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용 구미시장 당선자는 지난 19일 구미 문화예술회관에 마련된 ‘구미시장직 인수지원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갖고 “박정희 브랜드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구미의 브랜드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요판] 장세용 경북 구미시장 당선자 인터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구미는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보수 텃밭’으로 꼽힌다. 지방자치가 시작된 이후 자유한국당 계열의 시장 2명이 장기집권한 지역이다. 이런 구미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한 후보가 시장에 당선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장세용 구미시장 당선자를 만나 그의 ‘도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후배들에게 길을 보여주고 싶었다. 골수 보수지역이라서 뭘 해도 안 된다는 패배의식을 깨고, 우리 스스로가 충분히 역량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장세용(64·이하 호칭 생략) 구미시장 당선자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왜 시장선거에 나섰는지부터 설명했다.
“서울에는 인적 자원이 많지만, 지역 특히 대구·경북에는 진보 활동가의 숫자가 적다. 정권이 몇번 바뀌었지만, 그들이 무슨 혜택을 본 것도 없다. 오히려 ‘니네들 뭐라고 떠들어대더니 아무 것도 아니네’라는 조롱만 받아왔다. 게다가 지역 활동가 중에서도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의 유명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다. 지역 대학을 졸업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뭐냐. 서울에서 내려온 유명인사들의 밑자락만 깔아주는 존재냐’고 자조할 때도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구미는 ‘보수의 심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곳이다. 1995년 본격적인 지방자치제가 이뤄진 뒤 전임 시장 두명(김관용, 남유진)이 각각 임기 세번씩 장기 집권했으며, 그 기간 동안 ‘박정희 우상화’가 이뤄졌다. 이런 구미가 6.13 지방선거에서 대구·경북지역 유일의 민주당 당선자를 내는 이변을 일으켰다. 장세용은 득표율 40.8%를 얻어 38.7%에 그친 자유한국당 후보(이양호)를 2.1%포인트 차이로 꺾었다. 민주당 소속 후보가 대구·경북 지역 자치단체장이 된 것은 사상 처음이다. ‘박정희 극복’을 내세운 정면 승부를 벌여 이룬 승리였다. 지난 19일 구미시 문화예술회관에 마련된 ‘시장직 인수지원단’ 사무실에서 장세용 당선자를 만났다.
“내 본모습 다 보여주고 선택받아”
장세용은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해온 대구·경북지역 진보진영의 맏형이다. 그는 대학(영남대 사학과)을 졸업한 뒤 주로 경산에서 활동했다. 1991년 지역 주간지인 <경산신문> 창간에 참여한 뒤 매주 칼럼과 논설을 써 왔다. 부인(김창숙·61)은 열린우리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의 경산·청도 지역위원장과 경북 도의원(비례대표)을 지내기도 했다.
-경산이 아니라 구미에서 출마한 이유가 뭔가.
“그러지 않아도 내 주변 사람들은 이름이 알려진 경산에서 시장에 출마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경산보다는 구미가 가능성이 더 있다고 판단했다. 경산은 사람과의 인연은 많지만, 그것이 투표장으로까지 이어지는 연은 아니라고 봤다. 경북 사람의 투표 성향으로 봤을 때 역시 혈연과 지연, 학연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진보를 말하면서 그런 것을 따지냐고 할지 모르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장세용 구미시장 당선자가 지난 19일 오전 ‘구미시장직 인사위원단’ 첫 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당선에는 민주당보다 무소속이 더 유리했을 것 같다. 무소속 출마는 생각해보지 않았나.
“그런 생각은 꿈에서도 한 적이 없다.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는 것은 꼭 이겨서 뭐가 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 목표는 뭐가 반드시 되겠다는 게 아니라 이 상황을 돌파해보자는 것이었다. 즉, 시장직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다. 비록 돈은 벌지 못했지만 사회적으로는 얻을 만한 것은 다 얻었기에 자리를 더 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단지 이 도전이 의미가 있었기에 정정당당하게 싸웠다. 대구·경북에서는 민주당이 뿌리가 약해서 힘들고 때로는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이런 싸움을 통해서 정당 정치를 강화하고 싶었다.”
