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2-06-13 05:00수정 :2022-06-13 08:37
⑤ 어느 방역 공무원의 죽음
인천 부평구 보건소 상황실
고 천민우 주무관을 기리며
2021년 9월15일. 천민우(사망 당시 35살) 인천 부평구 보건소 주무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는 없었다. 출근 복장을 한 채였다. 발견 당시 ‘온기가 남아 있었다’고 천 주무관의 동료가 어머니 김남순(60)씨한테 전해 주었다. 공무원으로 임용된 지 1년9개월, 마지막으로 대전에 사는 엄마 집을 찾은 지 1년4개월 만이다. “마지막으로 본 건 재작년 5월. 보고 싶어서 ‘내가 갈게’ 해봐도, ‘너무 바빠서, 와도 못 본다’고 했어요. 나 혼자 몰래, 숨어서라도 보고 올 걸 그랬어요.”
김남순씨는 아들 얼굴이 보고 싶을 때마다 아들 친구가 보내준 동영상을 본다. 김남순씨의 휴대전화 화면 속에서 천 주무관이 해사한 얼굴로 입김을 뿜는다. “여러분들 응원으로 합격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축구 동호회) 회원을 위한 공무원이 되겠습니다.” 2020년 1월13일 천 주무관은 인천 부평구 보건기술직 공무원으로 임용됐다.
임용 1주일 뒤인 2020년 1월20일 한국에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다. 한 달 뒤인 2월18일 대구 집단감염으로 코로나19의 위력을 실감했다. 석 달쯤 뒤인 5월3일 정부는 ‘케이(K)-방역의 경험을 전 세계와 공유합니다’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대규모 진단검사와 확진자 동선 추적, 격리·치료가 빚은 성공을 자축했다. 그런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이들은 언급되지 않았다. 2020년 3월 경북 성주군 공무원이, 4월 경남 합천군 공무원이 방역 과정에서 과로사했다. 2021년 5월 부산 동구 보건소에서, 6월에는 전남 담양군에서 방역 공무원이 세상을 떠났다. 자축과 죽음 사이, 천 주무관도 부평구 보건소 코로나19 상황실에서 방역 업무를 이어갔다. 대유행마다 곱절로 커지는 감염병의 위세에 천 주무관도 앞서 죽어간 동료 공무원들처럼 온몸으로 사투를 벌였다.
고 천민우 주무관. 그의 삶과 죽음을 기린다. 인천 부평구와 공무원노동조합 부평지부가 지난 4월 발표한 ‘치유와 회복을 위한 고 천민우 주무관 과로사 원인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보고서’(과로사 보고서)를 바탕 삼았다. <한겨레>가 5월23~28일 어머니와 동료들, 과로사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전문가를 만나, 아들이고 동료였던, 무엇보다 ‘여러분을 위한 공무원’이었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천 주무관이 공무원 생활 1년9개월을 보낸 인천 부평구 보건소 상황실은 본래 지역 주민 건강 프로그램을 하던 다목적실이었다. 동료들은 “책상을 그때그때 길게 이어 붙였고 무대로 쓰던 곳에 방역 물품을 쌓았다. 전선이 엉키고 먼지가 붙어 정신없었다”고 그곳을 묘사했다. ‘임시공간’의 느낌이 물씬하다. 전국 256곳 지역 보건소에 설치한 상황실은 선별 검사, 역학 조사, 동선 확인과 접촉자 분류, 자가 격리 통보와 관리·지원, 확진자 이송 등을 맡았다. 중환자 치료를 빼고 감염병 공포에 질린 시민과 마주하는 거의 모든 일이 이런 상황실을 기지 삼아 이뤄졌다.
다만 상황실이 어떤 조직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코로나19 발생과 동시에 각 지방자치단체는 재난안전대책본부를 꾸렸다. 그 아래 방역 실무를 맡기 위해 주로 보건소에 마련된 공간이 뭉뚱그려 상황실로 불렸다. 신준호 전남대 교수(예방의학)는 “조직의 형태를 정한 매뉴얼은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사람도 정신없이 채웠다. 천 주무관 사망 당시 부평구 보건소 상황실에선 38명이 일했다. 천 주무관 과로사 원인 조사에 참여한 김민 노무사(평등노동법률사무소)는 “기피 부서였던 탓에 고인 사망 당시 80%가 발령을 거부하거나 휴직할 수 없는 3년차 이하 신규 직원들로 채워졌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직전 동사무소 방문 진료나 치매안심센터 사업을 위해 갓 뽑힌 젊은 보건직 공무원들이 주로 상황실 업무에 내몰렸다. 2015년 메르스 이후 보건소에 감염병 담당 부서가 생겼지만, 인력은 한두명에 불과했다. 그마저 없는 곳도 있었다.
천 주무관도 본래 보건지소에서 물리치료를 전담하기 위해 뽑힌 공무원이다. 병원 물리치료사로 10년 넘게 일한 경력이 있다. 젊은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무릎이 아픈 엄마를 고쳐 주겠다고 택한 일이다. 엄마와 천 주무관 둘뿐인 식구, 아들은 아픈 다리로 봉제 공장으로 공사장으로 일하러 가는 엄마를 안타까워했다. “맨날 나더러 일하지 말라고 잔소리하고 아웅다웅해도, 사고 한번 안 치고 혼자 잘 자라준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고 김남순씨는 말했다.
공무원이 되고 제 업무인 물리치료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다. 엄마 무릎을 돌볼 시간 또한 없었다. 자신 대신 보낸 물리치료 기기만 대전 집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그때 그의 하루는 온전히 정신없는 코로나19 상황실에 갇혀 있었다.
