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1-11-18 04:59수정 :2021-11-18 07:08
‘중’-종잇조각이 된 예방조치들
재재하청 거듭하며 ‘공기 압박’
안전절차 복잡, 일단 뛰어들어
2017년 2월3일, 탁 트인 바다 옆 울산 현대중공업 해양 에이치 도크(선박 건조작업 공간)에서는 오후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 회사 해양플랜트사업본부 하청 노동자 이아무개(44)씨는 도크에 있는 연료 이동용 파이프(브레이스) 가운데 하나를 바다 쪽으로 밀어 옮겨야 했다. 이씨와 다른 작업자 한 명이 몸으로 밀었으나 파이프 무게는 개당 10톤에 달했다. 동료 작업자가 포기하고 크레인을 부르러 간 사이, 이씨는 양쪽 끝에 있는 구름방지용 쐐기를 제거하려고 파이프 사이로 들어갔다. 한쪽 쐐기를 뺄 때까지 파이프는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쪽의 쐐기를 빼는 순간 파이프 하중이 이씨 쪽으로 쏠렸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이씨의 가슴이 파이프에 짓눌렸다. 의식을 잃은 이씨는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전주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 등 산업재해 전문가들로 구성된 ‘현대중공업 중대재해 사고조사 연구팀’(이하 연구팀)이 ‘현대중공업 중대재해 사고백서 Ⅰ’에서 재구성한 이씨 사고의 원인을 보면, ‘크레인 사용이 지연되자 하청업체 특성상 작업속도에 대한 압박 탓에 무리하게 작업을 강행’한 것으로 요약된다. 연구팀이 2014년 이후 발생한 현대중공업 산업재해 35건 가운데 하청 노동자 사고 26건을 분석한 결과 △재하도급으로 인한 작업속도 압박 △현장에서 지키기 어려운 안전 절차 △미숙련 노동자의 위험 현장 투입이 하청 노동자 사고의 ‘공통 요인’으로 분석됐다.
“브레이스 작업이 표준작업지시서에 명시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장비가 제대로 지원되지 않았고 안전불감증도 있었다.”(ㅇ씨)
현대중공업 현장에 크레인 등 작업 설비를 대여하고 운영·관리하는 업무는 2016년부터 현대중공업 자회사 ‘현대중공업모스(MOS)’가 맡고 있다. 김철우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부지부장은 “현대중공업이 장비 지원을 직접 할 땐 관리자 통화만으로도 당일 배차가 가능했는데 자회사로 업무가 이관된 뒤로는 반드시 전산으로 접수하게끔 하고 미리 예약되지 않으면 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긴급 작업이라도 배차가 안 될 땐 신청 서류를 쓰고 처리될 때까지 하루를 공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장비의 신청과 이용은 출범 이전과 동일하게 운영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안전하게 작업하는 절차가 복잡하면 가뜩이나 작업속도 압박을 받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일단 작업에 뛰어든다. 2019년 9월에도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 박아무개(60)씨가 18톤 무게의 엘피지(LPG)저장탱크 시험용 경판(원통형 몸체의 양 끝단에 붙이는 강판으로 만든 곡면판)을 본체에서 떼어내는 작업을 하다가 잘린 경판이 떨어지면서 깔려서 숨졌다. 애초부터 크레인으로 경판을 지지하고 아래에 받침대를 설치해야 했으나 이런 조처는 없었다. 작업 전 하청업체가 미리 위험 요인을 파악해 사고 예방을 위해 작성하는 표준작업지도서는 시험용 경판 제거 작업이 시작된 2019년 3월로부터 석 달이나 지난 2019년 6월5일에야 작성됐다. 당시 기자회견을 진행한 노동조합의 자료를 보면, 사고 당시처럼 하부받침대를 설치하지 않거나 크레인으로 중량물을 결속하지 않은 채 같은 작업을 한 횟수는 14회에 이른다.
