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문해력과 언론
2023-07-14 06:00:00 ㅣ 2023-07-14 06:00:00
심심(甚深), 사흘, 금일, 고지식. 최근 언론에서 MZ세대의 문해력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심심하다, 4일, 금요일, 높은 지식 등으로 MZ세대가 이해하고 반응했다는 에피소드들이 미디어를 통해 자주 등장한다.
어느 웹툰 작가가 사인회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예약 시스템에 혼선이 발생해 ‘심심한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라고 사과문을 올리자 누리꾼들이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무슨 심심한 사과?’ ‘심심한 사과라니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라고 비난한 일이 화제가 됐다.
2020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거론한 ‘광복절 사흘 연휴’에 대해 일부 시민들이 ‘3일 연휴인데 왜 사흘인가’라는 글을 온라인에 올렸다. ‘사흘’의 ‘사’를 한자어 ‘사(四)’로 오해한 것이다. 어느 회사에서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부의(賻儀) 봉투를 하나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봉투에 ‘V’ 자를 그려 내밀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언론은 MZ세대가 대부분 고등교육까지 받았음에도 문해력만큼은 이전 세대보다 더 형편없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펴고 있다. 실제로 MZ세대의 문해력은 이전 세대보다 형편없을까?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2020년 18세 이상 1만 429명을 대상으로 세대별 문해력 수준을 4단계로 나누어 조사했다. 그 결과, 20대의 95.3%가 가장 높은 수준인 4 이상의 그룹에 들었다. 세대별 수준 4 이상 비율은 중년인 40, 50대가 각각 91.5%, 82.4%로 나타났고 노년층인 60, 70, 80대는 각각 64.4%, 41.1%, 22.9%로 현저히 낮았다. MZ세대 문해력 논란을 무색하게 만드는 통계 결과다.
일부 MZ세대가 짧은 주의력, 소셜 미디어의 영향 등으로 긴 문장이나 복잡한 글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해력 논란이 되는 단어 대부분은 한자에서 파생됐고 자주 사용하는 일상어와는 거리가 있다. 한자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MZ세대가 한자어로 구성된 어휘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현상은 낡은 언어가 새로운 언어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오히려 문해력 논란은 MZ세대가 아니라 그것을 지적하는 언론을 향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사흘’ 논란이 벌어지기 전부터 언론은 ‘숙청 후 4흘만에 속전속결 사형집행’, ‘개봉 4흘만에 누적 관객수 143만 돌파’, ‘애리조나 백맨 감독, 4흘만에 해임’ 등 ‘4흘’이란 정체불명의 단어를 기사 제목으로 버젓이 사용해 왔다. ‘무운을 빈다’의 ‘무운’을 ‘운이 없기를 빈다’라고 해석한 기자도 있다. 도대체 언론사에 게이트 키핑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드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단어의 실수나 무지는 언론 문해력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대부분의 언론이 사실과 발언의 맥락을 왜곡하는 고질병은 우리 사회 전체의 소통문화와 문해력을 병들게 하고 있다. 언론의 맥락 왜곡은 정치, 사회 등 정파적, 진영적 이해와 관련 있는 분야에서 특히 극심하고, 다분히 의도적이다.
아침마다 포탈사이트 뉴스창에서 무논리, 무가치, 침소봉대, 맥락이탈, 팩트왜곡의 기사를 읽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 문해력이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거리 곳곳에 걸린 정당의 현수막에서 대한민국 문해력의 처참한 현실은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백승권 비즈라이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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