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31 07:12
최종 업데이트 23.10.31 07:12▲ 10·29 이태원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크러시> | |
ⓒ 파라마운트+ |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우리가 보지 못한 대한민국>의 저자이자 서울에 거주하는 영국 출신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라파엘 라시드는 지난 22일 자신의 엑스(옛 트위터)에 짧은 소감이라며 이렇게 남겼다. "세부 사항과 장면들은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다"는 단서와 함께.
지난 17일 미국에서 파라마운트+를 통해 공개된 다큐멘터리 <크러시>(Crush) 이야기다. 이미 많은 언론에 소개된 것처럼 <크러시>는 지난해 이태원 참사를 소재로 한 총 90분짜리 2부작 다큐멘터리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내레이션 없이 바디캠과 CCTV, 생존자의 휴대전화, 청문회와 기자회견 등 280개 1500시간 분량의 영상을 바탕으로 세밀하고 몰입감 넘치며, 끔찍한 디테일로 비극이 재생된다"고 <크러시>를 소개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다큐멘터리인데 한국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다. 그래서 라파엘 라시드는 "한국에서 볼 수 있어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라는 지적도 함께 남겼다. <크러시>를 서비스 중인 파라마운트+는 티빙에 입점하는 형태로 한국에도 진출했으나 티빙에서는 <크러시>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겨레>에 따르면 "<크러시> 제작사가 미국 외 다른 국가와 콘텐츠 제공을 논의한 바 없다"는 것이다.
외신들은 <크러시> 공개 소식을 전하면서 2017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루트 91 하베스트' 음악 축제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11분>(11 Minutes)으로 수상 경력이 있는 제작진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그 <11분>을 연출한 제프 짐벌리스트가 <크러시>에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크러시>를 둘러싼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제프 짐벌리스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공동 프로듀서인 조시 게이너에게 공을 넘겼다.
조시 게이너와 조율한 끝에 30일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할 수 있었다. 이태원 참사 1주기인 29일에 보도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현지와의 시차 등으로 인터뷰 마감이 늦어졌다. 다음은 인터뷰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이 남아"
▲ <크러시>를 제작한 조시 게이너 공동 총괄 프로듀서 | |
ⓒ 폴스빌리지미디어 |
- 외신에서는 다큐멘터리 <11분>을 만든 제작진이 이태원 참사 다큐멘터리 <크러시>를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크러시>를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크러시>의 총괄 프로듀서는 제프 짐벌리스트(올라이즈필름스), 수전 지린스키(씨잇나우스튜디오스), 테리 롱(씨잇나우스튜디오스), 그리고 스투 슈라이버그(센터드라이브미디어)다. 나(조시 게이너, 폴스빌리지미디어)는 공동 총괄 프로듀서로서 한국에서 팀을 이끌었다. 프로듀서는 얼래나 사드이며 한국에서의 프로듀서는 박세진씨다.
제프 짐벌리스트, 수전 지린스키, 테리 롱, 스투 슈라이버그와 얼래나 사드는 모두 <11분>을 제작한 팀의 일원이었고 나는 <크러시>를 위해 팀에 합류했다."
- 한국의 이태원에서 발생한 사건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씨잇나우스튜디오스 팀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1분>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중요한 이야기를 깊게 파고들어 시청자들에게 사건의 전개 과정을 몰입감 있게 보여줄 기회를 찾고 있었다. 이태원 참사는 미국에서도 보도되었지만 광범위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건이라는 점이 분명해 보였다."
- <크러시>를 제작하기 위해 한국에는 얼마 동안 체류했고 체류 기간 동안 한국에서 받은 인상은 무엇인가?
"지난 4월 말 한국에 입국해 한 달 가까이 머물며 팀원들과 함께 취재와 촬영을 진행했다. 또한 한국 방문에 앞서 몇 달 동안 조사와 취재를 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성공적으로 제작할 수 있게 도와준 한국의 훌륭한 팀과 협업할 수 있어 좋았다. 이태원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그날 밤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크러시>에는 내레이션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
"이 다큐멘터리의 목표는 그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시각을 통해 이태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 많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날 이태원 참사를 막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 참사에 대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이 남아 있다. 그날 밤 이태원에서 일어난 일로 159명이 사망했다. 핼러윈은 수년간 이태원에 많은 사람을 불러왔고, 10월 29일에도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159명 중 대다수가 사망하기 몇 시간 전부터 위험을 경고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신고 전화가 걸려 왔다.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더 많은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한국 정부는 '참사'가 아닌 '사고'라는 말을 썼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크러쉬> 공식 예고편을 보니 한 인터뷰이가 "이건 사고가 아니다. 사고라는 것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을 가리키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신은 이 사건을 어떻게 정의하나?
"질문 고맙다. 위의 답변을 참조 바란다."
"카메라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감사"
▲ 다큐멘터리 <크러시> | |
ⓒ 파라마운트+ |
- <가디언> 인터뷰에서는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돌이켜보면 카메라 안팎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나오는 단어가 트라우마였다"라고 했던데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목격하거나 경험한 가장 큰 트라우마는 무엇이었나?
"생존자와 목격자, 희생자 가족과 친구, 구조대원과 기자들, 뉴스에서 참사를 지켜본 시민 등 우리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인터뷰는 이태원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몇 달 후에 이뤄졌다. 인터뷰에 응한 많은 이들이 여전히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많은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왜 사랑하는 이들이 죽었는지 하는 기본적인 답을 얻기 위해 여전히 노력 중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참사로 인한 슬픔을 서울 거리에서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시청 앞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서 보낸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유가족들이 이태원 희생자 159명 모두의 이름을 불렀고 한 명씩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었다. 사망한 수많은 사람들 영정 앞에서였다. 유가족들이 느끼는 슬픔이 얼마나 클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날 밤 그곳에 있었던 것은 내 이력에서 가장 감동적인 경험 중 하나였다."
- <크러시>는 이미 공개되었는데 제작 과정이나 제작 후에 아쉬운 점이 남는 것은 없었나?
"다큐멘터리를 만들거나 어떤 이야기를 다룰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계획은 있지만, 이야기와 증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 된다. 그게 바로 과정의 일부다. 나는 이 팀의 일원이었음에 자랑스럽고, 우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자랑스럽고, 우리를 믿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다큐멘터리인데 한국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파라마운트+의 파트너사인 티빙에서 파라마운트+의 다른 프로그램은 볼 수 있지만 <크러시>는 제공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도 <크러시>를 볼 수 있을까?
"현재 파라마운트가 한국과 배급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공동 총괄 프로듀서로서 그런 협상이나 결정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공유할 정보가 없다."
- 한국에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영국 출신 라파엘 라시드 기자는 "한국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소감을 남겼다.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크러시>를 한국에서 보지 못하게 조치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 "질문은 고맙지만 답변은 위와 동일하다."
-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우리를 믿고 자신의 이야기와 경험을 들려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우리가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책임이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다른 상황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카메라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보여준 친절과 온정,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이하는 지금,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생각하며 목숨을 잃은 159명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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