을 갔습니다. 서울에 살 수가 없으니까 고향 원주로 왔어요. 왔는데 피난들 가고 다 흐트러졌어요. 원래 살던 집에서 살 수가 없어요. 다른 데 옮겨가서 살아야 돼.
무위당 아버지, 할아버지가 아주 덕이 높으셨어요. 옛날에 중농이라고 그럴까. 그러니 소작인들이 많았어. 그 소작인들이 전부 우리 집으로 오시라고……, 그때는 좌다 우다 사람들이 약 오르면 막 고발하고 이런 땝니다. 그런데 거꾸로 자기네 집에 모시려고 이렇게 얘기를 했어. 그게 그 집안 선조들이 굉장히 덕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요. 그 재밌는 게 그 집에는 거지가 밥을 먹으러 가면 밥상에다 상을 차려요. 여름에는 마루에, 겨울에는 사랑방에 차려줬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거기 사회에서 그 집엔 너무 많이 가면 안 된다고, 자기네들끼리 얘기해서 숫자를 줄이고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 집안에서 자랐어요. 그러니깐 원래 그 심성 자체가 보통사람하고 다른 교육을 받은 사람이여.
그런데 그 양반 인생이 참! 저한테도 자주 그런 얘기를 하셨는데 6·25 때 여름, 요새지, 요새. 그러니까 덥잖아요. 그때는 지금하고 달라서 머리에 서캐도 있고, 뭐 가렵기도 하고 이럴 때요. 그래서 머리를 깎았단 말이오. 헌데 국군이 수복을 하게 돼서 들어온 거예요. 이북 군인 애들이 도망갈 거 아녜요. 딱 포로로 잡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옷을 갈아입고 숨어 다니니까 누가 인민군인지 잘 분간하기 어렵죠. 그래 “너 인민군 아니냐.” 누가 “나 인민군입니다.”하고  얘기할 리가 없잖아요. 그럼 잡아다 놓고 뭘 보느냐. 머리부터 봐요. 머리, 머리를 깎은 거는 인민군이야. 무위당이 머리를 깎고 있었단 말예요. 길거리에서 잡혔어요. 그때는 잡히면 즉결 처분한 시대요. 잡아다가 순서대로 세워놓고 딱딱 쏴서 죽이는 거여. 뭐, 조서 꾸미고 이런 시대가 아니여. 전쟁 시대니까. 머리 깎은 죄 때문에 붙들려갔어. 그리고 차례가 와서 저 논둑에 선 거요. 신호만 나면 ‘땅’ 쏘는 거지. 그런데 이거 지휘하는 군인이 죽는 마당이니까 한 마디씩을 시켜. 무위당은 그냥 성호만 그었대요. 그걸 보고 그 지휘관이 천주교 신자였는지, 스덥! 총 쏘는 사람덜 스톱시키고, “너 천주교 신자냐?” “예, 그렇습니다.” “증말이야?” “네.” “너, 이리 나와.” 거기서 제외가 됐어요. 그 양반이 죽고 사는 게 뭐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거여.
거기서 국군한테 넘겨져서 그냥 풀려난 게 아니라 저 보국대라고 그래요. 군인들 보급물자를 이렇게 짊어지고 전방에 날라주는 거 그걸 한 달 동안하고 살아서 나왔어요. 나와서 며칠을 잤다는 거 아녜요. 정신이 나가 가지고. 그 긴장을 하다가 풀어지니까 그냥 쓰러진 거야.
“내가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왔다 갔다 한 사람이다.죽고 사는 게 어떤 것이다.” 그게 몸에 뱄다고.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군고구마 파는 사람이 널판지 위에 쓴
'군고구마 팝니다' 라는 글씨를
우리 시대 최고의 글씨로 여긴 사람

그분의 일화가 재미있는 게 많이 있어요. 영어를 잘했어요. 학생 때부터도 영어를 잘했어요. 그 영어를 아주 개인적으로 교수 받다시피 한 제자가 한기호 사장인데, 그 영어를 잘했단 말예요. 잘해서 아인슈타인한테 편지를 썼어. “완 월드 무브먼트…(one world movement…)” 아이슈타인이 ‘하나의 세계 운동’이라는 걸 할 땐데, 그것을 효시로 해서 우리 한국에서도 그것을 하겠다고, 그때는 영어로 편지하는 사람이 강원도 원주에서는 그 사람 한 분 밖에 없었어요. 하하하, 서울엔 많았겠지만, 그런 생각이, 속이 터있는 사람이여.
