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⑥] 동독 출신의 프라이당크 영화감독
'독일 영화'는 한국에서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를린 영화제가 있지만, 한국에서 독일 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은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인 빔 벤더스, 베르너 헤어조크 등의 몇몇 대가, 할리우드 감독이라 해야 할 롤랜드 에머리히 등 소수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독일 영화계란 곧 서독 영화인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독 출신이 독일 영화계에서 설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영화계뿐만이 아니다. 독일 사회에서 서독 출신의 엘리트 계층 독점 현상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베를린사회과학연구소가 2012년 발표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독일 엘리트층의 95%가 서독 출신이며, 동독 출신은 2.8%에 불과하다. 이 같은 현상은 시간이 더 지나야, 즉 독일의 재통일 후 태어난 젊은 세대가 충분히 사회에 진입해야만 완화될 것이다.
지난 달 12일 만난 요헨 알렉산더 프라이당크(Jochen Alexander Freydank, 1967년생) 감독은 예외적 사례다. 프라이당크 감독은 지난 2009년 <토이랜드(독일어 Spielzeugland)>로 아카데미 단편 영화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로 세계의 관심을 받은 프라이당크 감독은 지난 2014년 영화 <카프카의 굴>로 부산 국제 영화제를 찾기도 했다. 동서독 출신 지역을 넘어, 독일 영화인 중 이처럼 세계적으로 성공한 감독 자체가 많지 않다. 프라이당크 감독을통일 독일에서 두각을 나타낸 구 동독 출신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프라이당크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주제는 통일 후 동독, 정확히는 베를린의 변화와 동독인의 독일 주류 사회로의 진입 스토리다. 프라이당크 감독은 1967년 베를린 카를 마르크스 대로(Karl-Marx Allee)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힙스터 천국' 베를린에서도 주목받는 클럽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샤인(Friedrichshain) 부근이다. 한 때 동독 체제 선전용으로 기획한 거리가 지금은 세계 젊은이들을 불러 모으는 힙스터 거리로 변했다.
프라이당크 감독이 현재 거주 중인 프렌츠라우어베르크(Prenzlauerberg) 또한 옛 힙스터 거리로 유명했다. 지금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완료돼 가난한 이는 찾아보기 힘든 비싼 지역이 됐지만 말이다. 프라이당크 감독과 프렌츠라우어베르크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그의 어조로 각색해 정리했다.
영화감독을 꿈꾼 동베를린 청년
전 1967년 9월, 동베를린 카를 마르크스 대로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통일 후에는 여행의 자유가 주어졌으니 세계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봤죠. 하지만 항상 베를린이 제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지금은 프렌츠라우어베르크 부근에서 생활하죠.
전 아카데믹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베를린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셨죠. 통일 이후 많은 동독 출신이 그랬듯, 서독에서 온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셔야 했지만요.
가정 환경 덕분에 전 어릴 적부터 상대적으로 풍부한 문화적 세례를 받고 자랐죠.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동독에서 영화는 체제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반면, 연극은 더 예술적 장르로서 자리 잡았죠. 그 덕분에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조금은 정치비판적인 연기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 영화에 빠져들었죠. 연극보다 더 콤팩트하고, 더 확장성도 좋았으니까요. 미학적 실험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동독 시절 저에게 영향을 준 작품요? <차가운 심장(Das Kalte Herz)>과 1980년대 동독 펑크 록 씬(Scene)을 다룬 다큐멘터리 <속삭이고 울부짖다(Flüstern und Schreien)>를 꼽겠습니다. 기본적으론 (한국의 AFKN과 같은) 주독 미군 방송 RIAS를 더 접했네요. 동베를린 젊은이들은 다 서독 방송이나 미군 방송을 시청했죠.
영화감독의 꿈을 꾸었기에, 아비투어를 치른 후 동독 국영 방송 ARD의 어린이, 청소년 프로그램의 조연출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인민군에서 사진병으로서 18개월 간 복무했죠. 동독에서 징집을 거부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징집을 거부하면 수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동독에서 수감 생활을 한다는 건 죽으러간다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징집을 피할 길이 없었죠. 더구나 징집을 거부한다는 건 (영화를 위한)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전 기독교 신자였고, 그 때문에 무기를 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안을 찾은 게 사진병입니다. 당시 저는 배우로서도 조금 활동했고, 영화계 일을 했기에 이 같은 대안을 겨우 찾을 수 있었죠.
바닥에서 상공으로
장벽이 무너질 당시 전 작은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었습니다. 장벽이 무너지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죠.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일단 너무나 충격적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구 동독 지역에서는 연일 평화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장벽이 무너진 후 시위 구호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국민'이라는 구호가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라는 구호로 변했습니다. 이어서 시위에 국기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동독기가 나왔으나, 나중에는 망치, 컴퍼스, 호밀 고리가 그려진 동독기가 사라지고 독일 국기(서독기)가 등장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상황이 되어버렸죠.
