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예감 319] 6명의 책사들과 점령군 철수,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 |||||||||||||||
기사입력: 2018/10/22 [09:3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차례>
1. 세계지배책략을 설계한 6명의 책사들
2. 500명만 남고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
3. 미국이 태평양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이유
4. 6.25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 않은 이유
5. 7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1. 세계지배책략을 설계한 6명의 책사들
미국은 79년 전 독일이 뽈스까(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한 직후 핵무기개발에 달라붙었다. 1939년 10월 21일의 일이었다. 그 이후 미국은 핵무기와 원자력에 관련된 핵기술개발사업에 총 5조3천억 달러(한화 약 6,000조 원)를 쏟아부었고, 1,054회 핵시험을 하였으며, 2018년 현재 핵무기 약 4,000발을 쌓아놓았다.
미국의 안보문제연구기관 헤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이 2015년 10월 28일에 펴낸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을 포함하여 29개 나라, 10억 명 인구를 ‘핵우산’으로 ‘보호’해준다고 한다. 그들은 보호라는 말을 썼지만, ‘핵우산’으로 보호해준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29개 나라를 거느리고, 10억 명의 인구를 가진 아메리카핵제국(Nuclear Empire of America)은 세계 각지에서 무력침공과 내정간섭, 막후통치와 강권외교, 전쟁위협과 군사대결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다.
그런 아메리카핵제국의 세계지배전략을 25년 동안 주물렀던 책사들이 있었다. 언론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흑막 뒤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세계지배책략을 조언해준 책사들이다.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들인 월터 아이삭슨(Walter Isaacson)과 에번 토머스(Even Thomas)가 공동으로 집필한 ‘현자들: 6명의 벗들과 그들이 만든 세계(The Wise Men: Six Friends and the World They Made)’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 책사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1986년에 출판된 그 책은 1945년 트루먼 행정부에서 1969년 존슨 행정부까지 장장 25년 동안 아메리카핵제국의 세계지배책략에 결정적인 영항을 미쳤던 6명의 책사들에 대해 서술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둔 세계사적 전환기였던 1945년 4월에 자기들끼리 비공개협의체를 결성한 6명의 책사들은 갓 출범한 트루먼 행정부의 막후에서 세계지배책략수립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으로 첫 작업을 시작하였다. 6명의 책사들은 다음과 같다. <사진 1>
딘 애치슨(Dean G. Acheson, 1893~1971) - 미국 국무장관과 재무장관 역임
조지 케넌 (George F. Kennan, 1904~2005) - 소련주재 미국대사 역임
찰스 볼런 (Charles E. Bohlen, 1904~1974) - 소련주재 미국대사 역임
애버럴 해리먼(W. Averell Harriman, 1891~1986) - 재벌총수로 상무장관 역임
로벗 로벳 (Robert A. Lovett, 1895-1986) - 재벌총수로 국방장관 역임
존 맥클로이 (John J. McCloy, 1895~1989) - 세계은행 총재 역임
1945년부터 1969년까지 25년 동안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소련봉쇄와 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 일본 점령과 유엔 창설,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 중동전쟁과 베트남전쟁, 대만해협위기와 꾸바미사일위기 같은 워싱턴발 대격변들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세계지배책략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945년 조선해방 4개월 전부터 1953년 정전협정체결 6개월 전까지 8년 동안, 한반도가 해방과 점령, 분단과 전쟁을 겪었던 바로 그 기간에 제33대 미국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분단고착, 대량학살, 전쟁범죄 같은 극악한 죄악을 저질렀던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의 한반도책략수립에 6명의 책사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5년 동안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국가건설운동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행동에 옮긴 미국의 세계지배책략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그 격렬한 정면충돌 이후 오늘까지 70여 년이 지났으나, 우리 민족은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2018년 10월 현재 한반도의 정세는 우리 민족이 70여 년 전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였던 미국의 세계지배책략을 돌파해야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명백한 이치를 말해준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미국의 세계지배책략은 무엇이었던가? 6명의 책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에 맞서는 강대국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한 소련을 새로운 적국으로 규정하고 소련의 팽창주의를 무력으로 봉쇄해야 한다고 믿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 소련봉쇄전략의 설계자가 조지 케넌이었다는 ‘정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소련봉쇄전략의 설계자는 케넌을 포함한 6명의 책사들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후반부에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였던 냉전체제는 바로 그런 정치적 배경에서 성립되었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세계지배책략에서 중심적인 내용은 소련봉쇄전략이었고,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봉쇄전략의 일환으로 한반도책략을 수행하였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말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는 바로 그런 정치적 배경에서 성립된 것이다.
