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개척단②] 목숨 걸고 개간한 땅, 도로 국유지로... "정부가 강도짓 한 것"
- ▲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논에서 수확이 한창이다. ⓒ 영화 <서산개척단>(가제) 갈무리
[지난 기사] 박정희가 창조한 생지옥 "거짓말 같지? 실화여"
여름의 한복판을 지나온 벼는 이제 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뭄에 시들하더니 흠씬 내린 비 한 번에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정영철(76)씨는 살아난 벼와 살 힘을 준 땅이 기특하다는 듯 벼 머리께를 톡톡 쳤다.
"그 황무지를 이 황금 벌판으로 만들었으니께..."
지난 9월 7일, 충난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평야에 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행기가 논 위를 높이 날았다. 소리만으로도 종적을 쫓을 수 있는 굉음이었다. 정씨의 말 소리가 묻혀 되물어야 했다.
"저게 비행장이여. 예전에는 더 심했어. 밤낮 없이 댕겨서 자다가 깜짝 놀라 깰 정도였어. 여기 사람들이 데모하니까 이륙장을 저 짝으로 옮겼지."
정씨 손끝이 닿은 곳은 서산전투비행장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비행장, 시도 때도 없이 공군기가 오가는 그 곳이 하필 서산에 있다. 나라는 항상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주는 것 없이 빼앗기만 하는, 힘없는 자신들의 일상을 함부로 침범하는.
제대로 된 '논' 만드는 데만 10년... 그 사이 땅을 국유화한 정부
1961년 박정희 정권 시절, 보건사회부가 주축이 돼 고아, 깡패, 넝마주이 등을 충남 서산 인지면 모월리에 강제로 끌고 와 '대한청소년 개척단'을 만들었다. '사회정화정책'의 일환으로 이곳에 갇힌 이들은 밤낮 없이 논둑을 쌓고 수로를 파고, 길을 내야 했다. 지옥같은 5년여의 세월이 지나고 1966년 9월 개척단은 공식 해체됐다. 이제까지 무임금으로 강제 노역 당한 이들에게 돌아온 보상 아닌 보상은 황무지 3000평이었다. 개척단원 정씨도 그렇게 땅을 '가분배' 받았다.
소금기가 하얗게 올라오는 땅에는 좀처럼 벼가 뿌리 내리지 못했다. 1968년, 3000평 땅을 가분배 받았지만 '논'이 아니었다. 땅의 높낮이도 일정치 않았다. 높은 쪽 흙을 퍼 낮은 쪽에 떨궜다. 장비가 없으니 제대로 된 논으로 만드는 데만 몇 년이 걸렸다. 당시 국가에서 농부들에게 물세를 받아갔는데, 시찰 나온 공무원이 "수확되는 게 없으니 물세를 받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10여년이 흘러서야 논 역할을 했다.
땅만 쳐다보고 살 수는 없었다. 먹고 살 길이 없어 서울 남산 1호 터널을 파는 막노동 일을 했다. 두어 달 일하고 돌아오면 3개월은 먹고 살았다. 자꾸 자리를 비워야 하니 개간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정씨에게 시집 온 남의 집 귀한 딸은 졸지에 하루살이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낚시꾼들에게 밥을 팔며 버텼다. 딸 셋에 아들 하나, 번 돈으로 아이들 먹을 거 대기에 바빴다.
"애들? 갸들이야 뻘 바닥에 뒹굴고 있지, 마누라랑 나는 일해야 하니까. 잘잘한 것들 데리고 나갔다가 들어갈 때 되면 코가 어디 달렸는지 눈이 어디 달렸는지 온데 뻘 투성이여. 짐승들 같았어. 여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애 키웠어."
- ▲ 서산 인지면 모월리 일대, 개척단원들이 개간한 땅의 모습이다. 왼쪽은 1968년 항공사진, 오른쪽은 1977년 항공사진이다. 10년 사이 땅이 반듯하게 정리됐음을 알 수 있다. ⓒ 영화 <서산개척단>(가제) 갈무리
아이들이 논에서 자라는 사이, 정부는 가분배했던 땅을 모두 국유지로 몰수했다. 1975년의 일이다. '내 땅'인 줄 알고 열심히 논을 만들고 있던 이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뜬소문으로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그들 손에는 '가분배증'이 있었다. 내 이름 석자가 또박또박 적힌, 충남 서산시 인지면장 명의의 증명서를 더 믿었다.
