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총련과 그 역사를 알아보다(6) 90년대 총련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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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는 바와 같이 91년에 소련이 붕괴된 이후 세계의 유일한 초대국으로 군림한 미국은 미국중심의 세계질서를 확립하려고 광분했다. 90년대초부터 공화국에 대한 《핵의혹》이란 것이 보도계에 빈발해졌다.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이 《팀스피리트93》 합동군사연습을 재개하고 공화국이 이에 대하여 핵무기방지조약 탈퇴(93. 3.12)를 선언한 것을 기화로 하여 제국주의자들이 반공화국 책동으로 이용한 것이 소위 제1차 핵의혹이다. 미국에 의한 북조선 공폭론, 북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제재 강화, 북조선 붕괴설에 이르기까지 온갖 말이 떠돌았다.
핵의혹을 계기로 자행된 총련 탄압책동에 맞서다
1994년 4월25일, 오전 7시20분경 오사카부 경찰은 기동대차 56대를 포함한 1300여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총련 오사카부 본부회관을 비롯하여 산하의 이쿠노서 지부,이쿠노남 지부,히가시나리 지부,히가시요도가와 지부 등 8개소에 대한 강제수색을 감행하였다.
강제수색의 이유는 《위력 업무방해》라는 구실이였다. 이러한 대대적인 탄압행위는 총련 결성이래 일찌기 없었던 일이다.
총련중앙은 당일에 성명을 발표하여 탄압소동을 규탄하고 총련 탄압정책을 즉시 중지하고 사죄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오사카부 경찰당국에 대한 매일과 같은 항의 요청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오사카부 동포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일본 각지의 총련 일군들과 동포들은 지원물자를 보냈을 뿐 아니라 직접 항의투쟁에도 참가하여 반대투쟁의 기세를 높였다.
오사카부 경찰당국의 총련 탄압책동을 본따 교토부 경찰도 총련에 대한 탄압행위에 나섰다. 교토부경은 6월6일 총련 교토부본부를 비롯하여 국토리용계획법(계출의무)위반 용의로 학교법인 교토조선학원 사무국 등 27개소에 대한 요란한 강제수색과 192점의 물건을 압수하는 책동을 감행했다. 그런데 수사 도중에 제출서류가 계출되여 있다는 것이 판명되였는데 그 이후에도 경찰당국은 수색을 강행하고 당일의 밤 10시반이 넘어야 수색을 그만하고 철수했다.
총련측이 합법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 것도 무시하고 교토시 당국이 서류가 계출되여 있다는 것을 말해도 경찰당국은 수색을 계속한 것이다.
완전히 정치적인 탄압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폭거였다. 그럼에도 그자들은 경찰본부장 명의의 사죄가 아니라 방범부장 명의 사죄를 형식적으로 한 것으로 사건 종결을 시도하였다.
최대의 피해자는 조선학교 학생들이다.
94년 4월부터 6월23일까지만 하여도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폭행, 폭언사건이 139건이나 발생하였다. 그 대부분이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일본당국은 북의 핵의혹을 들고 나와 미국과 남조선당국과 한짝이 되여 제재 운운하면서 공화국과 총련, 재일동포에 대한 적대감정과 민족배타의식을 의도적으로 조장한 것이다.
여성동맹과 어머니들은 6월24일에 《우리 학교 학생들에 대한 폭행사건의 방지를 요구하는 재일조선 어머니 중앙대회》를 가지고 일본당국을 항의규탄하며 우리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을 대내외에 알렸다.
이 대회에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와 남조선의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들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들의 이름으로 격려문이 보내왔고 소개되였다.
이 무렵부터 점차 일본사회에서는 《치마저고리 사건》이란 말이 돌게 되었다.
결국 99년 4월부터 치마저고리는 학교 내의 제1교복으로 되고 통학 길은 다른옷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민족교육의 활동범위 확대
조선학교 앞에 수많은 난관이 가로막고 있었으나 학생들, 동포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 하나가 일본 전국고교체육연합회(고체련) 주최의 경기대회에 조선학교 학생들을 참가시키는 문제였다.
학생들은 일찍부터 일본학교와의 정식 체육경기를 강하게 희망하고 있었다.
90년 4월에 오사카부 고체련 주최의 춘기경기에 참가한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여자배구부가 1차 예선을 통과한 다음 도중에서 경기 출장이 거부된 일이 있었다.
경기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는데 참가한 것은 순수 실무적 실수였다는 것이였다. 이것을 계기로 오사카와 도쿄의 조고가 가맹신청을 하여 다른 고급학교도 이어서 신청하였다.
93년 5월, 고체련은 조고에 대해서 특별조치로 고등학교 총합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자격을 인정하게 되였다. 94년 8월에 처음으로 조고 선수들이 권투경기의 7개 계급에 참가하여 3명이 3위로 도쿄조고가 종합 6위의 성적을 올렸다. 그 이후에 투구, 축구 경기 등에 참가하여 일정한 성적을 올리게 되였다.
87년 당시 국철(일본 국가가 경영하는 철도회사, 이후에 민간화되여 JR라고 부른다)을 이용하는 조선학교 학생들의 정기권 값은 성인들과 같은 값이였다.