2. 500명만 남고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
1949년 6월 21일 미국 연방하원 외교위원회가 특별한 청문회를 열었다. 미국군 합동참모본부 군사지휘관들이 그 청문회에 불려나갔다.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하원의원들과 합참본부 군사지휘관들은 그 청문회에서 남조선점령군 철수문제를 놓고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다. 당시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한 자기 군대를 남조선점령군(occupation forces in South Korea)이라고 불렀다.
연방하원의원 - “합참본부가 이번에 점령군 철수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건의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은가?”
합참본부 군사지휘관들 - (이구동성으로) “그렇다.”
연방하원의원 - “귀관은 육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선호하였다고 하는데...”
합참본부 군사지휘관 - “확실히 그렇다. 전술부대들만 철수한 것이다.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국군 고문단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병력이 증강된 연대급 전투부대들인 전술부대들의 철수다.”
연방하원의원 - “미국군 고문단의 규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합참본부 군사지휘관 - “500명의 장교들과 사병들이다.”
연방하원의원 - “점령군 철수에 의해 발생한 공백을 한국 정부가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합참본부 군사지휘관 - “확실하다.”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하원의원들과 합참본부 군사지휘관들 사이에서 오간 위와 같은 청문회 질의응답이 어떤 원인과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 알려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트루먼 행정부는 1948년 한 해 동안 남조선점령군 40,000명 가운데 7,500명만 남겨놓고 대폭 감축하였다. 그것은 계속주둔을 위한 병력감축이 아니라 완전철수를 위한 단계적 병력감축이었다. 1948년 4월 2일 트루먼 행정부는 1948년 9월 15일부터 시작한 남조선점령군의 단계적 철수를 1949년 6월 30일 이전까지 완료하기로 결정하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군 합동참모본부가 트루먼에게 남조선점령군 철수계획을 제출하였고, 트루먼은 그 철군계획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상정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남조선점령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소련봉쇄정책을 수행하는 데서 중요한 요소이므로,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시 연방의회의 일반적인 견해였는데, 트루먼 행정부는 그런 기존관념을 뒤집고 남조선점령군을 완전히 철수하였다. 당시 미국 연방의회는 트루먼 행정부가 왜 남조선점령군을 완전히 철수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위와 같이 철군문제를 다루는 특별청문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트루먼 행정부의 남조선점령군 철수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소련봉쇄전략의 일환이라는 사실이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소련봉쇄전략에 따르면, 남조선점령군 철수는 트루먼 행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6명의 책사들이 남조선점령군 철수라는 정세변화를 촉발시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세계지배책략에서 소련봉쇄전략과 남조선점령군 철수는 서로 어떻게 연관되었던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1948년 11월 23일 트루먼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에서 채택된 비밀문서 ‘NSC 20/4’에서 찾을 수 있다. 6명 책사들이 작성한 세계지배책략 설계도에 의거하여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관료들이 작성한 이 비밀문서에서 미국의 전후 세계지배책략이 드러나는데, 미국군을 해외에 배치하는 우선순위가 그 문서에 명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군사비와 병력을 대폭 감축한 트루먼 행정부는 한정된 병력을 해외 각지에 효과적으로 배분하기 위해 배분순위를 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비밀문서에 명기된 우선순위에 따르면, 영국은 1위에 올랐고, 일본은 13위로 쳐졌고, 한국은 15위로 완전히 밀려났다. 트루먼 행정부의 세계지배책략에서 서유럽이 최우선이고, 중동이 그 다음이고, 아시아는 뒤로 밀려났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트루먼 행정부가 해외배치병력 배분순위에서 한국을 최하위로 밀어놓았으니,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하고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겨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트루먼 행정부가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한 것은 소련봉쇄전략을 수행하는 데서 한반도가 전략적 가치를 갖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사진 2>
남조선점령군이 철수한 뒤에 남은 군사고문단의 임무는 1948년 9월 5일에 창설된 한국군의 무력증강과 군사작전을 계획, 지휘하는 한편,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에 체류하는 미국인을 일본으로 탈출시키는 비전투원소개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며 광분하였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점령군 철수와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궐기한 진보적 민중 약 100만 명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한국군과 경찰이 자행한 제주항쟁 대량학살, 여순항쟁 대량학살, 보도연맹원 대량학살은 남조선점령군 군사고문단의 명령과 지휘에 의해 저질러진 역사상 가장 잔혹한 만행이다. 또한 남조선점령군 군사고문단은 북위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한국군의 공격작전을 지휘하면서 북침광기를 부추겼다.
