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귀한 항라머리검독수리의 불안한 만찬
머리깃 곱고 부드러워 '항라' 이름 붙은 공포의 전천후 사냥꾼
큰기러기 사체 뜯어 먹다가 검독수리 오자 미련 없이 떠나
» 논바닥에 앉은 항라머리검독수리. 서해안 지역을 통과하는 철새로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이다.
항라머리검독수리는 못 근처나 갈대밭,·하천·호수 부근의 활엽수림, 침엽수림이 혼재된 초원에 사는 매우 희귀한 통과 철새이다. 10월 중순께 우리나라를 찾아와 한 달 남짓 머물다 떠난다. 중부 이남을 통과하는 이 새는 최근 경기 화성 화옹호에서 관찰되었고 천수만, 해남, 순천만, 낙동강하구 등지에서도 관찰된다.
» 높은 하늘을 선회하는 항라머리검독수리.
지난 2년간 항라머리검독수리를 관찰하려 천수만을 수없이 다녔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발견해 추적해야만 접근할 수 있는, 관찰자로선 '목 아픈 새'이다.
11월 5일 마침내 천수만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작은 점으로 보이는 항라머리검독수리가 하늘에서 선회한다. 얼핏 보면 큰말똥가리를 항라머리검독수리로 착각할 수도 있다. 멀리서 날 때 크기와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에 구별이 쉽지 않다.
» 큰말똥가리.
» 하늘을 맴도는 큰말똥가리.
종일 하늘에서 선회하다가 사라지길 대여섯 번, 항라머리검독수리와 함께 큰말똥가리, 독수리도 보인다.그리고 모두가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목이 뻣뻣해 온다. 오후 3시30분께 새 두 마리가 나타나 하늘에서 맴돈다. 항라머리검독수리와 큰말똥가리다. 항라머리검독수리가 엄청난 속도로 급강하 해 쏜살같이 논으로 내리꽂는다.
» 먹이를 발견하고 급강하하는 항라머리검독수리.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예측한 장소를 염두에 두고 급히 달려갔다. 항라머리검독수리는 하늘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내려앉을 장소를 예측해 추적에 나서야 그나마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그 장소에 있으리라는 것은 보장할 수 없다. 하강한 뒤 땅 위를 아주 낮게 수평 비행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 참매가 다가서자 항라머리검독수리는 심기가 불편하다.
항라머리검독수리가 사라진 주변을 찾다 보니 논 가운데 앉아 있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같이 어려운 일이다.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급하게 셔터를 눌렀다. 그러나 항라머리검독수리가 갑자기 자리를 훌쩍 떴다.
기회를 놓쳤나. 그런데 옆 논으로 옮겨 앉더니 논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다행이다. 주위를 살펴본다.댕기머리물떼새가 주위에 있고 참매가 항라머리독수리에게 덤벼든다.
» 논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항라머리검독수리.
항라머리검독수리가 움직일 때마다 잘린 벼포기에 가린 먹이가 어른거린다. 먹이가 있는 곳을 찾은 것인데, 한 번에 그 자리에 내려앉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사체를 다른 맹금류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본능적 행동일 것이다.
130여m나 떨어진 데다 아지랑이도 심하게 피어올라 항라머리검독수리의 모습이 흐릿하다. 오후 4시가 지나서야 아지랑이가 사라져 모습과 행동을 비교적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됐다. 항라머리검독수리가 차지한 것은 큰기러기 사체였다.
» 댕기물떼새가 항라머리검독수리 주변을 서성인다.
» 항라머리검독수리에게 관심이 많은가 보다.
항라머리검독수리는 큰기러기 사체를 버겁게 옮겨 가며 먹기 좋게 털을 뽑아내는데 열중한다. 살점을 뜯어내 발라먹으면서도 주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매서운 눈빛으로 살핀다. 말똥가리보다 크고 검독수리보다는 작지만 완벽하게 균형 잡힌 미끈한 몸매다.
적당한 크기의 몸집은 어떠한 기상조건과 환경에서도 사냥 실력을 뽐낼 수 있게 한다. 전천후 사냥꾼이 틀림없다. 그래서 항라머리검독수리는 대부분의 야생동물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 항라머리검독수리는 힘들이지 않고 큰기러기 사체를 만나 포식할 기회를 얻었다.
» 이리저리 요리하듯이 깃털을 뽑는다.
» 열심히 깃털을 제거하는 항라머리검독수리.