일본에서는 전차 이용료가 어른과 어린이의 값이 달랐고 정기권 값은 소학교생, 중고등학교 학생, 어른이 다 달랐다. 그런데 조선학교 학생에게는 정기권 값의 할인이 적용 안 되고 있었다.
지바 조선초중급학교 어머니회를 비롯하여 각지의 어머니들과 교육기관 일꾼들, 동포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요청활동, 서명운동 등을 전국적 범위에서 벌린 결과 94년 2월에는 JR회사가 요청을 받아들여 4월부터 조선학교 학생에게도 할인제도를 적용하게 되었다.
고체련 경기에 참가하는것, 정기권 할인적용 등은 조선학교에 있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했던 일로서 귀중한 성과로 지목된다.
95년 한신아와지대 지진피해를 구원하기 위한 전동포적 활동
1995년 1월17일, 효고현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희생자는 6400명을 넘었고 부상자는 4만3000명을 넘었다. 재일동포 사망자수는 125명, 부상자는 1500여명에 달했다.
총련중앙은 직후에 중앙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전기관적, 전동포적으로 구원활동을 벌리도록 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위문전문과 100만 달러의 구원금을 보내주었다.
중앙대책위원회 성원들과 구원을 위하여 달려온 동포들은 불면불휴의 구원활동을 전개하고 구원물자가 신속히 이재민에게 가닿도록 하였으며 간또대지진 때처럼 유언비어에 말려들어가지 않도록 경각심도 높였다.
총련은 피해 동포들의 생활복구에 힘썼으며 총련 사무소와 학교의 수리 보수와 재건을 위한 사업도 동시에 밀어나갔다.
지진 발생으로부터 2년2개월만인 97년 3월에는 히가시고베 조선초중급학교와 이타미 조선초급학교를 복구하였다.
해방 50주년을 새 계기로 만들자고 분발
1995년은 조국해방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재일동포들 속에서는 90년대를 통일 연대로 하자고 기세는 높았으며 역시 통일운동도 다양하게 벌렸다.
총련도 통일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많은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그를 위한 사업도 조직진행하였다.
1990년 8월15일에 판문점과 서울에서 범민족대회가 진행되고 《조국통일범민족련합》(범민련)이 결성되였다. 총련은 7월18일, 《조국통일 촉진, 8.15범민족대회 참가 재일조선인 대행진(오사카-도쿄간)》 출발대회를 오사카죠 공원에서 가지고 7월27일에는 도쿄에서 1만명 규모의 대회를 가져 108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범민련대회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총련은 1991년 4월부터 5월에 걸쳐 일본 지바현에서 개최된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코리아통일팀을 민단과 공동으로 환영하고 응원하는 사업을 함께 진행하여 통일을 지향하는 동포들의 힘을 과시하였다.
총련은 1991년 12월13일에 발표된 《남북간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해서도 열렬한 지지 환영 담화를 발표하였다.
또한 《8.15조국해방 50주년 경축 재일동포대축전》(도쿄 요요기공원 야외공연장)을 총련 산하 동포들과 한통련에 속하는 동포들, 불협과 한불련에 속하는 종교인들, 기독교 신자들과 민단에 속하는 동포들, 남조선에서 온 동포들 1만2000여명으로 대성황리에 가졌다.
전대미문, 총련 전임활동가 참살사건 발생
조선중앙통신사는 1998년 9월4일에 공화국이 8월31일에 100% 국산기술로 첫 인공지구위성 발사에 성공했다고 보도하였다.
일본은 탄도미사일이 발사되고 일본 상공을 넘어서 태평양에 착탄했다고 보도하였다. 마치도 일본 영공을 침해한 것처럼 여론을 오도하였다.
일본정부는 9월1일 저녁에 관방장관이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일본은 신형의 《테포동》이라고 하였고 위성이라고 하여도 국제법 위반이라고 떠들었다.
정부각료들은 《국가주권에 관한 중대한 침해》, 《국가존망의 위기》라고 하였고 자민당의 각종 부회에서는 《재일조선인의 자산 동결》, 《총련은 인질이다》, 《송금 금지이다》등 별의별 악담들이 오가고 했으며 일본정부는 (이미 허가된) 전세비행기를 중지, 조일국교 정상화 회담의 재동결, 인도적 지원의 재검토 등 처음되는 독자적 제재를 가하였다.
반공화국 선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는 속에서 총련 각급기관과 조선학교 학생을 비롯한 재일동포들에 대한 도발, 파괴행위, 폭언, 폭행 등이 연발했다.
10월15일에는 어떤 괴한이 총련 지바현 본부회관에 침입하여 건물, 사무소 내를 파괴하고 숙직을 하던 총련 지바지부 라훈 부위원장을 참살하고 휘발유를 뿌려 도주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총련은 일본정부 수상에게 사건의 재발 방지와 배후관계를 규명하며 민족적 박해와 폭행, 폭언의 인권침해를 그만두게 하며 인권을 보장하는 실효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하였다. 지바 살인사건은 20년이 지난 현재도 범인이 체포 안 된 채 있다.
오규상 재일조선인역사연구소 부소장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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