남과 북은 북위 38도선 지역에서 1948년에 930여 차례의 무력충돌을 벌였고, 1949년에 2,617여 차례의 무력충돌을 벌였고, 1950년에는 6월 25일 직전까지 1,147 차례의 무력충돌을 벌였는데, 특히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강릉 등에서는 사실상 내전이 벌어졌다. 그처럼 6.25전쟁의 전주곡이 울리고 있었던 긴박한 상황에서 트루먼 행정부는 남조선점령군을 증강하기는커녕 정반대로 완전히 철수해버렸다. 거기에 더하여 한국에 대한 무력증강지원도 중지하려고 하였다. 이를테면, 1950년 6월 23일 미국군 합참본부 합동전략기획위원회가 작성한 1급 비밀보고서는 “합동참모본부는 한국이 전략적 측면에서 별로 가치가 없다는 점에 동의했다. 따라서 상호방위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한국에 군사자금을 추가로 지원하는 것은 정당한 처사로 보기 어렵다”고 명기하였던 것이다.
3. 미국이 태평양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이유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1947년 6월 16일 미국군 합참본부가 작성한 ‘문라이즈(Moonrise)’라는 명칭의 대소전쟁전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미국군 합참본부가 작성한 대소전쟁계획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팽창주의정책에 매달리는 소련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며, 가까운 장래에 소련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이다.
(2) 미국군은 유럽전선에서 소련군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지만, 전쟁이 유럽전선과 아시아전선에서 동시에 일어나면 미국군이 그 두 전선에서 모두 이길 수 없으므로, 아시아전선에서는 공군력을 동원하여 소련군의 남진공격을 저지해야 한다. 따라서 오끼나와공군기지의 군사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다.
(3)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점령군 2개 사단과 남조선군은 패할 것이고, 소련군 5개 사단은 북조선군과 협공하여 개전 20일 안에 남조선 전역을 점령할 것이다.
(4) 미국은 소련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한 남조선점령군을 신속히 일본으로 철수하고 일본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
(5) 미국은 알류산열도 - 일본 본토 - 오끼나와 -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섬들로 연결된 태평양방어선을 구축하여 소련의 태평양진출을 저지해야 한다.
위에 서술된 대소전쟁전략에 따르면, 한반도는 전략적 가치를 잃고 태평양방어선에서 제외되었으므로, 트루먼 행정부는 당연히 남조선점령군을 일본으로 철수해야 하였다. 그렇게 되어 미국군 합참본부는 1948년 4월 2일 남조선점령군 철수계획을 문서화한 ‘SANACC 176/39’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하였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철군계획을 승인하였다. <사진 3>
미국군 합참본부의 철군계획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철군결정에 따라, 남조선점령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수되기 시작하여 1949년 6월 30일까지 완전히 철수되었다. 미국군 합참본부는 1949년 12월 8일 ‘문라이즈’를 보강하여 ‘앞태클(Offtackle)’이라는 명칭의 대소전쟁전략을 완성하였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전국언론인협회(NPC)에서 진행한 연설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에 대해 설명한 것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소련봉쇄전략에 따른 발언이었다. 또한 1950년 6월 루이스 존슨(Louis A. Johnson) 미국 국방장관과 오마 브래들리(Omar N. Bradley) 미국군 합참의장이 하와이, 필리핀, 일본, 알래스카를 순방, 시찰하면서, 한국만 빼놓았던 것도,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소련봉쇄전략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런데 1949년 6월 30일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하였던 트루먼 행정부는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군을 급파하여 3년 동안 격전을 벌였다. 그 전쟁이 정전상태로 전환된 이후 오늘까지 65년 동안 미국은 주한미국군을 계속 유지해왔다.
4. 6.25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 않은 이유
의문이 생긴다. 한반도가 전략적 가치를 상실하였다고 판단하고 점령군을 철수하였던 미국은 왜 미국군을 다시 한국에 파병하였고, 정전 이후에도 65년 동안 유지하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풀어주는 해답은 다음과 같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집행한 소련봉쇄전략에서 말하는 미국과 소련의 전쟁은 유럽전선과 아시아전선에서 일어나는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였다. 당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가졌던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핵무기로 소련군을 궤멸시키면 자기들이 이길 것으로 타산했다.