장세용은 보수적인 지역 분위기상 민감할 수 있는 사회적 이슈도 피해가지 않았다. 지난 4월16일 세월호 4주기 때는 “우리는 사건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사건의 본질을 기억해야 합니다”는 성명을 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8주기 날에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도 같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5월 광주의 영령들께 고개 숙여 감사와 추모를 드립니다”고 밝혔다.
-세월호나 광주항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텐데.
“분향 등 할 건 다 했다. 그런 것을 통해 장세용의 본모습을 다 보여주고 선택받고 싶었다. 그게 맞다고 본다.”
장세용은 6.25 전쟁 직후인 1953년 7월 경북 칠곡의 인동(나중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미로 편입)에서 인동 장씨의 33대 장손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말까지만 해도 삼남지방 최대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복한 문중이었지만, 조부가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바람에 재산이 급격하게 준 데다가 열살 때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장세용은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시달렸다. 공부를 잘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어머니(장세용이 25살 때 작고) 뜻에 따라 대구상고를 택했다. 상고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틈만 나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 지냈다. 졸업 뒤에도 은행원이 되고픈 마음이 없어 고향에서 어머니 병 간호를 하면서 3년을 보냈다. “이렇게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병역 의무를 마친 뒤 1976년 뒤늦게 대학(영남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때는 교련 수업 반대시위와 ‘한국적 민주주의 장례식’ 등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박근혜가 이사장과 이사로 재직 중이었던) 1980년과 1988년 영남대를 달궜던 ‘박근혜 퇴진 투쟁’을 이끌었다. 이 일로 장세용은 학교에서 “미운 털이 박혀” 결국 대학원 진학은 경북대로 했다. 반골 기질이 강한 그는 경북대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다시 영남대로 옮겨, 1990년 프랑스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의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는 ‘전국대학강사노조’ 설립(1990년)을 주도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교수 임용에 계속해서 탈락했다.
-출세하려면 적당히 투쟁하거나 현실과 타협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매번 앞장섰나?
“출세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법대에 갔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출세주의자는 유신정권의 어용들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런 출세는 안 하겠다고 일찍부터 결심했다. 되돌아 보면 세상을 뒤집어보고 싶은 내력 같은 게 나한테 있는 것 같다.”
-학생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뭐였나?
“특별한 계기는 없는데 책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교 때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감시 사회와 독재에 충격을 받았다. 대학 때는 박홍규 형(65·전 영남대 교수) 신세를 많이 졌다. 친한 친구 형인 그의 집에 자주 갔는데, 홍규 형은 당시에 1만권의 각종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 때 역사와 정치사상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게 나의 눈을 뜨게 했던 것 같다.”
장세용 구미시장 당선자가 지난 13일 밤 당선이 확정된 뒤 엄지 손가락을 펴고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구미시청 제공
“박정희도 이용할 게 있으면 이용”
젊었을 때 그의 집은 대구 운동권 후배들의 ‘아지트’였다. 부인 김창숙은 당내 경선 때인 지난 4월 구미을 민주당 지역위원회 밴드에 올린 글에서 “1982년 결혼해 15평 아파트에 신혼집을 차렸다. 방이 두 개인데 한방에는 늘 후배(운동권)들이 북적거렸다”고 썼다.
장세용은 학문 연구자로서의 본분에도 충실했다. 같은 서양사 전공으로 대중서를 많이 쓴 이영석(광주대 교수)은 장세용의 시장 당선이 확정된 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장세용 당선자는) 오랫동안 대학에 전임 자리를 얻지 못하고 시간강사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프랑스 사상사나 영국 사상사에 관련된 논문들을 발표하고 이들을 모아 몇 권의 연구서를 펴냈다. 물론 그의 글이 상당히 난해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면서 학문적 성실성에 감탄하곤 했다”고 적었다.