사고 이후 현대중공업 노사는 해당 작업을 할 때 하부받침대와 크레인을 사용하도록 하고 실제로 이를 이행하는지 ‘집중 점검’하기로 했다. 그러나 복잡한 장비 대여 절차는 바꾸지 않았다. 지난 2월 또 다른 유사 사고가 발생한 뒤 노조가 ‘중량물 취급 작업 직영화’를 요구했을 때도, 현대중공업은 ‘표준작업지도서를 재점검해 반영한다’는 대책만 냈다.
근본적인 요인은 ‘시간이 돈이 되는 구조’다. 지난 7월 지붕 작업 도중 추락해 숨진 정아무개(44)씨는 소속된 ㅇ기업이 현대중공업의 3차 하도급 업체였다. 현대중공업이 ㅅ기업에 1차 하도급을 주고, ㅅ기업이 또 다른 ㅅ기업에 재하도급을 주고, 그 기업이 다시 ㅇ기업에 세 번째 도급을 줬다. 재하도급을 법으로 금지하는 건설업과 달리 조선업은 재하도급이 허용된다. 정씨의 동료 작업자 상당수는 사고 이후 ㅅ업체에 제출한 노동자 의견 청취서에 추락방호망 설치와 더불어 ‘촉박한 공사기한을 늘려달라’고 적었다.
“물량팀장(재하도급 업체 대표)이 되면 프로젝트를 꼭 두 개 이상은 땁니다. 애초에 하도급을 여러 번 거치면 재하청 업체에 떨어지는 돈이 별로 없기도 하고, 한 개만 하면 자칫 돈을 떼일 수도 있거든요. 물량팀원은 적은데 가야 할 현장은 많으니 이쪽 현장 일 얼른 끝내고 저쪽 가서 또 일하는 식으로 작업자들이 늘 쫓겨요. 아침에 안전교육 받을 시간이 없다는 건 그런 이유예요.” 이성호 현대중공업 하청지회장의 말이다.
조선업은 날씨가 궂거나 배를 바다에 띄우는 등의 사정으로 작업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공사기한 내에 제품을 완성하지 못하면 지연된 날짜만큼 배상금을 내야 한다. 원청 입장에선 수시로 인력을 늘리거나 줄이려는 수요가 있고, 소규모 하청업체 입장에선 인력 공급으로 단기간 바짝 이윤을 낼 수 있어 2000년대 초반부터 재하도급 업체가 난립했다.
현대중공업은 그동안 재하도급 업체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1차 하청업체와 계약할 때부터 ‘재하도급 금지’ 조항을 계약서에 명시하는데 하청업체가 몰래 재하도급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단기 인력 수요가 늘 있는 현대중공업이 생산량을 빠르게 해결하고자 재하도급을 맡긴다는 주장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대표는 “안전 사각지대 문제가 제기되는 업체는 주로 사내 협력업체 물량팀이 아닌 현대중공업 본사가 부르는 물량팀”이라며 “1인당 인건비로 대금을 책정하는 사내 하청 물량팀과 달리 현대중공업 본사 물량팀은 일부 공정만 떼어주고 돈을 주는 식이라 작업자들이 그 기한을 맞추려고 밤낮 일하다가 사고가 나곤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내 하청업체도 간혹 물량팀을 부르는 일이 있지만 물량 단위가 아닌 1인당 인건비로 급여를 주기 때문에 작업 속도 압박을 심하게 받진 않는다”고 덧붙였다.
수개월 만에 끝내는 프로젝트식 계약도 사고의 위험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2014년 2차 하청업체 노동자 이아무개(21)씨가 원유생산 설비 내부 엘리베이터에서 배선 작업을 하던 중 돌출물에 끼여 숨졌다. 이씨가 속한 ㅂ기업은 2014년 12월로 예정된 공사 완료 기한 두 달 전에 해당 작업을 도급받은 재하청 업체였다. 이씨는 엘리베이터 배선 경험이 사흘에 불과했으나 이날 단독으로 작업에 투입됐다.
