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
화물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한 7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내륙컨테이너기지(ICD) 제1터미널 인근에 집결한 1000여 명의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구호를 외쳤다.
이들의 구호처럼 화물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화물노동의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다. 국민 생활과 경제에 밀접히 연결된 화물노동의 중요성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화물노동자들의 파업은 물류를 멈추고 있다.
정부가 ‘물류 대란’ 운운하며 파업하는 노동자를 탓하고 ‘엄정 대응’으로 위축시키려 해도, 보수언론이 총파업 효과를 축소하고 파업 지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화물노동자들의 파업 기세는 쉬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물류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화물노동의 존재감
화물노동자들이 파업을 선언하자 유통업계가 긴장했다. ‘소주’ 때문이다. 편의점은 파업 장기화에 대비해 주류 발주 조정에 들어갔고 음식점은 물량 확보에 힘 쏟는 상황이다. 주류공장에서 출고량이 줄었기 때문.
편의점주 입장에선 소주 발주가 멈추기라도 하면 주류 매출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안주거리 등 다른 판매품 매출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주류 냉장고가 비는데 소주를 마실 수 있을까? 민중들의 삶의 애환을 달래 왔던 소주 한잔도 화물노동이 없으면 소비자에게 가닿을 수 없다.
음식점도 마찬가지. 냉장고에 소주가 동나면 가까운 가게나 편의점을 찾아 술을 사오기도 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됐다. 국내 소주 1위 기업인 하이트진로와 맥주 2위인 오비맥주 운송에 차질이 빚어졌으니 화물노동의 존재감은 두말할 것이 없다.
주요 시멘트 업체들에게도 이들의 존재감은 마찬가지다. 장마철을 앞두고 건설현장이 바삐 돌아가는 성수기에 물류를 멈췄다. 시멘트 기업들은 국내 유통 물량 중 30%가량을 벌크시멘트트레일러(BCT) 차량을 통해 공급하고 있다. BCT차량은 전국에 2700대 가량이 운행 중인데 이 중 1000여 대가 이번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 2일 차인 8일부터는 자동차 업계도 영향을 받았다. 생산에 필요한 부품이 공급되지 않으면서 생산라인이 일부 멈추기 시작했다. 현대차 그룹의 물류회사인 현대 글로비스와 계약한 운송업체는 모두 19개 회사로 여기에 소속된 화물노동자 약 70%가 파업에 참여했다.
철강을 실어 나르는 화물차의 95%도 화물연대 노동자들이다. 파업 이틀간 평소 나가던 철강 물량의 절반도 운송되지 않았다.
‘산업의 핏줄’이라고 하는 물류가 멈추자 자동차, 철강, 건설업을 운영하는 굴지의 대기업들도 맥을 못 출 상황이다.
이처럼 국민의 일상과도 연관돼 있으며, 산업과 유통의 큰 축을 담당해온 화물노동자들.
이들은 화물차의 적은 운임으로는 기름값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더 많이 운송하려다 보니 과적에 과속, 졸음운전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바꿔 말하면 이렇게 산업이 유지될 수 있던 이유는 그동안 화물노동자들이 목숨 걸고 운전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업 원인 제공, 누가 했나
화물노동자들은 국내외에서 치솟고 있는 유가 때문에 파업을 선언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화물 운송차량에 주로 쓰이는 경유의 전국 평균 가격은 지난 3일 기준 리터당 2013원으로 1년 전(1300원대)보다 50% 이상 올랐다.
2020년, 유가에 연동해 운송료를 조정하는 ‘안전운임제’가 도입돼 최소운임이라도 받으며 근근이 버텨왔지만 3년 일몰제로 도입된 안전운임제는 올해 말 자동 종료된다. 화물노동자들은 안전운임제의 유지·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물류대란을 막고 파업의 원인을 없애야 할 정부와 정치권은 나 몰라라 하는 중이다. 집권당인 국민의힘은 안전운임제와 관련한 역사가 있다.
2003년 처음 물류를 멈춘 화물노동자들. 그때나 지금이나 요구사항은 ‘안전운임 보장’이다. 정부는 2008년부터 안전운임제 도입을 검토했지만 기업들이 ‘물류비 증가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반대해 10년 동안 표류했다. 그러다 문재인 정부가 다시 100대 국정과제에 안전운임제 도입을 약속했다. 그러나 당시 야당이던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이 이를 가로막았다.
당시 국회 회의록을 보면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시장경제 체제를 흩트리는 사회주의다”라며 반대했다. 이들의 반대로 인해 안전운임제는 결국 컨테이너와 시멘트운반 두 차종에 한해, 그리고 3년 동안만 시행하기로 했다. 차종이 제한되며 전체 42만 화물노동자 중 약 2만 6천여 명만 안전운임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국토교통부가 달라졌다
문재인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로 정권이 바뀌자 안전운임제에 대한 국토교통부의 입장도 선회했다.