그러나 국가는 땅을 주지 않았다. '국유지'니 돈을 내고 사라고 했다. 1992년 국무회의에서 유상매각을 결정했고, 기획재정부는 '땅을 사라'고 촉구했다. 따를 수 없는 결정이었다. 1997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그러나 모두 패했다.
1968년 제정된 '자활지도사업에관한임시조치법'에 의하면, 대통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근로구호의 대상자에게 우선적으로 무상 분배할 수 있다'고 돼있다. 그러나 해당 법의 시행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1982년 12월 이 법은 폐지됐다. 법적 근거가 없어 무상분배가 불가능하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다. 법원은 정부 손을 들어줬다.
박정희 정권 시절 자행된 '강제 노동'은 하루 아침에 없는 일이 됐다. 가분배 받은 황무지를 옥답으로 만든 피와 땀은 인정받지 못했다.
모월리에 개척단 출신은 11명 남았다. 다수의 개척단원들은 이 곳을 떠나며 가분배증을 다른 이에게 팔았다. 그렇게 소유권을 넘겨받아 정부를 상대로 '토지소유권 이전등기 청구' 소송에 참여한 사람은 250명 남짓. 이 가운데 직접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은 정씨 포함 16명 정도다.
"내 땅을 20년 외상으로... 칼만 안 들었지, 정부가 강도짓 한겨"
2013년 주민들은 결국 땅을 사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평당 5만~5만 5000원을 내라고 했다. 강제노동에 대한 인건비, 보상비는 전혀 책정되지 않았다. 정씨는 1억 4000여만 원을 20년에 나눠 갚아야 한다.
"인간 대우도 못 받고 새파란 청춘 바쳐 만든 땅을 그냥 뺏어갔어. 칼만 안 들었지 정부가 강도 짓 한 거야.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너무 억울해서...한이 맺혀가지고. 이렇게 죽도록 만든 땅을..."
소싯적 부산을 누볐던 그는 땅 얘기가 나오자마자 무너져 내렸다. 땅을 뺏긴 생각만 하면 그는 눈물부터 나왔다. 투덕투덕 마디마다 흙이 박힌 두터운 손으로 그는 연신 얼굴을 훔쳤다.
1년에 내야 할 땅값과 이자만 800만 원, 정씨는 돈이 없다. 한 해 꼬박 농사 지어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300만~400만 원 남짓. 80kg짜리 쌀 한 가마니가 10만 원, 60~70가마니 수확해도 비료값, 기계값, 농약값을 제하고 나면 딱 반타작 남는다.
"그 돈 갚으려면 나보고 백 살 넘어서까지 농사 지으라는 거 아녀. 애들 모아놓고 이거 포기해야 쓰겠다 했더니 '아버지가 피땀 흘린 땅인데 값을 떠나서 아버지 명의로 사야 한다' 하더라고. 참 고맙지. 땅값은 애들이 나눠 내주고 있어. 내 땅을 20년 외상으로 산 거지."
- ▲ 정영철(76)씨 땅 옆으로 공사가 한창 중이다. 몇 년 전 정부는 정씨 논 끄트머리에 도로를 낸다며 300평을 가져갔다. ⓒ 이주연
현재 정씨 명의로 된 논은 2700평이다. 몇 년 전 정부는 정씨 논 끄트머리에 도로를 낸다며 300평을 가져갔다. 평당 1만 원을 쳐줬다. 국유지라 그렇다고 했다. 정씨 손에 꼴랑 300만 원이 쥐어졌다.
그의 땅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될 때 정씨는 이미 구순을 넘게 된다. 애초에 내 땅이 아닌 줄 알았다면, 진즉 징글징글한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그럼 이것보다는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정씨는 후회와 한이 밀려온다고 했다.