그런데 트루먼 행정부가 예상했던 소련이 도발한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참전하지 않은 6.25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신생독립국 조선과 국지전을 벌였다. 핵무기를 가진 미국은 창건된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조선을 전쟁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이 조선에 대해 크게 오판한 것이었다. 미국의 예상을 뒤엎고, 조선인민군은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개전 두 달 뒤에는 38도선 이남지역을 거의 점령하였다. 애초에 전쟁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았던 신생독립국과 맞붙은 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이며 세계 유일의 핵보유국이 패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치욕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3년 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사진 4>
2010년 6월 16일 미국 미주리주에 있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Harry S. Truman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에서 ‘코리아전쟁 60주년 토론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워싱턴D.C.에 있는 윌슨 쎈터(Wilson Center)가 공개한 소련의 비밀문서를 분석한 ‘코리아전쟁 중 조선과 중국의 갈등’이라는 제목의 특이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논문은 6.25전쟁 개전일로부터 석 달 동안 조선이 소련의 군사지원제의와 중국의 파병제의를 모두 거절하면서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었다. 당시 조선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조국해방전쟁’을 주체역량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원칙을 지켰던 것이다. 조선이 주체적 전쟁수행원칙에 얼마나 철저했으면,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이 프랑스 통신사 <AFP>의 긴급보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알고 깜짝 놀랐겠는가. 조선은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에야 연락장교 한 사람을 베이징에 파견하여 전황을 처음 통보했다. 1950년 7월 초 마오쩌둥 주석은 평양주재 중국대사에게 조선측과 중국의 파병문제를 협의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조선은 파병문제를 협의하기는커녕 중국대사에게 전황정보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조국해방전쟁’에 중국이 개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전황을 알지 못해 잔뜩 답답해진 중국은 군사고문단을 조선전선에 파견하여 전황을 알아보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조선은 그 요청도 거절하였다. 미국의 대규모 파병으로 전쟁정세가 바뀌자, 1950년 8월 11일 마오쩌둥 주석은 조선전선에 파병하겠다고 직접 제의했으나, 김일성 주석은 파병제의를 또 다시 거절하였다.
1950년 9월 15일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전황이 조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오쩌둥 주석은 김일성 주석에게 중국의 파병을 다시 제안하였고, 9월 21일에는 소련까지 나서서 중국의 파병제의를 받아들이라고 조선에게 간곡히 권고하였다. 조선로동당 정치국이 소련의 군사지원제의와 중국의 파병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날은 1950년 9월 28일이었다.
만일 소련이 중국과 함께 6.25전쟁에 파병하였더라면, 미국은 대소전쟁계획에 따라 공군력을 동원하여 소련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방을 폭격하여 전선을 한반도 밖으로 확대하였을 것이며, 미국과 소련의 전쟁은 대만해협으로, 일본 홋까이도(北海道)로, 동유럽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 서술한 것처럼, 조선은 6.25전쟁 초기에 소련의 군사지원과 중국의 파병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미국군 합참본부는 한반도에서 국지전에 대처하는 전쟁계획만 수행하였고, 6.25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 않았던 것이다.
5. 7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소련봉쇄전략을 행동에 옮긴 트루먼 행정부가 그 전략에 따라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한 때로부터 어언 70년 세월이 흘렀다. 2018년도 기울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 민족은 지난 70년 동안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정세와 한반도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올해 들어 일어난 세계정세와 한반도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70년 전,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트루먼 행정부의 소련봉쇄전략은 오늘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봉쇄전략과 러시아봉쇄전략으로 대체되고, 확대되었다.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만 상대하면 되었지만, 오늘 트럼프 행정부는 아시아에서 중국과 맞서야 하고, 유럽에서 러시아와 맞서야 하는 매우 불리한 처지에 빠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불리한 처지에서 벗어나보려고 집착하는 중국봉쇄전략과 러시아봉쇄전략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중심내용은 미국의 핵무력증강이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기존 핵군축조약들을 줄줄이 파기하면서 핵무력을 증강하려고 광분하고 있다. 이를테면, 트럼프 행정부는 이전에 러시아와 체결하였던 ‘탄도탄요격미사일조약(ABM)’에서 이미 탈퇴하였고, ‘중거리핵무력조약(INF)’을 곧 파기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신전략무기감축협정(NSART)’까지 파기할 기세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의 핵무력증강은 한반도 비핵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트럼프 행정부가 핵무력을 증강할수록 조선에게 비핵화를 요구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한반도 비핵화가 조선의 단계적 핵동결과 미국의 단계적 철군으로 귀결될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2)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자국의 첫 핵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함으로써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험에 빠뜨렸던 상황은 2017년 11월 29일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여 미국의 국가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지난 70년 동안 미국이 유지해오는 태평양방어선 전체가 조선의 핵공격권 안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미국 본토 전역도 조선의 핵공격권 안에 들어가고 말았음을 의미한다. 소련이 조선의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처럼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가 11,000km가 넘는 R-16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한 날이 1961년 2월 2일이었으므로, 소련은 1960년까지는 미국 본토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못하였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70여 년 전 트루먼 행정부가 소련의 핵시험 성공 직후에 직면했던 국가안보파탄위기보다 오늘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의 화성-15 시험발사 성공 직후에 직면한 국가안보파탄위기가 훨씬 더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진 5>
(3) 70년 전, 미국군 합참본부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소련군 5개 사단이 북조선군과 협공하여 개전 20일 안에 남조선을 점령할 것으로 예견했고, 1945년 8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남조선을 점령했던 미국군 2개 사단과 미국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남조선군이 참패할 것으로 예견하였지만, 오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조선인민군은 초단기속결전으로 개전 72시간 만에 주한미국군과 한국군에게 패배를 안겨줄 것으로 예견된다.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가 소련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한 남조선점령군을 신속히 일본으로 철수하고 일본 방어에 집중하였던 것처럼, 오늘 트럼프 행정부는 조선인민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한 주한미국군을 신속히 일본으로 철수하고 일본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
(4)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는 알류산열도 - 일본 본토 - 오끼나와 -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섬들로 연결된 태평양방어선을 구축하여 소련의 태평양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오늘 트럼프 행정부는 알류산열도 - 일본 본토 - 오끼나와 - 필리핀 - 괌으로 이어지는 태평양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중국의 해군력과 공군력을 저지하기 힘들다.