국토부는 2020년 1월 안전운임제 첫 시행 당시 화주(기업)·차주(운송노동자)를 대상으로 대규모 설명회를 열어 제도 안착을 당부했고, 시행 2년 차인 지난해 5월엔 안전운임제가 현장에서 잘 지켜지는지 현장점검과 지도에도 나섰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국토부는 안전운임제와 관련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입이 있어도 말 못한다(국토교통부 어명소 2차관)”고 했다. 물류업계는 기업 관련 규제 완화에 적극적인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국토부가 대기업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해석 중이다. 화주의 대부분은 대기업들로, 이들은 “안전운임제 도입으로 비용이 늘었다”며 제도의 연장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자동차, 철강 업계는 화물노동자 총파업으로 물류에 차질을 빚어졌다고 하소연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들 대기업의 엄청난 영업이익은 화물노동자들의 노동이 더해졌기에 가능했다. 현대차는 지난해 4조 2843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해 전년 대비 178.9% 증가율을 보였다. 올해 1분기 58개 철강 비철기업 매출은 29조 3394억 원으로 전년 대비 42.1% 증가했고,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2조 9174억 원으로 44.5%(8979억 원) 급증했다.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6단체는 최근 공동성명을 통해 “수출물품의 운송 차질은 납기지연 등 해외 바이어들에 대한 계약위반으로 기업들의 대외 신뢰도를 떨어뜨린다”며 파업 철회를 요구하기도 했다.
정부가 수출기업들의 영업이익과 대외 신뢰도 차질을 우려하며 이들 눈치를 보고 있을 때, 기업 이익에 일조한 화물노동자들의 생존권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셈이다.
안전운임제 차질 없다?… 국토부의 책임 회피
3년 일몰제의 원인이 국민의힘 반대 때문이며, 일몰제로 도입된 안전운임제가 파업의 배경이 됐음에도 정권을 손에 쥐고 나선 아무런 대책이 없다.
안전운임제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한 국토부는 “일단 대화부터 하자”는 입장이다. “태스크포스(TF)에서 충분히 논의하자는 것”인데, 노조(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는 “실체없는 태스크포스”라고 반발하고 있다. “국토부에서 노조에 안전운임 TF를 공식적으로 제안한 바가 없으며, TF를 만들어 안전운임제도에 대한 정부와 주무부처의 입장 개진은 최소화하고 이해주체들 간의 의견 조율자로만 역할 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제도 도입 당시 ‘일몰 1년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 안전운임제 시행결과를 분석하여 연장 필요성 또는 제도 보완사항 등을 국회에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보고 의무가 있는 정부는 제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며 국회 논의를 지연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지난해 3월 국회 상임위원회에 상정된 더불어민주당 조오섭 의원이 대표발의한 ‘화물자동차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 법안’은 아직도 계류 중이다.
안전운임은 매년 국토교통부 안전운임위원회에서 다음 해 운임을 결정하면 이를 국토교통부 장관이 그해 10월 31일까지 고시하게 돼 있다. 고시에 앞서 안전운임을 논의하는 위원회가 열려야 한다. 그러나 어명소 국토부 2차관은 “10월~11월까지만 개정이 이루어지면 차질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조는 “매년 위원회에서 다양한 원가비용 책정과 이해주체 간 입장을 조율하느라 항상 시간을 넘겨서 고시되었다”면서 “적어도 7월엔 위원회가 열려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없다는) 어 차관의 태평한 소리는 ‘제도 무력화’를 위한 예정된 수순”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9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단 등이 주최하는 ‘화물노동자 생존권 보호를 위한 긴급간담회’에 국토부 장관의 참석을 제안했지만 국토부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꺾이지 않는 파업 동력… 국민 지지 이어져
파업의 원인을 제거해야 할 정부, 유가를 잡아야 할 정부는 반대로 파업을 잡는다고 난리다. 총파업 의지를 꺾으려는 정부 기조에 따라 경찰은 평화적 파업 투쟁을 벌이는 조합원들을 무차별 연행해 파업 이틀간 총 31명이 연행됐다. 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은 향후 윤석열 정부 5년간 노동정책의 시금석을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정부의 의지와는 달리 화물노동자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파업의 파급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화물노동자 총파업은 전국 16개 지역 50여 개 거점에서 진행 중이다. 철강(포항·광양·당진·창원 등), 시멘트(단양·제천·동해·영월·목포·인천·부천·여주·평택 등), 석유화학(울산·대산·여수 등), 자동차(울산·경주·아산·화성·광명·광주 등), 컨테이너(부산·인천·평택·의왕ICD·울산·광양·여수·군산 등) 등 주요 품목에서 물류가 뚜렷하게 정체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합원은 물론이고, 화주와 운송사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운송에 나섰던 비조합원 화물노동자는 화물연대의 설득에 자발적인 회차를 하며 비조합원 참여율도 높아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80~90% 이상 물동량이 줄어든 상태라고 화물연대본부는 전했다.
이들의 총파업을 지지하는 선언도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생산이 멈추기 시작한 자동차 공장, 현대차, 기아차, 한국지엠 노동자들도 “안전운임제 유지·확대”를 촉구하며 파업지지 성명을 냈고, 노동·사회·종교단체들도 연일 대정부 대화를 촉구하고 있다. 14일 저녁엔 파업투쟁에 연대하는 시민사회 촛불문화제가 서울 도심에서 열릴 예정이다.
국가기간산업을 지키고자 했던 철도노동자들의 파업 때와 같이, 과로사를 막기 위한 택배노동자들의 파업 때와 같이, 화물노동자들의 파업도 국민의 지지와 연대가 모이기 시작했다. 화물노동자의 생존권과 도로 위 국민 안전을 지키고, 산업의 핏줄에 동맥경화를 막기 위한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