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에서 휴전협정을 맺은 미국의 아이젠하우어는 베트남전쟁을 획책했다.
© 정설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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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에 이은 케네디, 그는 베트남전쟁을 시작하였고 케네디의 암살로 뒤를 이은 존슨 대통령에 의하여 본격화 되었다.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결정은 자발적이며 케네디 시기다. © 정설교 화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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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이 약하고 공군력만 강한 미군
B52로 융단폭격을 하였지만 미국에게 전세는 불리하기만 했다.© 정설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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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으로 한국에 가장 많이 머무른 대통령은 존슨이다. 1966년 10월 31일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고 3일간 한국에 있었다. 미군부대를 방문하여 한국의 부대찌개와 비슷한 음식을 맛보고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새겨난 것이 부대찌개의 한 종류 ‘존슨탕’이다.
존슨대통령이 방문기간 중 큰 군사적충돌이 군사분계선에서 발생했다. 북한군이 미군을 급습하여 미군 6명이 사망하고 한국군 1명이 사망했다. 이때 남한에는 미국의 핵무기가 있었지만 북한은 미국과 전면전을 각오하고 저지른 사건이다.
베트남에서 수세에 밀리던 미국은 일단 이 사건에 대하여 조사에 착수했고 이에 북한은 1966년10월 26일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기 5일 전 한국군이 북한군의 연대 사령부를 공격하여 상당수의 북한군이 사망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이다. 이에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의 박정희 정권에 항의하고 북에는 재발을 방지를 약속했지만 1967년 12월 미국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제 2의 한국전쟁을 우려했다. 그런 와중에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북한은 미군함정을 나포했다는 긴급방송을 했고 이는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하기 정확히 한 달 전의 일이다.
1968 1월 21일 북한군 특수부대 요원들이 휴전선을 넘어와 청와대를 공격했다. 이어 1월 23일 푸에블로호가 납북되었고 70여명의 미군은 북한군에 생포되었다. 푸에블로호 사건 일주일 후에 베트남의 구정공세로 정신을 차릴 수 없던 미국에서 반전 시위가 본격화 되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어 정박 중이던 원산항을 폭격하는 방안을 내 놓았지만 베트남에서 수렁에 빠진 미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고 미국은 그저 덩치만 큰 종이호랑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현재 수소폭탄과 그 운반수단을 가지고 미국의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북한에게 미국이 제재를 가한다는 건 북의 반발을 살 뿐이며 북은 불시에 미국을 향하여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연속적인 타격을 안길 가능성이 높고 이를 예측하기는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핵무기가 없던 50~60년대의 북미대결의 역사를 참조하더라도 미국이 북한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고 할 것이다.
미국은 북에 대한 적개심을 풀고 북과 대화에 임하고 다시 조명록, 클린턴, 올브라이트 북미평화협정으로 가는 것이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의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은 불가능이 없는 나라라는 환상에서 패권주의에만 매달렸으니 한반도는 미국으로 인하여 평화와 번영을 꽃을 피울 수 없는 지역으로 미국은 우리민족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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