» 빨리 먹고 싶지만 서두를수록 깃털이 부리에 자꾸만 달라붙는다.
먹이를 움켜잡고 다리로 힘차게 버티며 부리로 살점을 치켜세워 뜯어내는 모습이 야무지다. 자기보다 덩치가 큰 큰기러기를 다루는 게 힘겨워 보이지만 끈질기게 먹이를 손질하고 먹는다. 한참 먹이를 손실하고 살점 몇 점을 뜯어먹는데 기러기떼가 놀라 하늘을 뒤덮는다. 항라머리검독수리도 놀란 기색으로 하늘을 쳐다보더니 잠시 후 자리를 뜬다.
■ 항라머리검독수리의 연속 포식 장면
» 주위를 경계하는 항라머리검독수리.
» 자신보다 무거운 큰기러기가 힘겹지만 노련하게 다룬다.
» 먹잇감에 대한 집착력이 대단하다.
» 큰기러기의 다리를 제거하려는 항라머리검독수리.
» 자르기 쉬운 다리 관절 부분을 집중적으로 쪼아댄다.
» 다리 관절과 몸이 분리되었다.
» 항라머리검독수리는 살을 발라 먹으면 된다.
» 항라머리검독수리의 부리와 매서운 발톱이 사체를 갈기갈기 찢는다.
» 큰기러기 사체를 발로 힘껏 누르고 부리로 한껏 당기는 항라머리검독수리.
» 항라머리검독수리는 살점을 뜯어냈다.
하늘에 예기치 않은 경쟁자가 나타난 것을 알아채고 자리를 뜬 것이다. 먹이가 있는 곳이 발각 될 우려가 있어 미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리라. 먹이 경쟁이 심한 동물의 세계에서는 필수적인 전략이다. 행동이 활발하지 않아 나무에 앉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다.
항라머리검독수리는 서식 지역에 따라 먹이가 다양하지만 죽은 동물의 사체, 물고기도 즐겨 먹으며 나무가 우거진 숲이나 숲 주변 호수에서 비교적 느리게 나는 작은 새와 파충류, 쥐, 토끼 등 작은 동물을 사냥한다.
» 갑자기 오리떼가 놀라서 뜬다.
» 항라머리검독수리는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 강자, 검독수리가 나타났다.
‘항라’는 명주나 모시, 무명실로 짠 피륙으로 빛이 매우 곱고 보드랍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항라머리검독수리의 머리깃은 날개와 몸깃과 다르게 흑갈색으로 버들잎처럼 길고 곱고 부드럽게 보인다.
몸 전체는 흑갈색이지만 검게 보인다.
미성숙 항라머리검독수리는 날개 윗면과 어깨 깃에 흰색에 가까운 연한 갈색의 반점이 물방울 모양으로 산재해 어른새보다 멋있다. 참수리나 흰꼬리수리 등 다른 수리에 비해 토시를 한 듯 다리의 깃털이 발목 끝까지 감싸고 있다. 이런 특징은 검독수리, 초원수리, 흰죽지수리에서도 볼 수 있다.
» 즐거운 식사 시간이 깨졌다. 검독수리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 먹잇감을 포기하고 등을 돌린 항라머리검독수리.
» 아쉽지만 다음을 위해 자리를 뜬다.
항라머리검독수리 성조의 날개 길이는 158~182㎝, 체중은 1.5~2.5㎏이다. 허리의 흰색을 제외하면 몸 전체가 균일한 암갈색의 검은색이며, 허리와 꼬리 끝에 밝은 색의 줄이 있다.
번식은 주로 저지대에서 하나 가끔 해발 1000m 이상의 산림에서도 번식한다. 매년 같은 둥지를 고쳐서 사용한다. 4월 중순~6월 상순에 산림 내 교목 5~20m 높이에 둥지를 틀고 한 배에 1∼2개의 알을 낳아 암컷이 약 42일 동안 품는다.
» 태연하게 날아가는 항라머리검독수리. 두고 온 먹이는 내일 다시 찾을 것이다.
구북구 온대 지역. 유럽 동부, 핀란드 남부, 카스피해, 시베리아 남부, 몽골, 중국 동북지방, 아무르, 우수리, 중국 허베이 북부까지 분포·번식하고, 겨울에는 중국·이란·인도(북부)·인도네시아(북부)에서 겨울을 난다. 2012년 5월 31일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으며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적색 목록 ‘취약종’이다.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한겨레 환경생태 웹진 <물바람숲>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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