그렇게 통일을 맞았습니다. 기회가 열리리라 생각했죠. 하지만 쉽지 않더군요. 베를린과 포츠담의 영화 대학에 다섯 차례 지원했지만, 모두 낙방했습니다.
독일 영화계는 기본적으로 인맥이 중요합니다. 대부분 성공한 독일 출신 감독은 부모님이 이미 유명한 영화인이었거나, 유력 집안 자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시는 더했습니다. 도제식이었죠.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과해야만 대학 입학이 가능했는데, 인터뷰 때마다 교수들과 부딪쳤습니다. 미학적 기준의 차이였죠. 교수들은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흡수할 수 있는 학생을 원했는데, 그 부분에서 저와 의견 차이가 났죠.
결국 밑바닥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방송, 연극 무대를 가리지 않고 현장 일을 했습니다. 영화 영역에서는 의상을 제외한 모든 일을 해봤고, 공장이나 슈퍼마켓에서 일해보기도 했습니다. 동독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이런 일을 겪었느냐고요?
글쎄요. 답변하기 조금 어렵네요. '동독 출신이라 차별 받는다'라고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같은 느낌은 갖고 있었습니다. 비단 영화계뿐만이 아니라, 독일의 모든 중요한 자리, 즉 엘리트 계층에서 대체로 구 동독 출신은 극소수인 게 현실입니다. 반면, 인구로만 따지면 구 서독 출신이 구 동독 출신보다 더 많지만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독일 군인의 절반가량은 동독 출신입니다. 체제가 서독 위주였으니 구조적 출발선이 달라서 생긴 결과랄까요. 어떤 분야든 더 높은 위치로 가려면 넘어야 할 장벽이 있는데, 이 때 중요한 학벌, 인맥 등에서 동독 출신은 부족할 수밖에 없죠. 이 때문에 재통일의 열기가 가라앉은 후에는 너무나 컸던 기대에 따른 실망감이 사회에 번지기도 했습니다.
사실상 신분제 사회라고 느끼느냐고요? 그건 전혀 아니죠. 그 주장은 너무 나갔습니다. 일단 중요한 건 제 세대, 즉 통일을 경험한 세대와 통일 후 세대는 다르다는 겁니다. 지금 젊은 독일 세대에게는 출신 지역이 의미가 없습니다.
어찌됐든, <토이랜드>를 위해 힙겹게 돈을 모아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외국의 유명한 상을 타니 저를 보는 독일 영화계 시선도 달라지더군요.
참고로 독일의 영화 시스템은 한국과 조금 다릅니다. 영화에 국가가 재정적으로 참여하는 할당분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공영방송사가 수신료 이익 중 일부를 영화에 투자하는 시스템이죠. 다만 모든 영화가 이 같은 지원을 받진 못합니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열린 도시가 사람을 바꾼다
결과적으로 전 동독 출신이었다는 점 때문에 삶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만은 않습니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늦잠을 잘 때 전 새벽부터 일어나 일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죠.
더구나 전 구 서독 출신이 갖지 못한 경험을 했습니다. 동독 체제에서 독일 체제로, 일종의 경계를 넘어가는 경험을 해봤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다른 두 세상을 경험해 봤죠. 그 덕분에 다른 이들보다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동독보다 중요한 건 베를리너로서 정체성입니다. 분단 시절 동베를린은 동독의 문화 중심지였습니다. 동독에서 예술 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베를린에 모였습니다. 동독의 파리였다고나 할까요. 동베를린 특유의 사투리가 있는데, 당시 그 사투리를 쓰면 뭔가 쿨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동베를린이 물질적 측면에서 동독의 다른 도시보다 조금 더 풍요로웠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도시에서는 케첩을 구하기 어려웠지만, 동베를린에서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웠습니다. 물론 1인당 2병으로 제한되긴 했지만요. 자연히 동베를린은 다른 곳에 비해서 생동감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서베를린과 가까웠기 때문에 서독 사람들과 연락하기도 쉬웠고, 그 덕분에 더 살아있는 서구 소식을 들을 수 있기도 했습니다. 동베를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동독 독재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이런 외부와의 교류는 중요합니다. 동베를린만큼은 아니지만, 분단 시기 라이프치히도 박람회로 인해 일찍부터 외부 사람과 교류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같은 작센(Sachsen) 주의 도시임에도 라이프치히는 드레스덴, 켐니츠 등과 다릅니다. 더 열려 있죠. 요즘 라이프치히에 젊은 예술인이 몰려드는 이유입니다. 반면 작센의 프라이탈(Freital)은 지형 문제로 인해 분단 시기 서독 방송을 보기 힘들었는데, 현재 난민, 극우 문제에 관해 가장 극단적인 도시의 하나입니다.