또 원주에는 피난민들이 많아요. 원주라는 데가 지리적으로 그런 데니까. 부모들이 피난민 돼서 고생하는 건 둘째고, 제일 더 고생 많이 하는 게 애들 아닙니까? 학교 다녀야 할 아이들이 학교를 못 다니잖아요. 그 애들을 그냥 놔 둘 수가 없으니까 고등 공민학교라는 걸 만들어서 중학교 과정을 가르쳤어요. 인가 없는 중학교죠. 애들이 너무 불쌍하니까 거기서 학교 선생을 하는 거여.
그걸 보고 아버지가 “학교 복학을 해서 졸업을 한 뒤에 뭘 하던지 해야 할 게 아니냐. 서울로 가서 복학해라.” 그랬대요. 그러니깐 무위당이 무릎을 딱 꿇었어요. “아부지! 저를 좀 봐 주세요” “뭘?” “지가 서울 가서 공부할 돈이면 여기 원주에서 저 가난한 집 애들 70명이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걔들을 위해서래도 내가 선생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이놈의 자식 무슨 소리를 하느냐” 이럴 분이 아니라고. “그래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그래야지.” 그렇게 해서 거기서 애들을 길러 냈는데, 또 그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 해요. 고등학교 진학하는 서류를 냈더니 고등공민학교는 중학교 졸업할 자격이 없다 이거여. 안 되는 거여. 안 되니까 못 가잖아요. 이 무위당이 약이 오르니까 강원도에서 제일 좋은 학교가 춘천고등학교입니다. 춘고에다 학생을 보냈어. 보내 놓고는 학교에서 안 된다고 그러니까 그 학생들한테 영어 시험을 한 번 쳐 보라고, 너희 학교 졸업생보다도 훨씬 영어를 잘할 테니까. 시험을 쳐 봤어. 그 학생이 학생 영어 웅변대회 가서 1등한 사람이야. 그 장본인이 저 한기호씨! 하하하.
모두 : 하하하하하.
김영주 : 내가 본인이 없으면 이런 얘기 잘 안하는데… 그러니깐 춘고에서 깜짝 놀란 거요. 그래서 춘고에 입학했단 말여.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유지들한테 돈도 걷고 그래가지고 ‘대성 고등학교’라는 걸 인가를 냈어. 그 인가를 내러 갔는데, 스물여섯 살 때거든. 법인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의결되기를 장일순이 이사장을 하는 게 좋겠다고, 그래서 스물여섯 살 먹은 사람이 이사장이 돼서 학교 인가 신청을 했어. 그때 공무원이 아, 스물여섯 살짜리가 오니까, 그러니까 이게 이 아녀. 애가 왔다. 학교를 만든다고, 그러니까 얼마나 괄세가 심했겠어요. 두 번째 갈 때는 도포를 입고 고무신 신고 그러고 들어갔대요. 내가 어린 사람이 아니고 어른이라고, 하하하. 무위당이 그 얘기를 해요. 그렇게 인가를 내서 스물여덟 살부터 정식으로 학교를, 아직도 그 학교가 있어요. 졸업생이 한 4만 명 돼요. 
그런데 박정희가 정권을 쥔 다음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아요. ‘평화통일 주창자’ 죄목이 그거예요. ‘평화통일 주창자’. 군법회의에 넘어가서 8년 선고 받았어. 강원도에서 딱 한 사람, 그 무위당이 재판 받으러 가기 전에는 한 사람도 재판 받은 사람이 강원도에는 없었어요.
그때 박정희 정권 때 수사 담당했던 사람이 거기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다고, 그담부터 호통을 치니까 현미경을 놓고 강원도 사람을 조사를 했더니, 청년인데 평화통일을 주창한 사람이 있어. 이 눔이 보통 눔이 아니여. 그 당시에는 생각이 좌다 우다 그런 걸 떠나서 정말 그 민족적인 그런 기준에서 생각한 거야. 젊은 사람이죠. 그 양반이 그런 사람이 하나 발견이 됐어. 그 사람 하나가 대표로 뽑혀가지고 강원도에서 군법회를 한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어. 그것도 한 번에 못 가고 현미경으로 찾는 바람에 갔어. 가서 8년을 언도를 받았어. 무위당은 항고를 안 했어요. 나 다시 재판 해달라고 하질 않았어요. 왜 안 했느냐. 다른 사람들이 “ 아, 이 사람이 항고를 해야지 5년이 되든 6년이 되든 할 거 아니냐” 무위당은 “이게 재판이냐고, 애들 장난하는 거지. 맘대로 하라고 차라리 그게 낫지, 어디 가서 또 재판 받고 있냐고, 난 안 한다고.”