지난 5월8일 원유운반선 탱크 안에서 용접을 하다가 추락해 사망한 장아무개(40)씨도 현대중공업과 한 달짜리 계약을 맺고 용접·취부 노무를 제공하고 있었다. 당시 노조가 확보한 장씨 소속 ㄱ기업과 현대중공업의 계약서를 보면, ㄱ기업은 현대중공업에 4월28일부터 5월31일까지 한 달 동안 용접·취부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장씨가 ㄱ기업에 2월26일 입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입사한 지 석 달도 안 돼 새로운 작업 환경에 배치됐고 그로부터 20여일 안에 주어진 작업을 마쳐야 했다.
최근 조선업은 해운 물동량 증가와 환경 규제 강화로 인한 주요국의 노후 선박 교체로 13년 만에 호황기를 맞았지만 임금 및 노동조건을 이유로 숙련공이 빠져나가면서 인력난을 겪고 있다. 급증한 수주 물량을 맞추는 과정에서 단기 업체의 미숙련 인력이 대거 투입될 가능성이 있고 그만큼 사고 우려도 크다.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회사는 정식 도급계약을 맺은 협력사하고만 공사를 진행하며 프로젝트 협력사 또한 계약 시 안전요소를 비롯한 적격성 검사를 철저히 실시하고 있다. 또 작업자의 업무가 공정 과정에서 변경될 수 있으나 새로운 근무 환경에 보다 안전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특별안전교육과 영상안전교육, 기타 보수교육 등을 통해 사전 사고 예방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헛도는 현대중 산업안전보건위
노사, 사고 때마다 “물량팀 근절을”
매번 같은 대책…이행 경과는 없어
하청 아우른 ‘협의체’ 확대 제안도
두 달 만에 세 건의 산업재해 사망 사고가 발생한 2016년 8월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노조)가 산업안전보건위원회(산보위)에 낸 안건이다. 현대중공업은 이에 대해 “도급계약서의 ‘재하도급 금지’ 조항에 의해 사내 협력사의 물량팀 활용을 금지한다”고 답했다. 원청이 1차 하청업체와 계약할 때 재하도급을 금지하도록 안내하고 있어 재하도급이 본사와 무관하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같은 안건은 지난 5월 용접 도중 추락해 사망한 장아무개(40)씨 사고 뒤에도 제출됐다. 이번엔 노사의 협의 결과란이 아예 비어 있었다.
산보위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노사가 산재 예방대책을 심의·의결하는 협의기구지만 형식적 운영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현대중공업 노사도 중대재해 때마다 임시 산보위를 열어 장비 대여 절차 개선과 재하도급 근절, 미숙련자 안전교육 필요성을 논의했으나 그때마다 나온 대책은 ‘표준작업지도서 개정’과 ‘재하도급 금지 조항 지속 관리’, ‘출입증 관리와 연계해 교육 후 배치’ 등에 그쳤다. 구체적인 이행 기록도 없었다.
‘현대중공업 중대재해 사고백서 Ⅰ’을 보면, 2014년 이후 전체 산재 사고 35건 가운데 14건은 산보위 개최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2016년 10월 발생한 사고에 대한 산보위가 이듬해 1월 열리기도 했다. 산안법상 산보위를 열지 않거나 협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부과하는 과태료는 최대 500만원에 불과하다. ‘현대중공업 중대재해 사고조사 연구팀’은 “노사 협의가 안 된 사항에 대해 회사가 거부한 이유와 추가 논의 여부를 기록하고 회사가 이행 계획만 밝힌 경우엔 그 경과도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산보위 이력 관리는 내년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계기로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경영책임자가 안전보건조처를 이행하지 않아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 처벌할 수 있도록 만든 법인데, 경영책임자가 산보위 안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가 판단 자료로 쓰일 수 있다.
같은 사업장 내 노사끼리 개최하는 산보위를 사내 하청 노사까지 아우르는 협의체로 넓힐 필요도 있다. 최상준 가톨릭대 교수(의학과)는 “정규직 노조가 사내 하청 노동자 의견까지 모아 구체적인 재해 예방 안건을 제시해야 하고 원청도 이를 하청 대표와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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