장세용은 2007년 12월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에이치케이(HK)연구교수라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자리를 얻었다. 박사학위를 딴 지 18년째였다. 공간 연구 전문가인 프랑스의 앙리 르페브르 등에 대한 연구 업적을 부산대에서 평가받았다. 르페브르 연구는 도시공간의 재배치나 도시 재생에 관한 눈을 뜨게 해줬으며, 이는 결국 그가 구미시장 출마를 결심하게 한 직접적인 계기 중 하나였다.
-선거 때 ‘도시재생 전문가’임을 강조했는데, 구미를 어떻게 바꿀 건가.
“구미는 기업중심도시라고 했지만 지금 기업은 빠져나가고, 노동자는 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남은 것은 ‘박정희’와 ‘새마을’이라는 브랜드뿐이다. 사람들이 구미에 가서 보면 박정희와 새마을 말고도 볼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하나도 없다. 박정희 브랜드가 득이 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구미의 브랜드를 다양화해야 한다. 새마을테마공원에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을 만들자고 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노동자와 여성, 사회적 약자들이 각자 자기 나름의 영역을 개발해 공존하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시청의 새마을과를 없애고, 새마을테마공원의 성격도 바꾸겠다고 한 것을 두고 박정희 그림자를 구미에서 다 지우려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나이 든 분들은 지금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웃음) 낡은 이념의 관점으로 보니까 그렇게 단선적인 얘기가 나온다. 물론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기본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지만, 그 잣대로 이 도시를 운영하려는 게 아니다. 박정희도 이용할 게 있으면 이용할 것이다. 박정희뿐 아니라 다른 것을 서로 합쳐서 어떻게 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까를 고민하고 있다.”
장세용 구미시장 당선자(오른쪽 두번째)가 지난 19일 구미시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러 온 시민들과 만나 인사하고 있다.
노동자가 자존심 느끼는 도시로 -쇠락한 공업도시였다가 도시재생을 통해 부활한 스페인의 빌바오나 영국의 맨체스터 등을 모델로 제시하기도 했는데.
“그들과 조건이나 환경은 다르지만, 기본적인 개념은 빌려올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구미에서는 일단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그걸 해결한 뒤에야 개혁이 가능하다. 그러지 않고 개혁을 하다가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 그런 다음에 문화도 돈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문화적 요소와 예술을 확산시키는 공간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활기찬 도시, 살맛나는 도시가 되려면 그런 공간이 중요하다. 이만한 도시에 오케스트라 하나 없는 것도 문제다. 하다못해 팝오케스트라나 극단이라도 만들어 시민들과 교감하는 장을 넓혀나가야 한다. 그러면 문화예술 도시로서의 위상을 높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 구미는 근본적으로는 노동자 도시니까 노동자가 자존심을 느끼는 도시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야 노동자들이 딴 데서 들어오지 않겠나.”
-시 의회는 야당인 자유한국당이 다수여서 정책을 추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대립구도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지역사회는 서로 다 아는 사이니까 만나서 논의하면 얼마든지 대화하면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누가 더 도시의 발전과 진화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경쟁하면서 여야가 협치하는 모델을 만들어내고 싶다. 말로만 무성한 이른바 ‘로컬 거버넌스’를 실현하려고 한다.”
학자 출신인 장세용은 앞으로 후배 학자 가운데 ‘구미 박사’가 탄생하기를 꿈꾼다. 누군가 구미를 도시 재생의 성공 사례로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정치인으로서 야무진 희망이다. 그만한 내공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 기자의 마음을 읽었는지 “정치가는 기본적으로 시민과 함께 하면서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처음이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그동안 축적한 인내심과 역량을 동원해서 문제를 풀어보겠다.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4년 동안 구미를 이끌 선장의 생각이 신선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구미/글·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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