고스란히 8년이 확정돼 가지고 춘천 형무소에 갔어요. 그 형무소에 가서도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그때 부인이 옥바라지 하느라고 여기 평화시장에서 시다라는 게 있어요. 일본 말 시다, 조수란 말여. 미싱으로 이렇게 해주면, 단추 달고 실밥 뜯고, 시다해서 돈을 받아가지고 남편 춘천 감옥살이 하는데 가서 뒷바라지 한 거여. 이 남편이라는 사람이 보통 사람입니까! 거기 가만있으니깐 안 되잖아. 뭘 공부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영어로 돼 있는 책을 좀 사서 나한테 좀 넣어달라고. 그 영어로 된 책이라는 게 그때는 한국에서는 구하기도 어려운 거예요. 진보적인 학문의 책이여. 한국에서 바로 없어. 그러면 서점에서 외국에다가 수입 신청해서 들어오면 그것이 이제 본인한테 들어가는 거죠. 우리나라 옥살이한 분들 되게 많으시겠지만, 감옥에 있는 사람 책 그냥 들어갑니까? 그거 조사 엄중하게 하잖습니까. 성경이나 불경 아니면 다 조사에 들어가는데. 춘천 형무소에서 영어로 된 책을 놓고 좋다 나쁘다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사람이 없거든요. 하하하.
모두 : 하하하하하.
김영주 : 자기네들끼리 간부회의를 열어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 설마하니 미국에서 발행된 영문으로 된 책인데 빨갱이야 야 그런 책이겠느냐. 그게 결정이여. 패스가 됐다고. 그러니까 장일순 선생한테 들어가는 영문 책은 다 패스야.
이거는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는데 3년 동안 마누라가 보내주는 자기가 이렇게 부탁한 책을 집어 넣어가지고 공부했어. 나중에 원주에 지학순 주교 되는 분이 주교가 돼서 우리 인제 어디서 만났어. 그 얘기를 하는데, 네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서로 탐색해 봤을 거 아녜요. 지 주교는 로마에 가서 3년 동안 공부해 왔어. 그때는 이제 가장 진보적인 그런 책을 많이 읽고 온 사람이야. 공부를 했으니까, 박사학위를 따고 왔으니까.
그런데 이 양반이 얘기를 해보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진취적인 지식에 대해서 무위당이 아무 막힘이 없이 대답을 하는 거여. “어떻게 된 거냐?” 그러니까 무위당이 웃기는 사람이죠. 껄껄껄 웃으면서 “주교님, 내가 춘천 국립대학에 가서 3년 동안 공부하고 왔잖습니까!” 하하하.
모두 : (폭소)
김영주 : 지 주교라는 사람은 신부니까 그걸 못 알아들었어. 무슨 소린지. 그게 아니고 형무소에 가서 3년 있는 동안에 그 책 읽었다고 그러니깐 지 주교가 자기 책장에서 자기가 공부한 영어 원서의 진취적인 그 책을 꺼내들면서 “이거 봤냐?” “예” “그래? 그럼 이건?” “예.” 자기가 본 거를 다 봤던 거여. 거기서 지 주교가 손 든 거여. 너는 나하고 같이 일할 만하다. 그래 둘이 거기서 합작이 돼서 악수가 돼 가지고, 그럼 넌 이제 정치하고는 떠나라. 모든 일을 나와 같이 종교라는 우산 속에서 일을 하자. 그 사회 개발을 위해서 그런 방향으로 우리가 일을 하면 좋겠다. 거기서 서로 약속을 했어요. 그래 지 주교가 법적으로 보장해 주고 자금도 필요하면 다 대주고, 일은 무위당이 열심히 가르치는 걸 다 했죠. 그래 역사라는 게 다 그렇게 돼서 이뤄져 가는 거 같아요.