위암, 신장암, 전립선암... 스트레스에 몸을 덮친 암 "요즘도 잠이 안 와..."
결국 마음의 병이 몸을 덮쳤다. 1993년, 그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위암 3기, 병원에서는 "먹고 싶은 거나 잘 드세요"라고 했다. 사실상 사형선고였다. 항암제가 어찌나 독했는지 새 청바지를 다 쥐어뜯어 구멍을 내놓을 정도였다. 나았나 싶었을 때 신장암, 전립선암까지 겹쳤다. 병원 생활만 20년을 했다. 그런데도 살았다.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 거여. 마음을 편케 먹어야 하는데... 어차피 이래된 거 포기하고 살자 해도 이게 포기가 되냐고. 요즘도 잠이 안 와. 환장하겠어."
아직도 그는 참 미운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 대통령이나 다 웬수같지. 신세 조져 놓은 놈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됐을 땐 춤이라도 추고 싶었어. 우리 같은 놈들이야 저거들한테는 벌레지 눈에나 차겠어."
'꼴등 시민', 아니 '국민 대우도 못 받는 버러지' 정씨는 국가가 자신들을 그렇게 취급했다고 여긴다.
"평생 살면서 저거들이 나한테 잘못했지 내가 저거들한테 잘못한 건 하나 없어. 담배 사 피우고 세금도 억수로 냈어. 그런데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을 못 받았어. 이 땅 때문에. 내 편은 하나도 없어."
- ▲ 서산개척단 정영철씨 ⓒ 남소연
땅에 매인 세월, 56년. 투박한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일궜지만 정작 남은 것이 없다. 다 키워놓은 아이들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신세가 됐다. 마지막으로,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혼자라도 문재인 대통령 만나야지. 이 억울함 좀 풀어달라고. 이번 정권은 믿을 만하자녀. 내 어찌 하는가 보라고. 한이 맺힌 놈이니께. 그동안 우리 일한 인건비는 줘야지. 개척단 끌려간 거며 황금벌판으로 만들어 놓은 거 인건비라도. 안 그려?"
일흔 여섯,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 ▲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논에서 수확이 한창이다. ⓒ 영화 <서산개척단>(가제) 갈무리
[지난 기사] 박정희가 창조한 생지옥 "거짓말 같지? 실화여"
여름의 한복판을 지나온 벼는 이제 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뭄에 시들하더니 흠씬 내린 비 한 번에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정영철(76)씨는 살아난 벼와 살 힘을 준 땅이 기특하다는 듯 벼 머리께를 톡톡 쳤다.
"그 황무지를 이 황금 벌판으로 만들었으니께..."
지난 9월 7일, 충난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평야에 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행기가 논 위를 높이 날았다. 소리만으로도 종적을 쫓을 수 있는 굉음이었다. 정씨의 말 소리가 묻혀 되물어야 했다.
"저게 비행장이여. 예전에는 더 심했어. 밤낮 없이 댕겨서 자다가 깜짝 놀라 깰 정도였어. 여기 사람들이 데모하니까 이륙장을 저 짝으로 옮겼지."
정씨 손끝이 닿은 곳은 서산전투비행장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비행장, 시도 때도 없이 공군기가 오가는 그 곳이 하필 서산에 있다. 나라는 항상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주는 것 없이 빼앗기만 하는, 힘없는 자신들의 일상을 함부로 침범하는.
제대로 된 '논' 만드는 데만 10년... 그 사이 땅을 국유화한 정부
1961년 박정희 정권 시절, 보건사회부가 주축이 돼 고아, 깡패, 넝마주이 등을 충남 서산 인지면 모월리에 강제로 끌고 와 '대한청소년 개척단'을 만들었다. '사회정화정책'의 일환으로 이곳에 갇힌 이들은 밤낮 없이 논둑을 쌓고 수로를 파고, 길을 내야 했다. 지옥같은 5년여의 세월이 지나고 1966년 9월 개척단은 공식 해체됐다. 이제까지 무임금으로 강제 노역 당한 이들에게 돌아온 보상 아닌 보상은 황무지 3000평이었다. 개척단원 정씨도 그렇게 땅을 '가분배' 받았다.