서독 주도 재통일의 그늘
맞아요. 요즘 구 동독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극우 문제인 듯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나쁜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일종의 선동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사회를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듯합니다. 물론 동독 지역에 극우적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서독 지역에도 많습니다. 지난 켐니츠 사태 때 몰려든 극우 시위자 중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더 중요한 건 왜 저들이 불만을 갖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태의 악화를 막고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구 동독 출신이 사회에 불만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이처럼 자신보다 더 약한 자(외국인)를 차별하는 문제로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 글쎄요, 극단적으로 동독 출신을 단정하는 건 반대합니다만,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주변 지인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독일 언론에 불만이 많습니다. 구 서독 언론이 미디어를 지배하니, 그들의 시각으로 동쪽을 바라본다는 거죠. 예를 들어 보죠. 구 동독에서는 저축 개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를 과하게 축적하는 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나쁜 일로 인식됐죠. 이처럼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돈 관리 개념이 없이 살아왔는데, 재통일 후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밀려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죠. 구 동독 출신이 불만을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생각됩니다. 이런 점부터 살펴봐야 왜 신연방주의 일부 도시에서 극우 집회가 집중적으로 열리는가를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돌이켜 보면, 동독이 가진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장점이 사라진 게 아쉽습니다. 교육제도, 보육제도 등에서는 동독 체제도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모두 서독식으로 바꿔버렸죠.
심지어 재통일 초기에는 교통 신호등 체계까지 일방적으로 서독식으로 바꿨다가 시민의 반발로 원래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습니다(암펠만, 베를린의 상징인 공공 디자인으로 구 동독의 신호등 체계로 사용됐다. 서독 지역에서는 암펠만을 보기 힘들지만, 구 동독 지역에서는 지금도 신호등 문양으로 암펠만을 사용한다.). 이처럼 재통일 후 정부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동독의 흔적을 지우려 했습니다.
반발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구 동독의 유명한 저항적 언더그라운드 펑크 밴드였던 필링 비(Feeling B) 멤버 하나는 재통일 후 반어적으로 "동독에도 충분히 문제가 많은데, 이제 우리가 서쪽 문제까지 감당하게 됐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 밴드 출신 2명이 나중에는 독일 인기 록 밴드인 람슈타인(Rammstein)의 멤버가 되어 유명인으로 살아가죠. 통일에 비판적이었던 이가 지금은 통일 후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인 베를린 프렌츠라우어베르크에 산다니 재미있죠.
베를린이라는 환상
제가 사는 곳이기도 하죠. 최근에는 이곳이 정말 많이 변했어요.
며칠 전 이곳 부근 교회에서 시위가 있었습니다. 예전 이곳에서 살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밀려난 구 동독 사람들의 시위였습니다. 이제 동베를린은 평범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됐다는 증거죠.
통일 전에는 이 지역(프렌츠라우어베르크 쉔하우저 대로 부근)에서 방 하나를 구하는 데 서독 화폐로 3마르크, 유로화로는 1.5유로 정도면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월세로 1000유로(약 130만 원)가량이 듭니다. 30년 만에 670배 정도 올랐죠. 전 동독 출신으로 비교적 성공한 사례라 그나마 여기서 현실 유지가 가능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죠.
집 문제는 재통일 후 동독 출신이 경험한 가장 새로운 문제입니다. 동독 당시 집은 보급의 대상이었고, '일단 사람은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가난한 사람은 기본권조차 얻기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최근 취재를 위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갔는데, 그곳도 젠트리피케이션이 극심하더군요. 딱 과거 동베를린의 모습이었어요.
당신들이 뭘 물어볼지 알아요. 통일 후 동베를린의 이른바 저렴한 물가가 젊은이를 모았고, 그 덕분에 베를린이 힙스터 천국으로 거듭났다는 거죠? 제 경험으로 보자면, 실제 1990년대 말까지는 창조적인 분위기가 존재했어요. 통일 후 돈도 없고 직업도 없지만 집은 있던 동베를린의 젊은이들이 할 일이 뭐 있었겠어요? 파티 했죠. 더구나, 동베를린의 특수성이 존재했어요.
독일 말로 '키츠(Kiez)'라고 하는데, 그냥 동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종의 문화적 지역 개념이지만 지금은 행정적으로도 사용하죠. 베를린에 17개의 키츠가 있어요. 각 키츠별로 문화가 다릅니다. 이런 다양성이 베를린을 개방적이고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베를린의 개방성이란 백인에게만 그렇죠. 가난한 비 백인에게는 결코 열려있지 않아요. 난 오픈 마인드라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너희 아이를 터키계, 아랍계 아이들이 많은 학교에 보내도 괜찮으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싫다고 답하죠. 소위 '베를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가난한 예술가 동네'는 사실 좀 미신과 같은 측면이 있어요. (통역: 추영롱)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