그런데 무위당이 항상 얘기하는 게 있어요.
죽음과 삶을 왔다 갔다 한 그런 경험 때문인지 항상, “그렇게 좁게 생각하면 안 된다. 더 넓게 세상을 크게 보고 봐야 된다.” 저한테 맨날 주문을 했어요. 제가 아주 귀에 다대기가 앉도록 들었어요. 항상 가끔 그런 생각이 나요. 아이고, 또 이거 무위당이 봤으면 이게 잔소리 할 건데, 하하하, 죄송합니다.
모두 :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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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법모 :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 김영주 회장님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하고 경기고등학교 동기십니다. 장 선생님하고 지 주교님하고 인연이 돼 가지고 평생…… 오늘 모시게 돼서 감사드립니다.
아까 학교 말씀하셨는데 저희 때는 학생운동 할 때 학교를 졸업한다는 게 수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제적당하면 그걸로 끝나는 걸로 알았죠. 그런데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 학교 졸업장은 꼭 있어야 된다. 저는 왜 그렇게 간절하게 그런 말씀을 하시나 그랬더니 선생님 말씀을 해주시는 거예요. “내가 졸업장이 없다. 졸업장이… 무조건 이건 내 말을 들어라. 무조건 들어라. 들어라…” 그때 저는 객기로, 졸업장에 신경을 안 쓰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 덕택에 제가 대기업에 가서도 일을 할 수 있고, 미국도 갔다 올 수 있었고, 하여튼 제가 막힐 때마다 족족 선생님께서 전부 다 이렇게 들어 주셨습니다.
김영주 : 한마디만 더, 사모님 얘기를 해드릴게요.
모두 : 와!
김영주 : 무위당이 장가를 드셨는데 색시가 서울 색시에요. 경기여고 나오고 서울사범대학 나왔습니다. 그런데 잘 아는 사람이 무위당 선생을 소개했어요. 뭐라고 소개를 했느냐. 원주에 아주 훌륭한 총각이 있는데 사립학교 이사장이다. 너는 사범학교 나왔으니까 그 학교 선생하고 남편은 이사장 하면 이게 짝으로 좋지 않겠느냐. 그래서 선을 봤어요. 둘이 만나서 얘기를 하다가 나와서 덕수궁 돌담 있죠. 이렇게 둘이 걸으면서 얘기를 했다는 거요. 그런데 아, 색시 되는 사람이 항상 무위당 오른쪽에만 서서 가는 거여. 무위당은 오른 쪽 귀가 좀 먹었다고 그러니까 잘 안 들린 거여. 조그맣게 들려, 왼쪽만. 그래서 “당신 내 왼쪽에 서서가면 안 되겠느냐?” 그랬다고 “왜, 그러시냐”고 그러니까 “내가 오른쪽 귀가 조금 안 들려서 그런다”고, 첫날 처음 만났는데 신랑감한테 내 오른쪽 귀가 잘 안 들린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 애기를 듣고 색시가 뿅 간 거여. 그건 “진실한 사람이다. 내가 평생 의지해도 될 사람이다.” 이거지. 그래 시집을 왔어요. 원주로 왔는데 그 댁이 봉산동이라고 약간 농촌 지대 있습니다. 원주 시내에서 떨어진 촌에 있어요. 그 동네 여자들이 서울서 대학 나온 색시가 왔다는데, 밥은 어떻게 해먹는지 봐야 되겠다고 저녁 밥 할 시간이 되면 동네 아줌마들이 부엌 바깥에서 장사진을 치고 보는 거여. 이렇게, 하하하.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거기까지는 좋은데 남편이 말이지 학교 이사장이면 뭐부터 해야 되겠어요. 애들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누라 취직을 시켜야 될 거 아녜요. 그런데 하다하다 못 시키고 감옥소에 갔어. 감옥살이 3년 동안 뒷바라지만 했단 말예요. 그리고 나왔어. 그랬더니 다시 학교에서 이사장을 시켰어. 그래 이사장으로 복직한 거여. 그리고 인자 복직했다고. 복직해서 며칠 지나는 동안에 무슨 사건이 났냐. 6·3 사태가 벌어졌어요. 