천 주무관의 초과근무 시간은 코로나19 3차 대유행이 번진 2020년 12월 127시간, 2021년 1월 116시간에 이른다. 잠시 50~70시간으로 줄어드는 듯하더니, 7월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매달 110시간 이상(9월의 경우 14일까지 58시간) 초과근무를 했다. 대개 아침 9시 출근해 밤 10~11시 퇴근했다. 거의 주 6일 근무했고, 휴일에도 8개 카카오톡 방에서 쏟아지는 메시지를 보고, 때론 응했다.
동료 ㄱ씨는 “모두가 천 주무관 일이 체력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천 주무관은 동선팀 소속이었다. 확진자가 머문 자리를 되짚으며 감염 가능성이 있는 접촉자들을 찾아다녔다. 시설(건물) 관리자들에게 폐회로티브이(CCTV) 영상을 받아 역학조사관에게 보냈다. 역학조사관이 자가 격리자, 능동 감시자, 단순 검사자를 분류해 주면 거기 맞춰 다시 시민에게 통보했다. 여기 더해 코호트(동일집단 격리) 시설에 물품을 지원하는 업무까지 떠맡았다. 당장 생계를 멈추거나 불편에 처할, 분노한 시민을 만나고 설득하는 일이었다.
천 주무관 사망 당시 동선팀에는 세 사람뿐. 천 주무관은 그 가운데 재난 앞에 무한정 초과근무가 가능한 유일한 정규 공무원이었다. 보건소 인력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정규 공무원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 정도씩 섞여 있었다. 지난해 11월 발표된 ‘포스트 코로나 보건소 기능 및 조직 재정립 방안 연구’(장숙랑 등)는 ‘비정규직이 많은 (보건소) 인력구조로 주말 근무 등을 담당해야 하는 정규직 직원들의 업무 부담이 높았다’고 짚었다.
사망 전날인 9월14일도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날 천 주무관은 아침 9시 출근해 밤 11시2분 퇴근했다. 한 확진자가 일행을 제대로 밝히지 않아 밀접 접촉자 2명을 뒤늦게 파악했다. 그들에게 자가 격리를 통보하자, “왜 이제야 통보하느냐”며 30분 동안 욕설 섞인 항의가 쏟아졌다. 저녁에는 코호트 관리를 하고 있던 복지시설에서 추가 확진자가 확인됐다. 이 사실을 전하자 복지시설 관리자는 격리 기간이 길어진다는 사실에 격분해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끔찍한 분노의 말을 받아내고 바로 털어낼 방법을 누구도 천 주무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 나이 먹고 이런 취급을 받는 나 자신이 초라하다.” 천 주무관은 세수하고 자리로 돌아와 동료에게 읊조렸다. 그런 날들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짧은 공무원 생활 내내 천민우 주무관은 ‘덕분에 든든한’ 혹은 ‘통제하여 불쾌한’ 케이방역의 두 얼굴로만 살았다. 애초 4개월 정도면 순환근무를 통해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얼굴이다. 몇 차례 동료들과 용기를 내 순환근무를 요구해 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21년 하반기 확진자가 급증하자 상황실을 벗어날 길은 더 아득해졌다. “미친 사람처럼 울고불고해야 겨우 나갈 수 있는 곳이 상황실”(김민 노무사)이라고, 그때 방역 공무원들은 서로 말하곤 했다. “꼼꼼한, 책임감 강한, 일 잘하는, 싫은 내색을 잘 못하는, 배려심 많은”(동료 ㄴ) 천 주무관 같은 사람에게 한층 가혹했다. 그의 역할을 대체할 인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보건소를 비롯한 공공보건의료에 오랫동안 인색했던 예산 탓에 숙련된 보건 인력은 한정적이다. 2021년 기준 전국 지자체의 보건·의료 예산 비중은 1.67%에 불과했다. 김민 노무사는 “공공보건에 있어 국가의 크기를 한껏 줄여놓은 채 코로나19를 맞았고, 큰 국가가 필요한 상황에서 정해진 특정한 사람이 그 부담을 짊어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 천민우. 감염병의 크기만큼 체계적으로 커지지 못한 국가를 대신해 체력·시간·감정을 갈아 넣다가 떠났다. 남은 동료들은 그의 자리에 영정 사진을 두고 울면서 일했다. 충격과 슬픔에도 확진자는 늘었다. 애도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가혹한 인력 부족도 여전했다. 2021년 11월이 되어서야 그나마 부평구 보건소 상황실 인원이 77명으로 늘었다. 정부는 2021년 816명, 2022년 757명의 보건소 정규 인력을 확보했다고 발표했지만, 늘어난 인력이 실제 현장에 오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미크론 확산을 따라 확진자는 더 급격하게 불어 업무 경감은 체감할 수 없었다.
케이방역의 얼굴을 한 공무원의 죽음은 천 주무관 이전처럼, 이후로도 이어졌다. 2022년 2월 전북 군산 공중보건의가 세상을 떠났다.
천 주무관이 떠나고 1주일 만에 맞은 2021년 추석. 김남순씨는 아들을 기리는 차례상을 준비했다. 혼자 있는 집에서 음식을 잔뜩 준비했다. “음식 해놓고 제가 깜빡 잠이 들었어요. 꿈에서 아들이 ‘엄마 나 밥 안 줄 거야?’ 했어요. 퍼뜩 깼어요. 신기하죠? 그렇게 얼굴 보게 되더라고요.” 언제나처럼 자랑스러운 아들 얼굴, 그대로였다. 다만 너무 짧은 순간이었다.
대전 인천/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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