소금기가 하얗게 올라오는 땅에는 좀처럼 벼가 뿌리 내리지 못했다. 1968년, 3000평 땅을 가분배 받았지만 '논'이 아니었다. 땅의 높낮이도 일정치 않았다. 높은 쪽 흙을 퍼 낮은 쪽에 떨궜다. 장비가 없으니 제대로 된 논으로 만드는 데만 몇 년이 걸렸다. 당시 국가에서 농부들에게 물세를 받아갔는데, 시찰 나온 공무원이 "수확되는 게 없으니 물세를 받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10여년이 흘러서야 논 역할을 했다.
땅만 쳐다보고 살 수는 없었다. 먹고 살 길이 없어 서울 남산 1호 터널을 파는 막노동 일을 했다. 두어 달 일하고 돌아오면 3개월은 먹고 살았다. 자꾸 자리를 비워야 하니 개간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정씨에게 시집 온 남의 집 귀한 딸은 졸지에 하루살이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낚시꾼들에게 밥을 팔며 버텼다. 딸 셋에 아들 하나, 번 돈으로 아이들 먹을 거 대기에 바빴다.
"애들? 갸들이야 뻘 바닥에 뒹굴고 있지, 마누라랑 나는 일해야 하니까. 잘잘한 것들 데리고 나갔다가 들어갈 때 되면 코가 어디 달렸는지 눈이 어디 달렸는지 온데 뻘 투성이여. 짐승들 같았어. 여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애 키웠어."
- ▲ 서산 인지면 모월리 일대, 개척단원들이 개간한 땅의 모습이다. 왼쪽은 1968년 항공사진, 오른쪽은 1977년 항공사진이다. 10년 사이 땅이 반듯하게 정리됐음을 알 수 있다. ⓒ 영화 <서산개척단>(가제) 갈무리
아이들이 논에서 자라는 사이, 정부는 가분배했던 땅을 모두 국유지로 몰수했다. 1975년의 일이다. '내 땅'인 줄 알고 열심히 논을 만들고 있던 이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뜬소문으로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그들 손에는 '가분배증'이 있었다. 내 이름 석자가 또박또박 적힌, 충남 서산시 인지면장 명의의 증명서를 더 믿었다.
그러나 국가는 땅을 주지 않았다. '국유지'니 돈을 내고 사라고 했다. 1992년 국무회의에서 유상매각을 결정했고, 기획재정부는 '땅을 사라'고 촉구했다. 따를 수 없는 결정이었다. 1997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그러나 모두 패했다.
1968년 제정된 '자활지도사업에관한임시조치법'에 의하면, 대통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근로구호의 대상자에게 우선적으로 무상 분배할 수 있다'고 돼있다. 그러나 해당 법의 시행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1982년 12월 이 법은 폐지됐다. 법적 근거가 없어 무상분배가 불가능하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다. 법원은 정부 손을 들어줬다.
박정희 정권 시절 자행된 '강제 노동'은 하루 아침에 없는 일이 됐다. 가분배 받은 황무지를 옥답으로 만든 피와 땀은 인정받지 못했다.
모월리에 개척단 출신은 11명 남았다. 다수의 개척단원들은 이 곳을 떠나며 가분배증을 다른 이에게 팔았다. 그렇게 소유권을 넘겨받아 정부를 상대로 '토지소유권 이전등기 청구' 소송에 참여한 사람은 250명 남짓. 이 가운데 직접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은 정씨 포함 16명 정도다.
"내 땅을 20년 외상으로... 칼만 안 들었지, 정부가 강도짓 한겨"
2013년 주민들은 결국 땅을 사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평당 5만~5만 5000원을 내라고 했다. 강제노동에 대한 인건비, 보상비는 전혀 책정되지 않았다. 정씨는 1억 4000여만 원을 20년에 나눠 갚아야 한다.
"인간 대우도 못 받고 새파란 청춘 바쳐 만든 땅을 그냥 뺏어갔어. 칼만 안 들었지 정부가 강도 짓 한 거야.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너무 억울해서...한이 맺혀가지고. 이렇게 죽도록 만든 땅을..."