서울에는 문리과 대학을 비롯해서 학생들이 대학에서 전부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데모를 했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원주만 고등학교 학생들이 데모를 했어. 그러니까 박정희가 뭐라고 했냐. 서울에서 대학생 나온 것만 해도 골이 아프고 감당하기가 힘든데 원주에서 고등학생들이 나오면 그 불꽃이 서울로 번질 거 아니냐. 서울서 고등학생들까지 들고 일어나면 정권유지 못한다. 이번에 아주 박살을 내자. 그래서 학생들을 몽땅 잡어다가 육십 몇 명을 유치장에 쳐 넣어 버렸잖아요. 그리고 그 배후자를 조사를 했어요. 암만 배후자를 조사를 해도 하룻밤 동안에 조사가 안 돼. 없다. 그랬더니 배후자 없는 일이 어딨냐. 서울서 정보기관에서 그래서 서류를 다 가져오라고, 그래 급송을 해가지고 서울서 조사를 했어요. 뚜껑 첫 페이지 열자마자 이게 배후자가 아니냐 말여. 반공법 위반으로 8년 언도 받은 놈이 여기 있는데 이게 배후가 아니고 어떤 놈이 배후자냐고 말이야. 즉시 조치하라고. 그래가지고 의자에도 별로 며칠 앉아 보지도 못하고… 하하하. 자진해서 내가 사표 내겠다고, 애들 다 내 달라고, 풀어 달라고 그 교섭을 해서 당신이 이사장 그만두고 애들은 주동자 세 사람만 빼놓고 다 석방하고 이렇게 수습을 했어요.
그렇게 이사장하다 쫒겨 났으니까 이제 다음 사람이 마누라 취직을 좀 시켜줘야 될 거 아녜요. 이게 안 되는 거여. 취직을 시키려면 경찰서 신원 조회를 하는데, 신원 조회 딱 했더니 경찰서에서 남편이 반공법 위반으로 8년 선고 받았는데 무슨 눔의 취직이냐 이거에요. 연좌제에 걸려가지고 안 되는 거여. 그 사정을 알고 그때 강원도 교육감 하던 사람이 있어요. 내가 취직 시켜준다. 자기 교육감이니까 강원도 교육 책임 아녜요. 큰소리 빵빵 쳤어. 그 소리에 부인이 하도 좋아서 시집 올 때 입고온 옷하고 구두, 서울서 유명한 구둣방에서 맞춘 구둔데 그걸 신고 인제 교육감한테 인사를 갔어. 그러니깐 교육감이 걱정 말라고, 춘천여고에다가 배치할 테니까. 그렇게 춘천여고에 선생으로 취직을 하게 됐어요. 그러고 나왔는데 세 시간도 안 돼서 연락이 왔어. 안 된다고. 그 교육감 큰소리 빵빵 쳤는데 세 시간도 못 갔어. 왜 안 되냐고 그러니까 안 되는 이유는 정식으로 말할 수 없고, 하여튼 안 된다고. 그래서 평생을 선생 노릇 못 했어요. 원주에 얘기가 있습니다. “서울사대 나오면 뭘 해? 선생도 못 하는 걸.” 하하하
모두 : 하하하.
김영주 : 그래 서울사대 나와도 원주서는 선생은 못 해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모두 : 하하하. (박수)
구법모 : 사모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선생님에 대해서. “참 인생을 바보처럼 사신 분이라고. 바보처럼 사셨어요. 바보.” 항상 그 말씀을 하셨어요. 그럼, 또 질문이 없으시면 이쯤에서 파할까요? 어떻게……
누군가 : 그 교육감이 누구예요?
김영주 : 아, 그거는 그분의 명예를 위해서 안 되겠습니다. 하하하.
구법모 : 오늘 더운 날인데 많이 와주셔서 고맙고요. 특히 선생님께서 쓰신 ‘無’자가 있습니다. 오늘의 화두는 ‘무’자로서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위당 선생은 내가 아닌 "눈물겨운 아픔을 선생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런 어른이 살다간 이 세상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기사 제목인 "목에 힘빼 그래야 살아"는 그가 어느 을축년 초가을에 남긴 글씨이다.

구법모 이사는?
연세대 영문과 졸업. 에스케이와 케이티 상무 등을 지냈으며, 이한열기념사업회, 장준하기념사업회,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등의 이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글은 월간 <퀘스천>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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