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2-07-01 05:00수정 :2022-07-01 07:09
SNS·채팅앱 어디든 표적
가정밖·학교밖 아동·청소년만
성착취자 타깃 되는 건 옛말
스마트폰만 열면 위험 노출
3만3437건. 지난해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삭제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건수다. 피해자나 수사기관이 요청해 지운 것을 빼고 센터가 발견해 선제로 지운 것만 집계한 수치다. 하루 평균 91.6건이다. 아동·청소년이 성착취자들의 ‘덫’에 걸려드는 것은 그들이 조심스럽지 못해서가 아니다. 아이들의 심리를 교묘히 파고드는 범죄 수법이 나날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동·청소년은 디지털 기기와 온라인 공간에 친숙하다. 특히, 디지털 성착취의 주요 경로인 스마트폰은 한국의 아동·청소년에게 또 하나의 신체 기관이나 다름없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지난 3월 발표한 ‘청소년 미디어 이용 실태조사’를 보면, 10대 청소년의 98%가 스마트폰을 쓰고, 이 가운데 61.5%는 스마트폰을 하루에 3시간 이상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권주리 십대여성인권센터 사무국장은 “과거에는 주로 가정밖·학교밖 아동과 청소년들이 성착취자의 타깃이 되었다면, 이제는 아동·청소년 누구나 성착취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이 됐다”고 말했다.
문제는 아이들을 성착취로 끌어들이는 경로와 범죄 수법을 한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카카오톡, 에스엔에스(SNS), 랜덤채팅앱, 온라인 게임, 중고거래 사이트…. 성착취자들은 청소년이 접근할 수 있는 플랫폼이면 어디든 덫을 놓는다. <한겨레>는 2021년 한 해 십대여성인권센터(센터)에 들어온 실제 상담 사례를 재구성해, 성착취자들이 어떤 경로와 수법으로 아동·청소년을 성착취로 끌어들이는지 들여다봤다.
청소년 ㄱ에게는 어떤 고민이든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ㄴ이 생겼다. ‘실친’(현실 친구)이 아니다. ‘08년생 모여라’라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만난 친구다. ㄴ은 처음부터 ㄱ을 각별히 챙겼다. 서른명 가까이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이었는데도 ㄱ이 메시지를 남기면 바로 대답하고 공감해줬다. 몰티즈를 키운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즐겨 하는 온라인 게임도 같았다. 사이가 가까워지자 ㄴ은 ㄱ에게 1 대 1 개인 채팅방으로 옮겨 가자고 했다. 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사실 나 우울증 있어. 극단적 시도도 한 적 있고….” 서로 고민을 털어놓던 중 ㄴ이 말했다. ㄱ은 최선을 다해 위로했다. ㄱ도 실친에게 말하지 못한 고민이나 비밀들을 털어놨다. ㄴ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로 느껴졌다. ㄴ이 돌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ㄴ은 처음에는 셀카 사진을 주고받자고 했다. 다음은 입술을 강조한 사진을, 그다음은 교복 입은 사진, 그다음은 짧은 치마를 입은 사진을 달라고 했다.
그의 요구가 점점 과해지자, ㄱ은 거절 의사를 밝혔다. 다정하기만 하던 ㄴ은 이렇게 말했다. “사진 안 보내주면 죽어버릴 거야. 내가 너 때문에 죽어도 괜찮겠어?” 극단적 시도를 할 만큼 우울증이 깊다고 했던 ㄴ의 말은 ㄱ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ㄴ처럼 또래인 척 접근해 친밀감을 쌓는 수법은 흔하고, 보편적이다. 처음 만난 플랫폼, 친밀감을 쌓는 방식(그루밍), 요구·협박 내용 등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피해자가 에스엔에스(SNS)에 올려둔 게시물로 관심사를 모두 파악한 뒤 접근하는 사례, 별명만 쓰는 랜덤채팅 등에서 성적 호기심을 갖게 하여 “어차피 익명이니까 괜찮다”라는 말로 조금씩 탈의를 유도하는 사례 등이 센터에 여럿 보고됐다. 사귀는 사이로 착각하게 만든 다음 신체 사진을 공유하게 하거나, “같이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며 성매매로 유인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플랫폼이 실제 이름을 쓰지 않고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은 성착취자에게 큰 이점이다. ㄱ도 또래들이 모인 오픈채팅방에서 ㄴ을 만났기에 그가 또래 친구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ㄴ은 성인 남성이었고, ㄱ에게 자신의 사진이라며 보낸 사진도 도용한 것이었다. 반면 피해자가 ㄴ에게 알려준 학교, 사는 동네, 친구 이름 등은 모두 사실이었다. 이 정보들은 ㄱ을 옥죄는 협박 도구가 됐다.
사칭. 이름, 직업, 나이 등을 거짓으로 속여 이르는 말이다. 직업 등을 사칭한 성착취자들은 단숨에 호기심을 가질 소재를 아동·청소년 앞에 놓는다. “우리 브랜드 옷 잘 어울릴 것 같아 연락드려요. 협찬 관심 있으면 답장 주세요!”
ㄷ은 인스타그램에서 한 운동복 업체로부터 레깅스를 협찬해주겠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유명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한번쯤 들어본 브랜드였다. 당장 답장을 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메시지를 보낸 계정을 클릭했다. 소개 글부터 브랜드 누리집 주소, 대표번호, 지난 게시물까지 꼼꼼히 체크했다. 해당 브랜드 계정이 확실해 보였다. 의심을 거둔 ㄷ은 협찬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특정 계정에 해당 브랜드 레깅스를 입고 찍은 사진 15장을 올려주면 된다는 답을 받았다. 사진을 올리면, 사례비로 80만원을 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ㄷ은 상대방 요구에 레깅스를 받을 집 주소와 이름을 알려줬다.
당황스러운 요구를 받은 건 그다음부터였다. 상대방은 “레깅스가 어울리려면 핏이 중요하다”며 전신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다. 이어 달라붙는 옷을 입은 사진, 톱브라만 입은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요구대로 사진을 몇 차례 보낸 뒤 ㄷ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조금씩 탈의를 유도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하니 상대는 “네가 야한 사진이나 찍어보내는 애라고 알려도 상관없냐”고 했다.
ㄷ은 그의 협박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ㄷ의 집 주소 등 개인정보를 충분히 수집한 뒤였기 때문이다. 그 브랜드 계정은 심지어 ㄷ의 학교 친구들 계정도 팔로한 상태였다. 학교 친구들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었다. 상대의 계정에 다시 들어가 보니 운동복 브랜드의 정보와 사진은 모두 지워져 있었다. 그 계정은 ㄷ을 유인하기 위해 만든 가짜 계정이었다.
사칭을 하며 접근한 성착취자들은 아동·청소년이 선망하는 게 무엇인지를 정확히 간파해 파고든다. 또 다른 피해자 ㄹ은 에스엔에스에서 한 중소연예기획사로부터 “아이돌을 해보겠냐”는 메시지를 받았다. 자신을 캐스팅 매니저라고 소개한 상대는 오디션 보기 전 단계라며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마른 체형인지 확인할 테니 사진을 보내라”는 메시지였다. 성착취의 시작이었다. 아이들이 혹할 만한 상품을 미끼로 접근하는 사례도 있다. 이벤트에 당첨됐다며 접근한 뒤 “얼굴이 안 보이게 가슴 사진 하나만 보내달라”며 조건을 내거는 식이다. ‘얼굴이 안 나오니까 괜찮지 않을까?’라고 아이들은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접근 경로가 에스엔에스이기 때문에 성착취자는 피해자의 얼굴이나 개인정보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을 수 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