소싯적 부산을 누볐던 그는 땅 얘기가 나오자마자 무너져 내렸다. 땅을 뺏긴 생각만 하면 그는 눈물부터 나왔다. 투덕투덕 마디마다 흙이 박힌 두터운 손으로 그는 연신 얼굴을 훔쳤다.
1년에 내야 할 땅값과 이자만 800만 원, 정씨는 돈이 없다. 한 해 꼬박 농사 지어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300만~400만 원 남짓. 80kg짜리 쌀 한 가마니가 10만 원, 60~70가마니 수확해도 비료값, 기계값, 농약값을 제하고 나면 딱 반타작 남는다.
"그 돈 갚으려면 나보고 백 살 넘어서까지 농사 지으라는 거 아녀. 애들 모아놓고 이거 포기해야 쓰겠다 했더니 '아버지가 피땀 흘린 땅인데 값을 떠나서 아버지 명의로 사야 한다' 하더라고. 참 고맙지. 땅값은 애들이 나눠 내주고 있어. 내 땅을 20년 외상으로 산 거지."
- ▲ 정영철(76)씨 땅 옆으로 공사가 한창 중이다. 몇 년 전 정부는 정씨 논 끄트머리에 도로를 낸다며 300평을 가져갔다. ⓒ 이주연
현재 정씨 명의로 된 논은 2700평이다. 몇 년 전 정부는 정씨 논 끄트머리에 도로를 낸다며 300평을 가져갔다. 평당 1만 원을 쳐줬다. 국유지라 그렇다고 했다. 정씨 손에 꼴랑 300만 원이 쥐어졌다.
그의 땅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될 때 정씨는 이미 구순을 넘게 된다. 애초에 내 땅이 아닌 줄 알았다면, 진즉 징글징글한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그럼 이것보다는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정씨는 후회와 한이 밀려온다고 했다.
위암, 신장암, 전립선암... 스트레스에 몸을 덮친 암 "요즘도 잠이 안 와..."
결국 마음의 병이 몸을 덮쳤다. 1993년, 그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위암 3기, 병원에서는 "먹고 싶은 거나 잘 드세요"라고 했다. 사실상 사형선고였다. 항암제가 어찌나 독했는지 새 청바지를 다 쥐어뜯어 구멍을 내놓을 정도였다. 나았나 싶었을 때 신장암, 전립선암까지 겹쳤다. 병원 생활만 20년을 했다. 그런데도 살았다.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 거여. 마음을 편케 먹어야 하는데... 어차피 이래된 거 포기하고 살자 해도 이게 포기가 되냐고. 요즘도 잠이 안 와. 환장하겠어."
아직도 그는 참 미운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 대통령이나 다 웬수같지. 신세 조져 놓은 놈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됐을 땐 춤이라도 추고 싶었어. 우리 같은 놈들이야 저거들한테는 벌레지 눈에나 차겠어."
'꼴등 시민', 아니 '국민 대우도 못 받는 버러지' 정씨는 국가가 자신들을 그렇게 취급했다고 여긴다.
"평생 살면서 저거들이 나한테 잘못했지 내가 저거들한테 잘못한 건 하나 없어. 담배 사 피우고 세금도 억수로 냈어. 그런데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을 못 받았어. 이 땅 때문에. 내 편은 하나도 없어."
- ▲ 서산개척단 정영철씨 ⓒ 남소연
땅에 매인 세월, 56년. 투박한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일궜지만 정작 남은 것이 없다. 다 키워놓은 아이들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신세가 됐다. 마지막으로,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혼자라도 문재인 대통령 만나야지. 이 억울함 좀 풀어달라고. 이번 정권은 믿을 만하자녀. 내 어찌 하는가 보라고. 한이 맺힌 놈이니께. 그동안 우리 일한 인건비는 줘야지. 개척단 끌려간 거며 황금벌판으로 만들어 놓은 거 인건비라도. 안 그려?"
일흔 여섯,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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