미국은 태평양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첨예한 군사대결을 벌이고 있다. 쌍방이 공군력과 해군력을 각각 동원하는 군사대결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미국과 중국이 장거리전략폭격기를 동중국해 상공과 남중국해 상공에 각각 출동시켜 군사대결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2018년 8월 13일 괌의 앤더슨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2대가 동중국해 상공에 나타났고, 8월 23일에도 같은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1대가 동중국해 상공에 나타났으며, 9월 24일에도 같은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여러 대가 남중국해 상공에 나타났고, 10월 16일에도 같은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2대가 남중국해 상공에 나타났다. 2018년 9월 하순, 중국은 미국의 장거리전략폭격기 출동에 대응하여 중국 남부에 있는 해군항공기지에 최신형 H-6J 장거리전략폭격기 4대를 전진배치하였다. 중국의 항공모함 함대와 장거리전략폭격기 편대들은 수시로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을 돌파하는 장거리기동훈련을 반복함으로써 그 방어선을 무너뜨리려고 하는데, 태평양방어선을 지키려는 미국의 공군력과 해군력은 제한적이다.
(5) 미국의 온라인 군사전문지 <브레이킹 디펜스(Breaking Defense)> 2015년 2월 24일 보도와 미국의 온라인 안보전문지 <워싱턴자유횃불(Washington Free Beacon)> 2015년 2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4-2-1 전쟁전략’을 대폭 축소하였다고 한다. 구체적인 사정은 다음과 같다.
ㄱ. 미국 본토 방어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을 변함없이 계속 유지한다.
ㄴ. 미국군이 전진배치된 유럽, 동북아시아, 중동, 서남아시아 등 4대 해외작전구역 전체에서 군사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을 폐기하고, 해외군사력을 재배치한다.
ㄷ. 2개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작전능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을 폐기하고, 1개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작전능력만 유지한다.
ㄹ. 다른 나라에서 갑자기 발생하는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작전능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사항들은 미국이 ‘1-4-2-1 전쟁전략’을 대폭 축소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미국의 전시증원군을 급파하는 능력이 감소된 반면, 미국과 맞선 조선, 러시아, 중국의 군사력이 급속히 증강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전시증원군을 급파하는 능력이 감소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 본토 전역이 조선의 핵공격위험 속에 빠지는 바람에 전시증원군을 파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 오늘, 주한미국군은 존재가치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가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했던 것처럼 오늘 트럼프 행정부도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곤경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대통령은 복잡한 정세변화를 파악할 만한 지적 능력은 갖지 못했으나, 자기의 직관력으로 주한미국군 철수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가 백악관 고위관리들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여러 차례 제기한 것은 그런 사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1969년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은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기하였으나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이 반대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79년 지미 카터(Jimmy E. Carter) 대통령도 주한미국군 철수를 검토하였으나 백악관 고위관리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오늘 세계정세와 한반도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백악관 고위관리들이 주한미국군 철수를 반대할 수 없는 여러 조건들을 만들어주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 미국과 중국의 대결,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 그리고 이미 일정에 오른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하게 된 상황 등이 바로 그런 조건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의사는 그런 조건들에 전적으로 부합한다. 그가 자기의 철군의사를 관철시킬 것으로 예상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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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1일 일요일
6명의 책사들과 점령군 철수,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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